우리의 삶이 지금보다는 어느 정도 아름다워 질 것

<삶과 죽음의 철학> (전병술 교수님) 2011학년도 봄학기
2011년 3월 2일 수요일 강의록

오리엔테이션

출석을 부르면서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했던 질문들
Q. 왜 삶과 죽음의 철학 강의에 들어왔는가
Q. 수업에 들어오기 전 강의계획서를 보았는가
Q. 앞으로 대학생활이 어떨 것 같은가
Q. 4년 동안의 대학생활은 재미있었는가
Q. 도(道)란 무엇인가
Q. 왜 영화학과에 들어갔는가
Q. 최근에 본 영화는 무엇인가
Q. 세상이 자유롭고 평화롭다고 생각하는가
Q. 자살을 시도해 본 적이 있는가
Q. 자살을 한다면 무슨 방법으로 죽고 싶은가
Q. 대학 졸업자가 많은 사회가 건전한 사회인가
Q. 왜 취직을 하려 하는가
Q. 삶이 재미있는가
Q.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가
Q. 왜 삶을 의미 있게 살아야 하는가


한국인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 40분에 한 명씩 자살을 하고 있다.
현대로 오면 올수록 우리는 죽음과 함께 살아간다.
차에 치여 죽는 것은 발 한 발짝 차이인 것처럼, 삶과 죽음은 한 발짝의 차이다.

다윈상 – 인류의 유전자 발전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상하는 상, 즉 제일 멍청하게 죽은 사람에게 주는 상
예) 코끼리에게 관장약 15개를 넣고 뒤에서 기다리다가 코끼리의 변에 깔려 죽은 사람

인류의 역사는 구멍을 뚫는 과정이었다.
구멍이란 문명의 발달을 이야기하는데, 문명이 발달할수록 죽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의 끓는 욕망 – 성교육의 시작
미국 : 순결 교육의 강조
영국 : 피임 교육의 강조
미국의 결과 성문제가 줄어드는 좋은 결과를 보였다.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죽음과 관련된 수업이 많지만 한국에는 없다.
캐나다의 한 중학교 수업을 청강한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중학교 1학년생 전부에게 “자살을 한다면 어떻게 죽고 싶은가”라고 물어봤었다.
한국의 중학교에서 만약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그 선생님은 학교에서 잘릴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죽음을 멀리하는 사회이며 더 멀어져 가고 있다. 가장 혐오하는 숫자가 4인 것이 대표적이다.
예전에는 가족의 임종을 함께하며 장례식에서도 죽은 사람과 거리가 가까웠지만, 현대로 오면서 사람이 아닌 사진에 문상을 드린다.

우리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를 인식할 때 삶의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모두가 삶을 창조적이고 자율적으로 살아간다.

대학 4년의 시간은 매우 짧은 시간이다. 금새 흘러버린다.
대학생인 우리들은 아직 죽음과 먼 나이인데 이런 얘기를 굳이 해야 할까.
인생은 고해다.
평생을 고3처럼 살아간다면 어떨까.
평생을 대학교1학년처럼 살아간다면 어떨까.

수업시간엔 의사소통이 중요하다. 죽을 때 학점을 가지고 가는가?
우리는 뭔가를 하나 버릴 때 더 자유로워진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버리는가에 대한 문제다.

대학 진학률이 85%인 한국사회의 모습은 조선말기 양반비율이 70%이었던 상황과 비슷하다.
만약 지금까지의 수업료로 주식을 굴렸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는가.
대박과 쪽박 중 하나였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학생이 취직 할 때 ‘겨우 이걸 하려고 대학을 나왔나’라는 생각을 한다.

죽음에 논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수업은
내 삶을 주체적으로 끌고 가면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한 수업이다.
죽음을 직접 체험할 수는 없지만 종교,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속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것이다.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더 윤택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

인간의 평균수명은 원시시대에 20살이었다고 하고 100년 전에는 40살, 현재에는 80살이 되었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맨 처음을 보면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난다.”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우리는 불평등할 수 밖에 없는 지구에 살아가고 있다.
과학자들은 우주가 약 150억년 전에 탄생해서 50억년 전에는 태양이 탄생하고 45억년 전에는 지구가 탄생했다고 한다. 45억년 전 지구의 최초의 생물은은 단세포 생물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조상은 박테리아인가.
당신은 진화론인가 창조론인가.

우리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자신의 탄생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것처럼말이다.(아빠와 엄마의 노력의 결실이었을지 한 순간의 실수였을지)
하지만 어찌됐든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삶을 시작하는 것은 자신이 조절할 수 없지만 죽음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사람이 갓 태어났을 때에는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라나면서 사람과 동물을 구별할 줄 알고, 더 자라나면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구별하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때는 자기의 생일파티에 친구들을 10명 정도를 데려오고
중학교 때는 친한 친구가 4~5명이 되고
고등학교 때는 1~2명으로 줄어들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전부 술친구 밖에 없다.

<僞學日益 僞道日損 위학일익 위도일손>
“학문을 한다는 것은 나날이 보태는 것이고, 도를 행한다는 것은 나날이 덜어내는 것이다.”
전자를 강조하는 것이 유가이고, 후자를 강조하는 것이 도가의 사상이다.

뭔가를 배운 다는 것, 즉 지식을 쌓는다는 것은 계속해서 매듭을 묶어가는 과정이다.
그렇게 계속 묶어가기만 한다면 공간이 좁아지고 나중에는 풀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묶였던 매듭을 한 번 푸는 순간 매우 넓은 공간이 생긴다.
자신이 고를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묶으면서 풀 줄도 알아야 한다.
무언가를 들고 있으면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삶이란 묶고 풂, 들고 내려놓음의 연속이다.

여자와 남자의 경계를 허물면 ‘사람’이 되고,
사람과 동물의 경계를 허물면 ‘생물’이 된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순간, 그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걸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는 어느 정도 아름다워 질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