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직선이 아니다.
직선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지구처럼 자전과 공전을 하며 빙글빙글 앞으로 나아가는 형태다.
별들처럼 말이다.
우리가 우주를 여행하듯 우리의 생각도 여행을 한다.
생각은 돌고 돌아 늘 제자린인듯 보이지만 제자리는 아니다.
생각의 조각들 17. 천천히 산다는 것의 의미
엄마에게서 "천천히.. 인생 천천히.." 라는 문자를 받았다.
천천히 여유롭게 사는 건 좋은 방식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천천히 살아가는 것과 늦어버리고 마는 것과는 구분을 해야한다. 천천히 살아가려면 제 때에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지혜가 필요하고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여만 한다. 천천히 살아간다는 건 대충 대충 빨리 결정을 하며 살아가지 않는 것이다. 패스트푸드를 먹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스스로 요리할 재료를 사서 음식을 만드는 건 시간이 걸린다. 그러기 위해선 뭘 먹을지, 무슨 재료가 필요한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아침식사를 느긋하게 즐기려면 아침에 일어나야 하고, 무엇보다 전날에 재료를 갖춰 놓아야 한다. 즉, 천천히 사는건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 부지런하게 사는 것은 여러모로 삶의 비용을 많이 낮춰준다. 비행기표를 세달전에 예약하는 것, 조조영화를 보는 것,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를 타는 것, 진로를 빨리 결정하는 것 등. 충동적인 결정이 더욱 더 젊음과 어울리는 것처럼 미화된다. 사실 충동적인 것이 더 재밌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만큼 비싸다. 재미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 2014 가을
천천히 여유롭게 사는 건 좋은 방식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천천히 살아가는 것과 늦어버리고 마는 것과는 구분을 해야한다. 천천히 살아가려면 제 때에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지혜가 필요하고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여만 한다. 천천히 살아간다는 건 대충 대충 빨리 결정을 하며 살아가지 않는 것이다. 패스트푸드를 먹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스스로 요리할 재료를 사서 음식을 만드는 건 시간이 걸린다. 그러기 위해선 뭘 먹을지, 무슨 재료가 필요한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아침식사를 느긋하게 즐기려면 아침에 일어나야 하고, 무엇보다 전날에 재료를 갖춰 놓아야 한다. 즉, 천천히 사는건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 부지런하게 사는 것은 여러모로 삶의 비용을 많이 낮춰준다. 비행기표를 세달전에 예약하는 것, 조조영화를 보는 것,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를 타는 것, 진로를 빨리 결정하는 것 등. 충동적인 결정이 더욱 더 젊음과 어울리는 것처럼 미화된다. 사실 충동적인 것이 더 재밌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만큼 비싸다. 재미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 2014 가을
살기 힘들어도,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최후까지 내던지지 말고
강상중, 마음의 힘
제3의 반란은 보다 심각합니다. 음습한 집단 괴롭힘이나 무차별적인 폭력 자신들의 울분을 풀기 위한 인터넷상에서의 무차별적인 공격, 나아가 예전의 국수주의를 방불케 하는 혐오 발언 등이 있습니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패배자들 혹은 몰락의 불안에 떠는 사람들 사이에서 배외주의나 사회의 '이물질'에 대한 공격에서 배출구를 찾는 경향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황폐한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곳까지 이르지 않았을까요.
하나의 방정식을 좇아 단 하나의 높은 이상을 꿈꾸고,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끝장이라며 두려워하지는 마십시오. 일단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 보고 그게 잘 안되면 몇 번이고 뻔뻔하게 방향을 바꾸면 됩니다. 마음의 풍요라는 것은 결국 내 안에 알마나 넓은 산택의 폭을 가지고 있느나는 것이니까요.
본래 생과 사는 둘다 똑같이 사람의 인생의 일부로서 둘 중의 하나만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욱체와 정신 속에서, 단지 목숨과 건강과 장수만을 볼것이 아니라 병과 늙음과 죽음도 동시에 눈 여겨 봐야 합니다. 병을 두려워해서야 건강해질 수 없고 죽음을 잊어버리고서는 삶의 기쁨이란 없습니다.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 하나하나의 목숨을 소중히 하고 혹은 이웃의 문제로서 생각하고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역사를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태도가 널리 퍼질 때 비로소 지금의 우리 사회에 만연한 마음의 병이나, 마음의 고립, 그리고 고독사 닽은 현실 역시 변화될 수 있지 않을까요?
시대와 마음을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시대와 함께 있고, 또 시대는 사람의 마음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시대는 우리들의 마음을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하고, 또 우리들의 마음이 어떤가에 따라 시대의 분위기도 달라집니다.
한스가 '인간에 관한 꿈과도 같은 시'를 영원토록 기억해 두려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평범하고 유약한 청년이 마음의 힘을 길러 인간의 본엄을, 희망을 울타리 사이로 엿보는 순간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꿈과도 같은 시는 다음과 같은 청년 한스의 술회로 용솟음칩니다.
[ 사랑은 죽음에 맞선다.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죽음보다도 더 강한 것이다.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선의를 가진 사상을 부여한다. 형식도 역시 사랑과 선의로부터만 생긴다. (...)인간은 선의와 사랑을 위해, 사고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양보해서는 안 된다. 자, 눈을 뜨자 (..)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서 나는 꿈을 끝까지 다 꾸고 목적지에 도착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서 이어받아 그 이야기를 전해 나가야 할 무언가를 여러분들 자신의 두 손으로 꽉 움켜쥐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살기 힘들어도,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최후까지 내던지지 말고 아슬아슬한 마지막 순간까지 버텨 내기를 바랍니다.나 같은 건 별 장점도 없는 평범한, 재미없는 인간이라는 식으로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의 이니시에이션을 받으면서 결코 시대에 물들지 않고 진지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평범함 가운데 위대함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진지하기 때문에 고민합니다. 그 속에서 고민하는 힘이 자라납니다.(..) 그러니 더더욱 진지하고도 절실하게 젊은이들이 마음의 힘을 기르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는 무엇이고, 사람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의 인생은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잃을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뭔가 잘못돼도 아주 크게 잘못 됐다. 늘 의지를 가지고 시작되는 사유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이내 힘을 잃고 그 자리에서 멈춰 버리며, 몸은 눈을 뜨면 움직이고 눈을 감으면 단절된 세계로 다시 들어가버리는 그 이상의 그 이하도 아닌 패턴만을 반복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내가 공부를 하고 싶은건지, 멋진 커리어를 만들어가고 싶은건지, 꿈? 꿈을 이루고 싶은건지, 아니면 영화를 보며 책을 읽으며 조용히 유유자적한 삶을 누리고 싶은건지. 명확한 구석이라곤 어느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눈물이 많아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책을 읽어도, 영화를 봐도 울컥하는 순간들이 너무 많다. 좋게 보자면 감성이 풍부해진거고, 안좋게 보자면 마음이 유약해진거다. 군대에 있을 때, 고민을 했던 것 한 가지가 눈물이 말라버렸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이 나오질 않아서 고민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의 고민을 하고 있는 상황이 재밌다.
예전에는 어떤 생각이 시작을 하게 되서 글을 쓰게 되면 최대한 내가 도출할 수 있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래야만 모든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긍정적인 결론을 만들어내는 것도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복잡한 상황을 긍정적인 문장으로 정리해낼만한 최소한의 마음의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 마저도 잃게 된다면 우리의 인생은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허지웅 작가는 '버티는' 삶이란 걸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삶은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심하게 공감되는 단어다. '버티다' 책을 좀 더 읽고서 어떻게하면 잘 버틸 수 있는지 배워야겠다. 책에서 그걸 알려줄지는 잘 모르겠다.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내가 공부를 하고 싶은건지, 멋진 커리어를 만들어가고 싶은건지, 꿈? 꿈을 이루고 싶은건지, 아니면 영화를 보며 책을 읽으며 조용히 유유자적한 삶을 누리고 싶은건지. 명확한 구석이라곤 어느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눈물이 많아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책을 읽어도, 영화를 봐도 울컥하는 순간들이 너무 많다. 좋게 보자면 감성이 풍부해진거고, 안좋게 보자면 마음이 유약해진거다. 군대에 있을 때, 고민을 했던 것 한 가지가 눈물이 말라버렸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이 나오질 않아서 고민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의 고민을 하고 있는 상황이 재밌다.
예전에는 어떤 생각이 시작을 하게 되서 글을 쓰게 되면 최대한 내가 도출할 수 있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래야만 모든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긍정적인 결론을 만들어내는 것도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복잡한 상황을 긍정적인 문장으로 정리해낼만한 최소한의 마음의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 마저도 잃게 된다면 우리의 인생은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허지웅 작가는 '버티는' 삶이란 걸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삶은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심하게 공감되는 단어다. '버티다' 책을 좀 더 읽고서 어떻게하면 잘 버틸 수 있는지 배워야겠다. 책에서 그걸 알려줄지는 잘 모르겠다.
모든 창작은 빚짐이다
(남들에게는)보잘 것 없는 에세이겠지만, 뜨거운 햇볕 아래 서있다가 문득 글을 시리즈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시리즈 제목을 정했다.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다. 써보다가 글이 잘 써지면 끈기를 가지고 써보고, 그렇지 않고 '글을 이어나가는' 흥미를 찾지 못하면 조용히 접을 생각이다.
최근 내가 글을 잘 못쓰는 명백한 이유를 한 가지 찾았다. 책을 안읽는다. 문장의 흡수가 적으면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글을 많이 읽어야만 글도 써지고 싶은 법이다.모든 창작이 그러함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무는 유를 창조하지 못한다. 모든 창작은 빚짐이다. 그러니 빚지자. 주위의 모든 존재에 빚을 지자. 영화-음악-책-그림-사진-사람을 관통하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빚을 지고서, 거기에 나만의 숨을 넣어 창작을 하자.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너이기 때문이야
인생, 이 단어를 놓고 지금부터 글을 시작해보자. 글을 많이 써봤지만 대개 제목이나 주제를 정해놓고 시작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근데 오늘은 '인생'을 던져보았다. 사실 인생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쓸 만한 자신도 없고 능력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오늘은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어려울 것도 없는 게, 내가 어떤 주제를 풀어내든, 사랑이든 연애든 모험이든 그건 모두 인생 이야기로 엮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하루를 살아감의 연속이다. 하루라고 하는 것은 보통 잠을 자고 일어나면서 시작되고, 또 잠을 자면서 끝이 나게 된다. 그렇다고 봤을 때 밤이라는 시간은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인거고 그건 즉 하루를 가장 되돌아보기에 가장 좋은 시간일터다. 우리의 노년 시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전체의 삶을 돌아보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다가올 노년의 시간일 것이다.
같은 얘기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기에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일까. 지금이다. 딱 지금 이 순간만큼 지난 삶을 바라보기에 훌륭한 때가 없다.
생각이 났다. 나는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고 싶었나보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늘 다른 이야기와 생각을 한다. 하루하루들에 특정한 제목을 붙여도 좋을 만큼, 우리의 하루들은 독특하고 유별나고 늘 다르다. 누구든지 어제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오늘을 살지 않고, 혹은 같은 생각을 하더라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을 하며 오늘 하루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지구에 70억의 인구가 살아간다면, '오늘의 지구'에는 70억 꾸러미의 생각들이 있었고, 내일은 또 다시 70억의 생각들이 우리의 별에 쌓인다. 생각을 해보자. 인류의 역사 수십만년에 걸쳐, 지구에 땅을 붙였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날들을 보냈고 우리의 별은 그걸 간직하고 있다면.
오늘 내 하루에는 '사랑'이 왔다갔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요새는 '사랑' 제일 많이 왔다간다. 친구와 만나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스물여섯살의 나이가 되니까 사실 더 이상 신선하게 다가오는 사랑이야기는 없다. 모두 어디선가 보았던 사랑이고, 어디선가 들었던 사랑이고, 어디선가 읽은 사랑이다. 하지만 어디선가 경험한 익숙한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내 사랑'이 되면 그것은 완전히 또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친구는 사랑 때문에 힘들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 친구, 사랑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얘기는 결코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한다.
"누군가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은 정말 신기한 것 같아"
생각해보니 그렇다. 우리는 왜 누군가를 좋아할까. 그리고 어떻게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는걸까. 또 좋아하게 돼서 행복하기만 하면 좋을텐데 우린 왜 아플까. 의미없는 물음이긴 하지만, 우린 이미 의미를 따지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고 있다. 혹시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이 '왜'라는 질문이 필요없는 유일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굳이 '왜'라는 질문을 하고 싶다면, 정답에 가장 가까운 답은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너이기 때문이야."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결국 사랑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아니면 사랑 이야기야 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인생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사랑 속에 있었고, 그것을 벗어난 적은 한 번도 없다. 부모의 사랑에 의해 키워지고, 스승의 사랑에 의해 가르침을 받고, 친구들과의 사랑 속에서 함께 자라왔다. 사랑이야말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가장 소중한 것이다. 대학시절에 내가 썼던 에세이 [의미있는 삶에 대하여]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결론을 '사랑'으로 내렸던 생각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랑은 이기지. 언제나 사랑이 이긴다네.
인생을 의미 있게 살려면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바쳐야 하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헌신하고, 자신에게 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는 일을 창조하는 데 헌신해야 하네.
사랑을 나눠주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진정성에 대한 고민을 계속 이어가야겠다
국제도우미 후배와 두시간동안 진정성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요새 나의 관심사가 진정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다보니 책을 읽더라도, 영화를 보더라도, 사람을 만나더라도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눈에 그려진다. 진심은 진심을 알아본다고. 요새 빠져있는 드라마 마의를 보더라도 백광현은 진정성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진정성을 알아주는 그 때가 내가 세상에서 작을 역할을 할 수 있는 때라고 생각한다. 진정성에 대한 고민을 계속 이어가야겠다. 나의 진정성을 그대들 품 안에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내 스스로가 주체가 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과의 대화
나의 시험기간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제 두 개만 더 치르면 된다. 오늘 일과를 마치고 나서 기숙사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져 잠을 잤다. 주말동안에도 많이 못자고, 시험 전날인 어제도 3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어제는 기숙사에 같이 사는 형과 대화를 하다가 새벽 4시를 넘겨 버린 것이다. 둘다 중간고사를 지내면서 느끼며 얻는 것들도 얘기하고, 그리고 평소에 수업을 들으면서 배우는 것들을 나눴다.
그리고 오늘은 시험이 끝난 3시무렵부터 약 2시간 넘게 친한 동생이랑도 얘기를 이어나갔다.
대화들은 무척 흥미로웠다. 최근에 본 교양프로그램에서 다뤘던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인간 개개인의 학습능력의 차이, 학점과 성실성의 관계, 경영학에서 마케팅이라는 부분의 역할과 마케팅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 현대사회의 소비,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한 생각들이 오갔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고찰은 작년에 '삶과 죽음의 철학'이란 수업을 계기로 정말 많이 했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가면서 스스로 많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시간 잊고 지내다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그 물음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그 동생도 그랬고 나도 늘 생각하는 것처럼,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내 스스로가 주체가 된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이 끊임없이 욕구를 가지는 존재라면 나의 욕구가 정말 나의 욕구인지 타자에 의해 생성된 욕구는 아닌지 우리는 타인과 사회가 원하는 것들을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나를 위해 돈을 많이 벌고 싶은건지, 아니면 돈이 많은 나의 모습을 좋아하는 타인을 위해 벌고 싶은 건지.
인생을 일련의 선택 과정의 묶음이라고 봤을 때, 그것이 '나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린 선택에 있어 좀 더 신중하게 나에게 의미있는 삶을 만들기 위한 쪽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나의 시험기간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제 두 개만 더 치르면 된다. 오늘 일과를 마치고 나서 기숙사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져 잠을 잤다. 주말동안에도 많이 못자고, 시험 전날인 어제도 3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어제는 기숙사에 같이 사는 형과 대화를 하다가 새벽 4시를 넘겨 버린 것이다. 둘다 중간고사를 지내면서 느끼며 얻는 것들도 얘기하고, 그리고 평소에 수업을 들으면서 배우는 것들을 나눴다.
그리고 오늘은 시험이 끝난 3시무렵부터 약 2시간 넘게 친한 동생이랑도 얘기를 이어나갔다.
대화들은 무척 흥미로웠다. 최근에 본 교양프로그램에서 다뤘던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인간 개개인의 학습능력의 차이, 학점과 성실성의 관계, 경영학에서 마케팅이라는 부분의 역할과 마케팅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 현대사회의 소비,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한 생각들이 오갔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고찰은 작년에 '삶과 죽음의 철학'이란 수업을 계기로 정말 많이 했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가면서 스스로 많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시간 잊고 지내다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그 물음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그 동생도 그랬고 나도 늘 생각하는 것처럼,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내 스스로가 주체가 된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이 끊임없이 욕구를 가지는 존재라면 나의 욕구가 정말 나의 욕구인지 타자에 의해 생성된 욕구는 아닌지 우리는 타인과 사회가 원하는 것들을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나를 위해 돈을 많이 벌고 싶은건지, 아니면 돈이 많은 나의 모습을 좋아하는 타인을 위해 벌고 싶은 건지.
인생을 일련의 선택 과정의 묶음이라고 봤을 때, 그것이 '나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린 선택에 있어 좀 더 신중하게 나에게 의미있는 삶을 만들기 위한 쪽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네이트의 실시간 뉴스를 보는 단상
네이트의 실시간 뉴스를 보는 단상斷想
2012년 4월 18일
유독 네이버와 네이트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뉴스들의 노출빈도가 높아서 잘 안들어가려고 노력하지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들어와 뉴스나 보면서 숨을 돌려볼까라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네이트에 들어갔더니 결국 실시간 급상승 관심뉴스의 자극적인 제목들을 클릭 아니하지 못하고 모두 읽어버렸다.
우리 사회가 언제라도 한 번 조용한 날이 있었을까 하냐마는, 뭘 기대하고서 포털에 접속해서 기사들을 읽었는지 싶다.오늘 날짜 뉴스에는 10대들이 또래 여자를 살해하고 암매장했다는 얘기, 버스가 2시40분 늦게 도착해 관계자를 무릎꿇어 사과하게 했다는 '무릎녀'이야기, 얼마전 당선된 국회의원이 대필논문 논란으로 탈당한다는 얘기, 10대 학생이 괴롭힘을 당하고 자살했다는 얘기. 누구라도 그 제목만 보면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내용이 아닐까 싶다.
미디어는 이렇게 사회의 문제를 공론화시키고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한다. 오늘의 관심뉴스는 무엇인가 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뉴스창을 둘러보는 나와 같은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은 '이 기사', '저 기사'를 클릭하고 읽어내려가면서 결국 분노게이지만 상승시키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향한 분노. 그리고는 '이 나라는 안되겠다' '이 나라는 미쳤다' 라는 염세주의적 사고를 표출하기도 하고, 특정 인물에 대한 분노로 표출하기도 한다.
아래는 '10대들의 집단 구타-살해' 관련 기사에 달린 (베스트)댓글들이다.
모두들 '사형시켜라'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만큼 흉악한 사건이기 때문에 댓글들의 수위도 높은 점이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분노케 만드는 사건이다. 불특정다수의 말대로, 살인을 한 사람들을 사형시키고, 그리고 흉악범으로 클 것 같은 사람은 아예 싹부터 잘라버린다면 그럼 이 사회는 더 나아질까. 그때서야 그들의(우리들의) 분노가 좀 가라앉을 수 있을까. 조금 더 과학이 발전하게 된다면 아예 범죄인자를 가지고 태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모두 사전에 차단하자는 소리도 할까. (혹시나 해서 구글에서 검색해봤는데 영국의 과학자들이 범죄인자를 식별해내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한다는 뉴스를 발견했다.)
(과학자들, 범죄자로 성장할 수 있는 아이들 식별하는 기술 개발)
그래서 결론은, 네이트의 실시간 톱뉴스를 보면서 드는 짧은 생각은 미디어가 너무 쉽게 국민들을 분노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미디어의 순기능일수도 있고 역기능일수도 있다. 그들은 국민들을 '분노할만한' 기사에 노출시켜서 '댓글'이라는 수단으로 그들의 분노를 표출시키게 하고, 그걸로 끝이다. 누군가는 한숨을 쉬며 창을 내릴 것이고, 누군가는 다른 웹사이트로 접속해 언제 그런 분노를 가졌냐는듯 옷을 쇼핑할 것이고, 누군가는 분노를 더 공유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다른 사이트에 퍼다나르기도 하고, 더 분노한 누군가는 사건의 가해자들(혹은 주인공)의 정보를 파헤치면서 흔히 말하는 '마녀사냥'을 한다. 포털사이트의 입장에서는 페이지뷰 수가 곧 광고수익으로 연결되니 최대한 많은 네티즌들이 그들의 포털에서 기사를 봐주는 것을 좋아할 것이고, 네티즌들이 더 그 사이트에서 오래도록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 사건에 대한 제목을 더욱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만들어서 계속적으로 클릭하게 만들 것이고, 결국 우리들이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소모적인 댓글 논쟁을 벌일수록 올라가는 건 페이지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배너광고의 자릿세이다. 솔직히 그건 퇴근길의 국민들을 분노하게 하는 대가에 비할게 못되지 않는가.
아... 결국 이모든 것은 사랑의 결여라는 생각도 든다. 같은 반의 친구를 사랑하지 못하고, 버스기사님을 존경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지 못하니까 대필 논문도 쓰는 거고...
미디어가 국민들에게 '분노'를 배포하여 사회적으로 공론화시켜서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거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국민들에게 '사랑'도 있다는 걸, 여전히 이 사회는 아름답다는 걸 알려주는 기사들 또한 많이 보여줘야 하는건 아닌지 싶다.
2012년 4월 18일
유독 네이버와 네이트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뉴스들의 노출빈도가 높아서 잘 안들어가려고 노력하지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들어와 뉴스나 보면서 숨을 돌려볼까라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네이트에 들어갔더니 결국 실시간 급상승 관심뉴스의 자극적인 제목들을 클릭 아니하지 못하고 모두 읽어버렸다.
우리 사회가 언제라도 한 번 조용한 날이 있었을까 하냐마는, 뭘 기대하고서 포털에 접속해서 기사들을 읽었는지 싶다.오늘 날짜 뉴스에는 10대들이 또래 여자를 살해하고 암매장했다는 얘기, 버스가 2시40분 늦게 도착해 관계자를 무릎꿇어 사과하게 했다는 '무릎녀'이야기, 얼마전 당선된 국회의원이 대필논문 논란으로 탈당한다는 얘기, 10대 학생이 괴롭힘을 당하고 자살했다는 얘기. 누구라도 그 제목만 보면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내용이 아닐까 싶다.
(모두 안타깝고, 분노하게 되고, 부정적인 내용의 기사들)
미디어는 이렇게 사회의 문제를 공론화시키고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한다. 오늘의 관심뉴스는 무엇인가 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뉴스창을 둘러보는 나와 같은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은 '이 기사', '저 기사'를 클릭하고 읽어내려가면서 결국 분노게이지만 상승시키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향한 분노. 그리고는 '이 나라는 안되겠다' '이 나라는 미쳤다' 라는 염세주의적 사고를 표출하기도 하고, 특정 인물에 대한 분노로 표출하기도 한다.
아래는 '10대들의 집단 구타-살해' 관련 기사에 달린 (베스트)댓글들이다.
모두들 '사형시켜라'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만큼 흉악한 사건이기 때문에 댓글들의 수위도 높은 점이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분노케 만드는 사건이다. 불특정다수의 말대로, 살인을 한 사람들을 사형시키고, 그리고 흉악범으로 클 것 같은 사람은 아예 싹부터 잘라버린다면 그럼 이 사회는 더 나아질까. 그때서야 그들의(우리들의) 분노가 좀 가라앉을 수 있을까. 조금 더 과학이 발전하게 된다면 아예 범죄인자를 가지고 태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모두 사전에 차단하자는 소리도 할까. (혹시나 해서 구글에서 검색해봤는데 영국의 과학자들이 범죄인자를 식별해내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한다는 뉴스를 발견했다.)
(과학자들, 범죄자로 성장할 수 있는 아이들 식별하는 기술 개발)
그래서 결론은, 네이트의 실시간 톱뉴스를 보면서 드는 짧은 생각은 미디어가 너무 쉽게 국민들을 분노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미디어의 순기능일수도 있고 역기능일수도 있다. 그들은 국민들을 '분노할만한' 기사에 노출시켜서 '댓글'이라는 수단으로 그들의 분노를 표출시키게 하고, 그걸로 끝이다. 누군가는 한숨을 쉬며 창을 내릴 것이고, 누군가는 다른 웹사이트로 접속해 언제 그런 분노를 가졌냐는듯 옷을 쇼핑할 것이고, 누군가는 분노를 더 공유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다른 사이트에 퍼다나르기도 하고, 더 분노한 누군가는 사건의 가해자들(혹은 주인공)의 정보를 파헤치면서 흔히 말하는 '마녀사냥'을 한다. 포털사이트의 입장에서는 페이지뷰 수가 곧 광고수익으로 연결되니 최대한 많은 네티즌들이 그들의 포털에서 기사를 봐주는 것을 좋아할 것이고, 네티즌들이 더 그 사이트에서 오래도록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 사건에 대한 제목을 더욱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만들어서 계속적으로 클릭하게 만들 것이고, 결국 우리들이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소모적인 댓글 논쟁을 벌일수록 올라가는 건 페이지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배너광고의 자릿세이다. 솔직히 그건 퇴근길의 국민들을 분노하게 하는 대가에 비할게 못되지 않는가.
아... 결국 이모든 것은 사랑의 결여라는 생각도 든다. 같은 반의 친구를 사랑하지 못하고, 버스기사님을 존경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지 못하니까 대필 논문도 쓰는 거고...
미디어가 국민들에게 '분노'를 배포하여 사회적으로 공론화시켜서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거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국민들에게 '사랑'도 있다는 걸, 여전히 이 사회는 아름답다는 걸 알려주는 기사들 또한 많이 보여줘야 하는건 아닌지 싶다.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의 학생들이 행복해질까?
2012년 3월 16일
이번 주부터 모든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모든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로운 과목들과 좋은 교수님들을 만난 것 같아 정말 기쁘다. 그리고 수업에서 교수님들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자꾸 속으로 '정말 그게 옳은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요새 모든 대상에 질문을 던지려는 버릇이 들었다. 다시 한 번 기대되는 한 학기라고 쓰고 싶다.
그제 <인지과학의 이해>의 홍우평 교수님께서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주셨다.
왜 중고등학교에 있는 일진이 대학에는 없을까? 도대체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사람의 행동이 그토록 크게 바뀔까?
생각해보면 초중고 전체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노스페이스 패딩도 대학에서는 전혀 다른 나라 이야기다. 대학교에서 빵셔틀이 과연 있을까. 대학교에서의 빵셔틀은 상상이 가지도 않는다. 만 18세에서 만 19세로 한 살 더 먹으면서 대단한 사고의 전환이 이뤄지는 걸까? 만약 고3을 마치고 나서 대학교 1학년이 되는게 아니라 고4가 된다해도 문제가 없어질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고등학교 4학년과 대학교 1학년이 사는 세계는 다르고 너무 다르다.
일진의 빵셔틀이라든지, 노스페이스 패딩 문제라든지 하는 중등교육 시기를 가로지르고 있는 여러가지 사회 문제들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몇가지 키워드들로서 그 원인들을 생각해낼 수 있다.
금지, 구속, 입시 교육, 획일화..
내가 고등학교를 다닌 건 벌써 7년도 더 된 일이기는 하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과 지금과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보인다. 적어도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노스페이스 패딩 같은 건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빵셔틀.. 다른 학교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학교에는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모든 학교가 이런 문제들을 갖고 있을리는 만무하다. 우리가 미디어로 접하는 뉴스들은 모두 특별한 경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그런 뉴스를 너무 자주 접하다보니 신경이 많이 가기도 하고, 등골브레이커라는 말은 대학가에서는 '등록금이 등골브레이커'라는 현수막으로 까지 이용되고 있으니 이미 사회적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큰 이슈가 된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저 우리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은 문제가 되어 학생들, 학부모들, 선생님들을 괴롭히고 있으니 안타깝다. 무엇보다 자식에게 비싼 패딩을 사입히지 못하는 부모님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정말 슬프다.
대학 사회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고3이 입시 공부에 목숨을 걸듯이, 대학생들은 취업이라는 장벽과 싸우고 있다. 지금은 등록금과의 싸움도 크게 벌이고 있고 말이다. 고등학생이 성적을 비관하여 뛰어내리듯이, 유수의 대학을 다니는 대학생들도 뛰어내린다. 다들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싸움의 성격은 비슷한듯 하면서도 너무도 다르다. 아침 8시부터 저녁때까지 같은 교실에서 구속을 받으며 공부하는 고등학생들과 넘치는 자유를 주체하지 못하는 대학생들의 싸움은 다르다. 그리고 적어도 대학생들에겐 취업, 연애, 스펙 등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술이든, 여행이든 그걸 풀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도 있다. 기분이 우울하면 머리 색깔을 바꿔서 기분 전환을 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엔 행복한 학생들이 많을까, 행복하지 않은 학생들이 많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의 학생들이 행복해질까?
이번 주부터 모든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모든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로운 과목들과 좋은 교수님들을 만난 것 같아 정말 기쁘다. 그리고 수업에서 교수님들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자꾸 속으로 '정말 그게 옳은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요새 모든 대상에 질문을 던지려는 버릇이 들었다. 다시 한 번 기대되는 한 학기라고 쓰고 싶다.
그제 <인지과학의 이해>의 홍우평 교수님께서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주셨다.
왜 중고등학교에 있는 일진이 대학에는 없을까? 도대체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사람의 행동이 그토록 크게 바뀔까?
생각해보면 초중고 전체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노스페이스 패딩도 대학에서는 전혀 다른 나라 이야기다. 대학교에서 빵셔틀이 과연 있을까. 대학교에서의 빵셔틀은 상상이 가지도 않는다. 만 18세에서 만 19세로 한 살 더 먹으면서 대단한 사고의 전환이 이뤄지는 걸까? 만약 고3을 마치고 나서 대학교 1학년이 되는게 아니라 고4가 된다해도 문제가 없어질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고등학교 4학년과 대학교 1학년이 사는 세계는 다르고 너무 다르다.
일진의 빵셔틀이라든지, 노스페이스 패딩 문제라든지 하는 중등교육 시기를 가로지르고 있는 여러가지 사회 문제들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몇가지 키워드들로서 그 원인들을 생각해낼 수 있다.
금지, 구속, 입시 교육, 획일화..
내가 고등학교를 다닌 건 벌써 7년도 더 된 일이기는 하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과 지금과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보인다. 적어도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노스페이스 패딩 같은 건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빵셔틀.. 다른 학교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학교에는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모든 학교가 이런 문제들을 갖고 있을리는 만무하다. 우리가 미디어로 접하는 뉴스들은 모두 특별한 경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그런 뉴스를 너무 자주 접하다보니 신경이 많이 가기도 하고, 등골브레이커라는 말은 대학가에서는 '등록금이 등골브레이커'라는 현수막으로 까지 이용되고 있으니 이미 사회적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큰 이슈가 된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저 우리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은 문제가 되어 학생들, 학부모들, 선생님들을 괴롭히고 있으니 안타깝다. 무엇보다 자식에게 비싼 패딩을 사입히지 못하는 부모님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정말 슬프다.
대학 사회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고3이 입시 공부에 목숨을 걸듯이, 대학생들은 취업이라는 장벽과 싸우고 있다. 지금은 등록금과의 싸움도 크게 벌이고 있고 말이다. 고등학생이 성적을 비관하여 뛰어내리듯이, 유수의 대학을 다니는 대학생들도 뛰어내린다. 다들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싸움의 성격은 비슷한듯 하면서도 너무도 다르다. 아침 8시부터 저녁때까지 같은 교실에서 구속을 받으며 공부하는 고등학생들과 넘치는 자유를 주체하지 못하는 대학생들의 싸움은 다르다. 그리고 적어도 대학생들에겐 취업, 연애, 스펙 등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술이든, 여행이든 그걸 풀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도 있다. 기분이 우울하면 머리 색깔을 바꿔서 기분 전환을 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엔 행복한 학생들이 많을까, 행복하지 않은 학생들이 많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의 학생들이 행복해질까?
지금부터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은 삶의 이음에 관한 것이다
2012년 2월 15일
지금부터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은 삶의 이음에 관한 것이다. 글을 쓸 때마다 어떤 식으로 글을 시작해야되는지 매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글을 이렇게 써내려가기 시작한 다음 이 글이 끝에 가서는 어떤 식으로 글이 끝맺음을 할지 전혀 알 수 없다. 애초에 내가 의도했던 방향으로 글이 써내려가지지 않을 수도 있고, 애초에 의도했던 글쓰기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과 고민을 담는 글이 나올 수도 있다. 일단은 이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부터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은 삶의 어느 순간에 느끼게 되는 '이어져 있음'에 관한 것이다. 어제 그러니까 2월 14일 저녁을 기숙사의 친구와 함께 먹으면서 하나의 대화 주제를 가지게 된다. 수강신청 기간을 일주일여 앞둔 시점이라서 모두가 시간표를 만드느라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이 친구가 원래 2학점이었던 '글쓰기'과목이 이번 학기부터는 3학점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전해주면서 우리의 대화는 이어져나갔다. 우리의 대화는 보통 관찰되어지는 자그만한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그 사실에서 그 친구는 학교 행정 당국의 부족한 공지, 학생의 의견을 전혀 수용하지 않는 처사, 학생회 역할의 필요성 등으로 이야기를 확장시켜 나갔다. 나는 그에 대해서 친구에게 반론아닌 반론같은 성격의 질문을 해가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애초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3시간 반동안 이어졌고 그러면서 대화의 주제는 한국 사회의 교육 시스템, 대학은 무엇이고 대학생은 누구인가, 즉 우리들은 누구인가로에 대한 이야기로까지 확장되어 나갔다.
모든 사람들은 객관적 사실(현상)과 대상을 받아들일 때 모두 저마다의 가치관과 사상에 입각하여 다르게 바라보고 해석한다. 그것은 곧 다양성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이 사회를 유지하고 지속시키는 힘의 근원이 된다. 다름이 있기 때문에 사회는 진보와 퇴보를 거듭하며 진보해 나간다. 다양성의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일수록 더 건강한 사회다. 다양성을 해치려는 세력마저 또 다른 다양성으로 인정을 받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 것이다. 다양성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것은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고, 자신의 생각만을 옳다고 생각하여 남에게 강조하지 않으며 다름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은 본디 모두가 다른데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한다면 개개인의 존재 방식은 자꾸 억압받게 되어 건강하지 못한 사회적 현상을 표출하게 된다.
즉, 모든 객관적 현상에 대해서 사람마다 받아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 어제 대화의 핵심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평소에 그러한 생각을 쉽게 망각하고 살아간다. '아니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왜 이렇게 생각하는거지?' '어떻게 그 사건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그 사람이 불쌍하지도 않아?' 등등 우리들은 똑같은 현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비슷한 주파수의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기 때문에 많은 갈등을 유발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다양함' 또한 다양성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한 세력이 '다양한 다양성'보다 더 크다면 정말 '다양성'이 억압받기 때문에 건강한 사회가 못된다는 것이다.
나는 어제 친구에게 '나'라는 사람의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객관적 사실을 접했을 때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느끼는지 그리고 그 사실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다보니 그것은 지금까지 쭉 내가 살아온 날들에 이야기가 되었다. 친구에게 계속 말하면서 처음에 말할 의도가 없었던 나의 과거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계속 연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로 풀어내지 않았더라면 전혀 연관성을 가질 수 없는 별개의 사건이라고 보았을 개인적 역사가 같은 하나의 생각 아래 묶이고 있었다. 이야기는 꼬리의 꼬리를 물어 작년 대학생활까지 이어져와서 '환경분석론 수업의 교훈','불교철학 교수님의 가르침','인적자원개발론의 프로젝트에서 얻은 즐거움'으로 계속되었다.
길고 긴 대화를 마치고 각자의 방에 올라갔고 나는 다시 한번 친구와 나눈 대화의 의미를 되새긴다. 개인을 둘러싼 환경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개인이 특정 시간대에서 생각하는 것도 모두 다르지만 결국 같은 뿌리를 두고서 벌어지는 것들이다. 그 뿌리라는 것은 결국 '나'라는 사람이고 그건 '개인이 살아온 시간'과 동일하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내가 이 글에서 하고 싶은 애기를 적어보자.
개인이 만들어내는 모든 문제와 고민들은 사실 애초에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을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개인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내가 요새 가장 문제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마지막 대학생활을 앞두고 다가오는 취업 준비를 비롯한 미래에 대한 총체적 고민을 안고있다. 난관을 잘 헤쳐나가는 내 자신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당장 먹고 살 일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1년 동안 나의 모든 미래가 결정되는 건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존재한다. 이것이 내가 안고 있는 고민이다.
나는 어제 잠자리에 들기전에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최신 뉴스기사들을 읽어내려갔다. 하지만 그 때 우연하게도 나의 병영일기를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모든 병영일기를 인터넷에 올려놓은 덕분에 생각날 때마다 찾아 읽는 일이 많다.) 나의 군생활 일기 중에서 가장 많이 읽는 부분은 상병과 병장 때의 부분이었는데, 어제는 희한하게도 좀 더 오래 전의 일기를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삶은 늘 언제나 이런식으로 우연한 이끌림에 의해 재생된다.)
그리고 몇 개의 일기를 읽어내려가면서 난 '삶의 이어져 있음' (이 글의 주제)을 느끼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일기를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면 갈수록 그러한 글들이 나의 지금 모습에 반영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 당시에는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사실들에 대해 지금에서는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꼈다.
09년 4월 27일 http://seonil.egloos.com/9967345
"책 한자를 더 읽고, 단어 하나를 더 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내면의소리는 곧 나의 글로써 표현이 된다.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데 시간을 아끼지 말도록 하자. 글은 어떻게든 써지는 건가보다. 인생이 어떻게든 살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내 인생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로 내 인생을 꽉 꽉 채우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가 나 자신의 모습을 뛰어넘게 만든다. 그저 그런 사이의 사람이 부탁했으면 정중히 거절했을 일들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부탁하면 아무리 어려운 부탁이더라도 모두 들어주고 싶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계속해서 사랑하고 볼일이다. 참 골치아픈 인류애다. 사람을 사랑한다니.. 그래서 다들 보고싶다. 당신들과 함께 숨쉬는게 너무도 행복하다. 나는 타인의 인정과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걸 잊지말자.
09년 4월 26일 http://seonil.egloos.com/9967342
"깨어있다는 생각. 눈이 깨어있고, 귀가 깨어있고, 그리고 내 정신이 깨어있고. 늘 깨어있자. 세상의 기운을 모두 받아들이자. 살아있음을 느끼자."
09년 4월 23일 http://seonil.egloos.com/9967340
가장 최악의 경우는 사람에 대한 흥미를 잃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흥미를 잃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갈 수 있나. 한겨레 신문과 씨네21을 읽으면서 내가 가지는 느낌이다. 그저 나하나만 잘 살자고 살면 안될 것 같은 그런 생각을 심어준다. 내 깊숙이 진보라는게 자리잡았던걸까, 아니면 모든 사람들은 진보로 향하게 되는 것이라서 그러는 걸까.
진보라고 할 수 있나 싶다. 이건 인간애다. 다 같이 잘 살아보자에서 출발하는 그런...
나란 사람 철저히 중간에 서려는 것 같다. 무섭고 잔인한 지성인이 되고 싶기도 하지만 내 모든걸 희생하는 매우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나야. 나는 언제든 변할 수 있으며 내 마음가는 대로 날 완성해가며, 세상의 모든 존재형태(방식)을 한없이 존중한다. 기형도로서의 삶도 멋지고, 할리데이비슨족들의 삶도 멋있고, 운동선수의 삶도 멋있고,. 그래 된장녀와 된장남의 존재 방식까지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 다름의 인정이다. 완전한 인정이다. 세상에 절대기준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 인정은 어디까지나 신념이 존재하는 인간에 한해서다. 자신의 행동과 말과 존재방식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 있을만한 신념. 굳이 설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알고 있어야 된다.
사랑한다. 내 삶과 내 존재를 사랑한다. 그리고 살면 살아갈수록 명확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를 멋지게 만들어 갈 것이다.
09년 4월 11일 http://seonil.egloos.com/9936322
기뻤다. 내가 썼던 글들을 보면서 당시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를 알수있는데 그 생각들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내 글들이 예전의 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때 당시 그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에 놀라버린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글쓰기에 집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글쓰기는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내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것은 한 나라의 일들을 기록하는 역사와도 같다. 이번처럼 예전에 썼던 글들에서 지금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건 대단히 멋진 일이다. 글쓰기의 위력을 실감한다. 내가 쓴글의 가장 큰 수혜자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란 사실을 알았다. 당분간은 일기를 온라인에 옮기는데 좀 더 치중하자. 그걸 통해서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고 있다. 너무도 재미있다. 내가 썼던 글을 통해서 '나'를 찾아가는 느낌이다. 나란 사람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나란 사람은 일정한 범위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지금은 매우 기쁘다. 내가 누군지 알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감이 충전된다. 부드럽게 나가자.
그때 당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하는게 아니다.) 나란 존재를 알아가는 것이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때처럼 나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자. 그 범위는 상상력을 통해 확산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글쓰는 연습을 계속하다보면 어쩌면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세상을 바꿀수 있는 아이디어가 나올지도 모른다.
내가 그동안 기표에 너무 얽매여 있었던 것 같다. 기표는 기의를 모두 표현해낼 수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 머릿속의 생각들(기의)이고, 내게 필요한 것은 그것들을 최대한 모두 끄집어내어서 나에게 허락된 능력을 사용해 표현 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표의 함정에 빠지지 말도록 하자. 나에게 필요한 것은 글씨연습이 아니라 글연습이니까.
사람을 사귀는 방법이 필요한 게 아니라, 진정한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
세상의 핵심은 속뜻에 있다는 것을 지금 이순간부터 잊지 않기로 하자.
그리고 아래의 일기가 3년 전 딱 이 맘 때 내가 쓴 글이다.
난 어젯밤 이 글을 읽고서 내 스스로 갇혀있던 고민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이것이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삶'이 순간순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우주다.
2009년 1월 19일 휴가를 나가서 (3년 전의 내가 쓴 글)
정말 길고 긴 하루였고 꿈을 꾸는 듯한 하루였다.
오늘도 아침 일찍 서둘러서 일어났다. 전날 밤 인터넷으로 영화 '비카인드 리와인드'를 종로의 서울극장에 예매를 해놓았다. 형 집에서 9시정도에 빠져나왔다. 날씨가 꽤 따뜻했다. 종로까지는 지하철 대신 내가 좋아하는 버스를 타고 가기로 생각했다.일단 노량진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노량진에 거의 도착해서 며칠전 노량진에서 임용고시 대비강의를 듣고 있는 친구가 생각났다.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했고 바로 만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내가 가장 많이 의지하고 서로 많은 도움을 주고 가장 즐거운 추억을 함께 만들었던 나의 베스트프렌드! 너무 기뻤다. 거의 2년만에 처음 본것이니. 그 동안엔 그 친구의 연락처가 바뀌어서 연락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친구는 그대로였다. 예전처럼 밝았고 의욕도 넘쳐보였다. 우린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핫초코를 마시면서 그동안의 못다한 이야기들을 초스피드로 나누었다. 그친구나 나나 말이 엄청빠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그 친구와 떨어지게 된 이후로 그렇게 말이 잘 통하고 정신이 없을정도로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는 만나기 힘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약 한시간 동안 온갖 주제를 아우르며 이야기를 나눴다. 한시간이 1분 처럼 느껴졌고, 대화를 하면서 우리 둘 모두는 변하지 않았으면서도 더 성장한 모습에 서로 감탄을 했다. '네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고등학교 그 때의 모습, 여전히 변하지 않고 너로 남아줘서 고마워!' 대화 속에 오갔던 친구와 나의 고민들이 모두 잘 해결되길 바랄뿐이다.
영화 시작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급히 극장으로 갔다. 역시 오랜만에 가보는 종로. 영화 '비카인드 리와인드' 꼭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 영화는 무척 재미있었고 훈훈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어제 책을 사기 위해 학교 앞 서점을 갔지만 결국 고르지 못했다. 어떤 책을 사야 가장 돈이 아깝지 않고 현재 내가 필요로 하는 부분들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라는 생각때문이었다. 어쩌면 나의 완벽주의나 시간적 효율에 대한 강박증이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까. 비카인드 리와인드 영화는 문제를 단방에 해결해 주었다. 완벽할 필요는 없다는 것.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영화가 전해주는 메세지가 정확히 그것은 아니지만 내가 포착한 것은 그것이다. DVD의 날카로운 화질과 고감도의 음질을 비디오테이프는 절대 따라갈 수 없지만 그런 DVD조차도 완벽할 수는 없다. 그 채워지지 못하는 것이 휴머니즘이든 옛것에 대한 따뜻함이든 그리고 새로운 기술에 대한 것이든. 세상은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완벽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은 헛 될수도 있다. 그 영화를 보고서 종로거리로 빠져나왔는데 날씨가 따뜻한 것이다. 겨울인데도. 바로 가방안에 있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내가 보고 있는 영상에 배경음악이 흘렀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완벽한 해답을 찾는다기 보다는 해답에서 좀 비껴나와 인생을 즐기는 태도. 수많은 영화에서 보고 깨달았던 내용이지만 이번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깨달았다. That's why I love movie.
그래서 난 서점으로 갔다. (그래서 난 비디오 대여점에 갔다.) 어제처럼 완벽한 책(완벽한 비디오)만을 찾으려 하지 않을거란 다짐을 했다. 쭉 훑어봤다. 마음이 이끌리는 분야(장르)쪽으로 갔다. 읽고 싶은 책(보고 싶은 비디오)을 집어 들었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카운터에가서 책 값을 (비디오 대여료) 계산했다. 서점(비디오 대여점)을 빠져나왔다. 기분이 좋았다.
어젠 1시간 넘게 서점에 있었는데도 책을 사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바로 고를 수 있었다. 신중한 결정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흠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을 골랐고 그 책에서 인생의 완벽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은 가지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 어찌되었든 한 권의 책은 세상을 담고 있고 말이다. 나중에 내가 직업의 선택에서도 이런 생각이 중요하지 않을까. 너무 완벽한 직장, 연봉도 높고 복리후생도 좋고 일은 어렵지 않고 명예도 가져다주는 직장. 그런 직장을 찾아헤매다가 난 서점에서 처럼 방황만 하다가 서점 밖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취직을 하기 위해선 눈높이를 낮추라고들 말하지만 눈높이를 낮추어선 안된다. 그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꿈을 낮추는 것이나 다름없다. 눈높이를 낮추다기 보다는 완벽함에 대한 환상을 깨야한다는 것이 더 맞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책이라고해서 아카데미시상식의 작품상을 받은 영화라고해서 신이내린직장이라 불리는 몇몇 직장들이라해서 완벽한 것은 아니다. 결국은 나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다. 세상으로부터 칭송받는 좋은작품을 읽어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책 속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돈을 많이주는 기업이라고 해서 나와 맞지않으면 그건 아니다. 결국 이 모든 문제(선택에 관한 문제)의 답은 나 자신으로 통한다. '완벽'은 환상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가는대로 좋아하는대로 즐겁게 가야한다. 영화 한편이 나의 생각을 이렇게 확장시켜줬다.
오랜만에 도심을 걸었다. 종로-청계천- 을지로-시청-남대문시장-서울역까지. 예전에도 한가로운 날이면 자주걸었던 코스다. 길을 걷다보면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이 보인다.종로와 을지로의 높이 솟은 회사의 빌딩들과 세련된 회사원과 청계천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 예술과 들과 남대문시장의 언 손을 녹이는 상인들과 서울역의 노숙자들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삶. 그것을 모두 이해하고 아우르는게 내가 원하는 것이다. 편견없이 모든 세상사람들을 바라보고 싶다.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2009년 1월 19일 군생활 일기, 휴가를 나와서
http://seonil.egloos.com/9901021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 된다.
지금부터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은 삶의 이음에 관한 것이다. 글을 쓸 때마다 어떤 식으로 글을 시작해야되는지 매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글을 이렇게 써내려가기 시작한 다음 이 글이 끝에 가서는 어떤 식으로 글이 끝맺음을 할지 전혀 알 수 없다. 애초에 내가 의도했던 방향으로 글이 써내려가지지 않을 수도 있고, 애초에 의도했던 글쓰기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과 고민을 담는 글이 나올 수도 있다. 일단은 이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부터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은 삶의 어느 순간에 느끼게 되는 '이어져 있음'에 관한 것이다. 어제 그러니까 2월 14일 저녁을 기숙사의 친구와 함께 먹으면서 하나의 대화 주제를 가지게 된다. 수강신청 기간을 일주일여 앞둔 시점이라서 모두가 시간표를 만드느라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이 친구가 원래 2학점이었던 '글쓰기'과목이 이번 학기부터는 3학점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전해주면서 우리의 대화는 이어져나갔다. 우리의 대화는 보통 관찰되어지는 자그만한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그 사실에서 그 친구는 학교 행정 당국의 부족한 공지, 학생의 의견을 전혀 수용하지 않는 처사, 학생회 역할의 필요성 등으로 이야기를 확장시켜 나갔다. 나는 그에 대해서 친구에게 반론아닌 반론같은 성격의 질문을 해가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애초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3시간 반동안 이어졌고 그러면서 대화의 주제는 한국 사회의 교육 시스템, 대학은 무엇이고 대학생은 누구인가, 즉 우리들은 누구인가로에 대한 이야기로까지 확장되어 나갔다.
모든 사람들은 객관적 사실(현상)과 대상을 받아들일 때 모두 저마다의 가치관과 사상에 입각하여 다르게 바라보고 해석한다. 그것은 곧 다양성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이 사회를 유지하고 지속시키는 힘의 근원이 된다. 다름이 있기 때문에 사회는 진보와 퇴보를 거듭하며 진보해 나간다. 다양성의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일수록 더 건강한 사회다. 다양성을 해치려는 세력마저 또 다른 다양성으로 인정을 받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 것이다. 다양성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것은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고, 자신의 생각만을 옳다고 생각하여 남에게 강조하지 않으며 다름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은 본디 모두가 다른데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한다면 개개인의 존재 방식은 자꾸 억압받게 되어 건강하지 못한 사회적 현상을 표출하게 된다.
즉, 모든 객관적 현상에 대해서 사람마다 받아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 어제 대화의 핵심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평소에 그러한 생각을 쉽게 망각하고 살아간다. '아니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왜 이렇게 생각하는거지?' '어떻게 그 사건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그 사람이 불쌍하지도 않아?' 등등 우리들은 똑같은 현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비슷한 주파수의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기 때문에 많은 갈등을 유발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다양함' 또한 다양성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한 세력이 '다양한 다양성'보다 더 크다면 정말 '다양성'이 억압받기 때문에 건강한 사회가 못된다는 것이다.
나는 어제 친구에게 '나'라는 사람의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객관적 사실을 접했을 때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느끼는지 그리고 그 사실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다보니 그것은 지금까지 쭉 내가 살아온 날들에 이야기가 되었다. 친구에게 계속 말하면서 처음에 말할 의도가 없었던 나의 과거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계속 연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로 풀어내지 않았더라면 전혀 연관성을 가질 수 없는 별개의 사건이라고 보았을 개인적 역사가 같은 하나의 생각 아래 묶이고 있었다. 이야기는 꼬리의 꼬리를 물어 작년 대학생활까지 이어져와서 '환경분석론 수업의 교훈','불교철학 교수님의 가르침','인적자원개발론의 프로젝트에서 얻은 즐거움'으로 계속되었다.
길고 긴 대화를 마치고 각자의 방에 올라갔고 나는 다시 한번 친구와 나눈 대화의 의미를 되새긴다. 개인을 둘러싼 환경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개인이 특정 시간대에서 생각하는 것도 모두 다르지만 결국 같은 뿌리를 두고서 벌어지는 것들이다. 그 뿌리라는 것은 결국 '나'라는 사람이고 그건 '개인이 살아온 시간'과 동일하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내가 이 글에서 하고 싶은 애기를 적어보자.
개인이 만들어내는 모든 문제와 고민들은 사실 애초에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을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개인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내가 요새 가장 문제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마지막 대학생활을 앞두고 다가오는 취업 준비를 비롯한 미래에 대한 총체적 고민을 안고있다. 난관을 잘 헤쳐나가는 내 자신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당장 먹고 살 일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1년 동안 나의 모든 미래가 결정되는 건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존재한다. 이것이 내가 안고 있는 고민이다.
나는 어제 잠자리에 들기전에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최신 뉴스기사들을 읽어내려갔다. 하지만 그 때 우연하게도 나의 병영일기를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모든 병영일기를 인터넷에 올려놓은 덕분에 생각날 때마다 찾아 읽는 일이 많다.) 나의 군생활 일기 중에서 가장 많이 읽는 부분은 상병과 병장 때의 부분이었는데, 어제는 희한하게도 좀 더 오래 전의 일기를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삶은 늘 언제나 이런식으로 우연한 이끌림에 의해 재생된다.)
그리고 몇 개의 일기를 읽어내려가면서 난 '삶의 이어져 있음' (이 글의 주제)을 느끼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일기를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면 갈수록 그러한 글들이 나의 지금 모습에 반영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 당시에는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사실들에 대해 지금에서는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꼈다.
09년 4월 27일 http://seonil.egloos.com/9967345
"책 한자를 더 읽고, 단어 하나를 더 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내면의소리는 곧 나의 글로써 표현이 된다.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데 시간을 아끼지 말도록 하자. 글은 어떻게든 써지는 건가보다. 인생이 어떻게든 살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내 인생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로 내 인생을 꽉 꽉 채우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가 나 자신의 모습을 뛰어넘게 만든다. 그저 그런 사이의 사람이 부탁했으면 정중히 거절했을 일들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부탁하면 아무리 어려운 부탁이더라도 모두 들어주고 싶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계속해서 사랑하고 볼일이다. 참 골치아픈 인류애다. 사람을 사랑한다니.. 그래서 다들 보고싶다. 당신들과 함께 숨쉬는게 너무도 행복하다. 나는 타인의 인정과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걸 잊지말자.
09년 4월 26일 http://seonil.egloos.com/9967342
"깨어있다는 생각. 눈이 깨어있고, 귀가 깨어있고, 그리고 내 정신이 깨어있고. 늘 깨어있자. 세상의 기운을 모두 받아들이자. 살아있음을 느끼자."
09년 4월 23일 http://seonil.egloos.com/9967340
가장 최악의 경우는 사람에 대한 흥미를 잃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흥미를 잃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갈 수 있나. 한겨레 신문과 씨네21을 읽으면서 내가 가지는 느낌이다. 그저 나하나만 잘 살자고 살면 안될 것 같은 그런 생각을 심어준다. 내 깊숙이 진보라는게 자리잡았던걸까, 아니면 모든 사람들은 진보로 향하게 되는 것이라서 그러는 걸까.
진보라고 할 수 있나 싶다. 이건 인간애다. 다 같이 잘 살아보자에서 출발하는 그런...
나란 사람 철저히 중간에 서려는 것 같다. 무섭고 잔인한 지성인이 되고 싶기도 하지만 내 모든걸 희생하는 매우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나야. 나는 언제든 변할 수 있으며 내 마음가는 대로 날 완성해가며, 세상의 모든 존재형태(방식)을 한없이 존중한다. 기형도로서의 삶도 멋지고, 할리데이비슨족들의 삶도 멋있고, 운동선수의 삶도 멋있고,. 그래 된장녀와 된장남의 존재 방식까지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 다름의 인정이다. 완전한 인정이다. 세상에 절대기준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 인정은 어디까지나 신념이 존재하는 인간에 한해서다. 자신의 행동과 말과 존재방식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 있을만한 신념. 굳이 설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알고 있어야 된다.
사랑한다. 내 삶과 내 존재를 사랑한다. 그리고 살면 살아갈수록 명확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를 멋지게 만들어 갈 것이다.
09년 4월 11일 http://seonil.egloos.com/9936322
기뻤다. 내가 썼던 글들을 보면서 당시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를 알수있는데 그 생각들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내 글들이 예전의 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때 당시 그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에 놀라버린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글쓰기에 집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글쓰기는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내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것은 한 나라의 일들을 기록하는 역사와도 같다. 이번처럼 예전에 썼던 글들에서 지금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건 대단히 멋진 일이다. 글쓰기의 위력을 실감한다. 내가 쓴글의 가장 큰 수혜자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란 사실을 알았다. 당분간은 일기를 온라인에 옮기는데 좀 더 치중하자. 그걸 통해서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고 있다. 너무도 재미있다. 내가 썼던 글을 통해서 '나'를 찾아가는 느낌이다. 나란 사람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나란 사람은 일정한 범위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지금은 매우 기쁘다. 내가 누군지 알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감이 충전된다. 부드럽게 나가자.
그때 당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하는게 아니다.) 나란 존재를 알아가는 것이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때처럼 나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자. 그 범위는 상상력을 통해 확산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글쓰는 연습을 계속하다보면 어쩌면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세상을 바꿀수 있는 아이디어가 나올지도 모른다.
내가 그동안 기표에 너무 얽매여 있었던 것 같다. 기표는 기의를 모두 표현해낼 수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 머릿속의 생각들(기의)이고, 내게 필요한 것은 그것들을 최대한 모두 끄집어내어서 나에게 허락된 능력을 사용해 표현 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표의 함정에 빠지지 말도록 하자. 나에게 필요한 것은 글씨연습이 아니라 글연습이니까.
사람을 사귀는 방법이 필요한 게 아니라, 진정한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
세상의 핵심은 속뜻에 있다는 것을 지금 이순간부터 잊지 않기로 하자.
그리고 아래의 일기가 3년 전 딱 이 맘 때 내가 쓴 글이다.
난 어젯밤 이 글을 읽고서 내 스스로 갇혀있던 고민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이것이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삶'이 순간순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우주다.
2009년 1월 19일 휴가를 나가서 (3년 전의 내가 쓴 글)
정말 길고 긴 하루였고 꿈을 꾸는 듯한 하루였다.
오늘도 아침 일찍 서둘러서 일어났다. 전날 밤 인터넷으로 영화 '비카인드 리와인드'를 종로의 서울극장에 예매를 해놓았다. 형 집에서 9시정도에 빠져나왔다. 날씨가 꽤 따뜻했다. 종로까지는 지하철 대신 내가 좋아하는 버스를 타고 가기로 생각했다.일단 노량진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노량진에 거의 도착해서 며칠전 노량진에서 임용고시 대비강의를 듣고 있는 친구가 생각났다.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했고 바로 만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내가 가장 많이 의지하고 서로 많은 도움을 주고 가장 즐거운 추억을 함께 만들었던 나의 베스트프렌드! 너무 기뻤다. 거의 2년만에 처음 본것이니. 그 동안엔 그 친구의 연락처가 바뀌어서 연락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친구는 그대로였다. 예전처럼 밝았고 의욕도 넘쳐보였다. 우린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핫초코를 마시면서 그동안의 못다한 이야기들을 초스피드로 나누었다. 그친구나 나나 말이 엄청빠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그 친구와 떨어지게 된 이후로 그렇게 말이 잘 통하고 정신이 없을정도로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는 만나기 힘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약 한시간 동안 온갖 주제를 아우르며 이야기를 나눴다. 한시간이 1분 처럼 느껴졌고, 대화를 하면서 우리 둘 모두는 변하지 않았으면서도 더 성장한 모습에 서로 감탄을 했다. '네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고등학교 그 때의 모습, 여전히 변하지 않고 너로 남아줘서 고마워!' 대화 속에 오갔던 친구와 나의 고민들이 모두 잘 해결되길 바랄뿐이다.
영화 시작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급히 극장으로 갔다. 역시 오랜만에 가보는 종로. 영화 '비카인드 리와인드' 꼭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 영화는 무척 재미있었고 훈훈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어제 책을 사기 위해 학교 앞 서점을 갔지만 결국 고르지 못했다. 어떤 책을 사야 가장 돈이 아깝지 않고 현재 내가 필요로 하는 부분들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라는 생각때문이었다. 어쩌면 나의 완벽주의나 시간적 효율에 대한 강박증이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까. 비카인드 리와인드 영화는 문제를 단방에 해결해 주었다. 완벽할 필요는 없다는 것.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영화가 전해주는 메세지가 정확히 그것은 아니지만 내가 포착한 것은 그것이다. DVD의 날카로운 화질과 고감도의 음질을 비디오테이프는 절대 따라갈 수 없지만 그런 DVD조차도 완벽할 수는 없다. 그 채워지지 못하는 것이 휴머니즘이든 옛것에 대한 따뜻함이든 그리고 새로운 기술에 대한 것이든. 세상은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완벽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은 헛 될수도 있다. 그 영화를 보고서 종로거리로 빠져나왔는데 날씨가 따뜻한 것이다. 겨울인데도. 바로 가방안에 있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내가 보고 있는 영상에 배경음악이 흘렀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완벽한 해답을 찾는다기 보다는 해답에서 좀 비껴나와 인생을 즐기는 태도. 수많은 영화에서 보고 깨달았던 내용이지만 이번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깨달았다. That's why I love movie.
그래서 난 서점으로 갔다. (그래서 난 비디오 대여점에 갔다.) 어제처럼 완벽한 책(완벽한 비디오)만을 찾으려 하지 않을거란 다짐을 했다. 쭉 훑어봤다. 마음이 이끌리는 분야(장르)쪽으로 갔다. 읽고 싶은 책(보고 싶은 비디오)을 집어 들었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카운터에가서 책 값을 (비디오 대여료) 계산했다. 서점(비디오 대여점)을 빠져나왔다. 기분이 좋았다.
어젠 1시간 넘게 서점에 있었는데도 책을 사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바로 고를 수 있었다. 신중한 결정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흠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을 골랐고 그 책에서 인생의 완벽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은 가지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 어찌되었든 한 권의 책은 세상을 담고 있고 말이다. 나중에 내가 직업의 선택에서도 이런 생각이 중요하지 않을까. 너무 완벽한 직장, 연봉도 높고 복리후생도 좋고 일은 어렵지 않고 명예도 가져다주는 직장. 그런 직장을 찾아헤매다가 난 서점에서 처럼 방황만 하다가 서점 밖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취직을 하기 위해선 눈높이를 낮추라고들 말하지만 눈높이를 낮추어선 안된다. 그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꿈을 낮추는 것이나 다름없다. 눈높이를 낮추다기 보다는 완벽함에 대한 환상을 깨야한다는 것이 더 맞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책이라고해서 아카데미시상식의 작품상을 받은 영화라고해서 신이내린직장이라 불리는 몇몇 직장들이라해서 완벽한 것은 아니다. 결국은 나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다. 세상으로부터 칭송받는 좋은작품을 읽어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책 속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돈을 많이주는 기업이라고 해서 나와 맞지않으면 그건 아니다. 결국 이 모든 문제(선택에 관한 문제)의 답은 나 자신으로 통한다. '완벽'은 환상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가는대로 좋아하는대로 즐겁게 가야한다. 영화 한편이 나의 생각을 이렇게 확장시켜줬다.
오랜만에 도심을 걸었다. 종로-청계천- 을지로-시청-남대문시장-서울역까지. 예전에도 한가로운 날이면 자주걸었던 코스다. 길을 걷다보면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이 보인다.종로와 을지로의 높이 솟은 회사의 빌딩들과 세련된 회사원과 청계천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 예술과 들과 남대문시장의 언 손을 녹이는 상인들과 서울역의 노숙자들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삶. 그것을 모두 이해하고 아우르는게 내가 원하는 것이다. 편견없이 모든 세상사람들을 바라보고 싶다.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2009년 1월 19일 군생활 일기, 휴가를 나와서
http://seonil.egloos.com/9901021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 된다.
결국 우리는 인생의 끝에 가서 '더 나은 죽음'을 위해 열심히 달려온 것
2012년 2월 12일
카페 BRCD (Bread is ready coffee is done)에서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생각들
경선이형과 함께 저녁을 먹고 음악이 좋은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이 날 나는 나의 '병영일기'를 스마트폰으로 찾아보게 되었다. '기록'에 대한 이야기 주제가 나와서 나는 내가 정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나의 '군생활 일기' 얘기를 꺼낸 것이다. 그 때 일기를 읽으면 그 때 생각들을 하며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게 이야기의 핵심
이 날 꺼내 본 일기는 내가 군생활 말년에 썼던 글 중 하나였다.
우린 '남은 시간을 살아가는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남은 시간을 더 잘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어떻게 하면 윤택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남은 시간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그럼 현재의 시간은 남은 시간에 대한 희생양에 지나지 않는가. 현재를 위한 현재의 시간을 살아갈 순 없는걸까.
다시 읽어도 공감이 가는 글이다. '미래를 위한 현재'와 '현재를 위한 현재'를 살아가는 문제
우린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잖은가. 그럼 내일이 되면 더 나은 모레를 위해 내일을 살아갈 것이고.
쭉 그래왔다. 중학교 때는 좋은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대학 때는 더 나은 회사 혹은 더 나은 직업을 위해 열심히 그 때 그 시절을 살아왔다. 회사에 들어가서는 승진을 위해 열심히 살 것이고, 더 나은 은퇴 후의 삶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지. 우린 그렇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명목으로 우리의 오늘을 열심히 바치겠지.
그렇다면 생의 최종 목적지는 죽음일테고, 결국 우리는 인생의 끝에 가서 '더 나은 죽음'을 위해 열심히 달려온 것을 만족하려나. 더 나은 죽음? 더 나은 장례식? 죽음 후의 나의 피붙이들이 받게 될 재산?
'현재를 위한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방법을 잃어버린 걸 아닐까.
카페 BRCD (Bread is ready coffee is done)에서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생각들
경선이형과 함께 저녁을 먹고 음악이 좋은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이 날 나는 나의 '병영일기'를 스마트폰으로 찾아보게 되었다. '기록'에 대한 이야기 주제가 나와서 나는 내가 정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나의 '군생활 일기' 얘기를 꺼낸 것이다. 그 때 일기를 읽으면 그 때 생각들을 하며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게 이야기의 핵심
이 날 꺼내 본 일기는 내가 군생활 말년에 썼던 글 중 하나였다.
우린 '남은 시간을 살아가는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남은 시간을 더 잘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어떻게 하면 윤택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남은 시간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그럼 현재의 시간은 남은 시간에 대한 희생양에 지나지 않는가. 현재를 위한 현재의 시간을 살아갈 순 없는걸까.
다시 읽어도 공감이 가는 글이다. '미래를 위한 현재'와 '현재를 위한 현재'를 살아가는 문제
우린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잖은가. 그럼 내일이 되면 더 나은 모레를 위해 내일을 살아갈 것이고.
쭉 그래왔다. 중학교 때는 좋은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대학 때는 더 나은 회사 혹은 더 나은 직업을 위해 열심히 그 때 그 시절을 살아왔다. 회사에 들어가서는 승진을 위해 열심히 살 것이고, 더 나은 은퇴 후의 삶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지. 우린 그렇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명목으로 우리의 오늘을 열심히 바치겠지.
그렇다면 생의 최종 목적지는 죽음일테고, 결국 우리는 인생의 끝에 가서 '더 나은 죽음'을 위해 열심히 달려온 것을 만족하려나. 더 나은 죽음? 더 나은 장례식? 죽음 후의 나의 피붙이들이 받게 될 재산?
'현재를 위한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방법을 잃어버린 걸 아닐까.
A Father’s Prayer 아버지의 기도
A Father’s Prayer 아버지의 기도
by General Douglas MacArthur
Build me a son, O Lord, who will be strong enough To know
when he is weak and brave enough to face himself when he is afraid;
One who will be proud and unbending in honest defeat,And humble, and gentle in victory.
Build me a son whose wishes will not take the place of deeds;
A son who will know Thee – and that to know himself is the foundation stone of knowledge.
저의 자식을 이러한 인간이 되게 하소서.
약할 때 자기를 잘 분별할 수 있는 힘과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을 용기를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Lead him, I pray, not in the path of ease and comfort,
but under the stress and spur of difficulties and challenge.
Here, let him learn to stand up in the storm; here let him learn compassion for those that fail.
Build me a son whose heart will be clear, whose goal will be high, a son who will master himself before he seeks to master other men, one who will reach into the future, yet never forget the past.
그를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곤란과 고통의 길에서 항거할 줄 알게 하시고
폭풍우 속에서도 일어설 줄 알며
패한 자를 불쌍히 여길 줄 알도록 해 주소서.
그의 마음은 깨끗이 하고 목표는 높게 하시고
남을 다스리기 전에 자신을 다스리게 하시며
미래를 지향하는 동시에 과거를 잊지 않게 하소서.
And after all these things are his, add, I pray, enough of a sense of humor,
so that he may always be serious, yet never take himself too seriously.
Give him humility, so that he may always remember the simplicity of true greatness,
the open mind of true wisdom, and the meekness of true strength.
Then I, his father, will dare to whisper, "I have not lived in vain."
그 위에 유머를 알게 하시어 인생을 엄숙히 살아가면서도
삶을 즐길 줄 아는 마음과 자기 자신을 너무 드러내지 않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소서.
그리고 참으로 위대한 것은 소박한 데에 있다는 것과
참된 힘은 너그러움에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그의 아비인 저는 헛된 인생을 살지 않았노라고
나직이 속삭이게 하소서.
----------------------
이런 사람이 되자. 예전부터 많이 접해 온 글이지만,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시기다.
by General Douglas MacArthur
Build me a son, O Lord, who will be strong enough To know
when he is weak and brave enough to face himself when he is afraid;
One who will be proud and unbending in honest defeat,And humble, and gentle in victory.
Build me a son whose wishes will not take the place of deeds;
A son who will know Thee – and that to know himself is the foundation stone of knowledge.
저의 자식을 이러한 인간이 되게 하소서.
약할 때 자기를 잘 분별할 수 있는 힘과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을 용기를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Lead him, I pray, not in the path of ease and comfort,
but under the stress and spur of difficulties and challenge.
Here, let him learn to stand up in the storm; here let him learn compassion for those that fail.
Build me a son whose heart will be clear, whose goal will be high, a son who will master himself before he seeks to master other men, one who will reach into the future, yet never forget the past.
그를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곤란과 고통의 길에서 항거할 줄 알게 하시고
폭풍우 속에서도 일어설 줄 알며
패한 자를 불쌍히 여길 줄 알도록 해 주소서.
그의 마음은 깨끗이 하고 목표는 높게 하시고
남을 다스리기 전에 자신을 다스리게 하시며
미래를 지향하는 동시에 과거를 잊지 않게 하소서.
And after all these things are his, add, I pray, enough of a sense of humor,
so that he may always be serious, yet never take himself too seriously.
Give him humility, so that he may always remember the simplicity of true greatness,
the open mind of true wisdom, and the meekness of true strength.
Then I, his father, will dare to whisper, "I have not lived in vain."
그 위에 유머를 알게 하시어 인생을 엄숙히 살아가면서도
삶을 즐길 줄 아는 마음과 자기 자신을 너무 드러내지 않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소서.
그리고 참으로 위대한 것은 소박한 데에 있다는 것과
참된 힘은 너그러움에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그의 아비인 저는 헛된 인생을 살지 않았노라고
나직이 속삭이게 하소서.
----------------------
이런 사람이 되자. 예전부터 많이 접해 온 글이지만,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시기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하여 2 -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삶의 의미를 찾아서>를 읽고서
<삶과 죽음의 철학> 에세이
의미 있는 삶에 대하여 2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삶의 의미를 찾아서>를 읽고서
김선일
우리들은 언제부턴가 인생의 목표를 행복으로 정해놓은 듯이 살아가고 있다.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도, 좁디 좁은 취업의 문을 통과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모두 많은 돈을 벌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한다. 돈을 많이 벌면 여행도 갈 수 있고,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고, 가족들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다. 그렇다면 돈이 없고 행복하지 않은 인생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프랭클 빅토르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우리의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며 우리인생은 언제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삶에는 진정으로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며, 우리가 죽는 그 순간까지 남아서 죽음 그 자체에도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지는 것이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의 유일무이함을 깨닫고 자신의 삶의 유일무이한 의미를 찾아야 된다고 한다.
나는 한번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다. 우리 인간이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부모님의 밑에서 태어나 길러지고, 언어를 습득하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교육의 단계를 거쳐오면서 자연스레 하나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리매김을 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과정이 즐거웠고 행복했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좋은 머리 덕에 학습에도 소질이 있었고, 주위의 사물에 감탄을 하면서 감동을 받을 줄 알았고, 많은 친구들과 원만하게 어울리면서 잘 지내왔다. 물론 중3과 고3 입시공부를 하는 시기에는 남들처럼 스트레스를 받기는 했지만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힘든 공부를 하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내 존재의 이유에 의문을 품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노력한 정도의 성취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노력해도 안 되는 건가’라는 좌절감을 경험한 적도 없다. 하지만 나의 지금까지의 인생이 평탄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 두 분 모두 몸이 편찮으시다. 아버지께서는 농사일을 하다가 팔을 심하게 다치셨고, 내가 군대에 있을 때는 심장이 심하게 안 좋아져서 큰 수술을 받기도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어릴 때부터 허리가 아프셔서 수술을 받으셨는데도 크게 나아지지 않아서 지금도 고생하고 계시다. 그리고 친가와 외가 쪽 모두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고 많은 어려움들이 일어나 우리 가족에게까지 심적으로 부담을 주었다. 어떻게 보면 그러한 환경이 나로 하여금 삶이 지닌 의미에 궁금증을 품어 볼 여유를 주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하루 빨리 내가 어른이 되어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편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것, 그것이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목표이자 의미가 아닐까 싶다.
프랭클 빅토르는 삶의 의미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 있는 특정한 개인과 관계가 있고 그것은 매우 상대적이라고 말한다. 즉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날마다 다르며 시간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 속에서 삶의 의미는 언제나 변해왔고, 앞으로도 상황에 따라 계속 변하게 될 것이다. 우리 개개인은 모두 유일무이한 의미를 지니고서 인생을 살아가며 유일무이한 상황들이 연속이 바로 인생이라고 말한다. 내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삶의 의미들 또한 내가 결혼을 하고 부양해야 할 부모님이 안 계시는 상황을 맞이한다면 나는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할 것이다. 아직은 내가 어떠한 삶의 의미를 찾게 될지는 모르지만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중심에는 사랑이 놓여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나눈다. 부모님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님을 사랑하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는 그러한 점에서 무척 좋은 책이었다. 결국 우리 인생의 답은 사랑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다. 저자는 ‘우주는 너무 광대해서 낱낱의 인격과 맺는 관계를 초월해 있다. 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 자신의 작은 자아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 삶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고 말한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는 그러한 삶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니어링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서 자신들이 머무를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이웃들과 함께 조용히 살아간다. 그리고 책과 편지를 통해 올바른 세계를 만들기 위한 목소리를 낸다. 그것은 그들이 선택한 삶이다. 세계를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에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다. 혁명으로서 그 길을 이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들처럼 조용히 책을 통해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길만 있는 법은 아니다. 길가에 쓰레기를 줍고, 힘든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세계를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나이를 먹고 죽게 되고 우리의 존재는 사라지게 되지만 우리가 살았던 그 시간은 영원히 남게 된다. 그래서 앞으로 이 세상에 살게 될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 모두는 하나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은 정말 놀랍다. 누군가 쓴 책이 누군가의 삶에 방향을 설정해주고, 또 누군가가 만든 영화는 지구상의 누군가에게 꿈이 되기도 하는 걸 보면 정말 그렇다. 우리 또한 지금 삶과 죽음의 철학이라는 수업에서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의 책을 함께 읽으면서 그들의 삶을 보면서 배우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저자 헬렌 니어링은 책 속에서 말했다.
우리가 수업에서 그들의 책을 접하게 된 것을 보면 그들의 바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의 삶이 계속 이어지고 있고, 앞으로 계속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죽음은 끝이 아니다.
책 속에서 스콧이 죽는 마지막 대목을 읽을 때 마음이 무척 편안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 일리치는 죽음으로 넘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읽는 동안 무척 초조했지만, 스콧의 죽음은 물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느낌으로 편안함을 주었다. 스콧은 자신의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에는 식사를 끊으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을 하나의 경험으로서 받아들인 것이다. 헬렌은 남편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안이 잘 정돈된 문가에 서서 그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저녁을 맞이하는 남자의 면모’ 이 얼마나 편안한 모습인가.
예전에 나의 죽는 순간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는 내가 죽을 때가 되면 어떤 모습으로 죽고 싶을까’를 고민해 본 것이다. 스콧의 죽음을 보면서 다시 한번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내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영화 몇 편이 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이다. 숨이 멎는 순간 영화가 끊기게 될지, 아니면 죽음 뒤의 세상에서 영화를 계속 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죽는 순간까지 영화의 감동을 느끼고 싶다. 바라는 게 있다면 죽는 순간에도 영화의 감동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맑은 정신만큼은 유지 했으면 좋겠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의 스콧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스콧은 삶의 마지막 날을 지내면서 이러한 글을 썼다.
대학생 3학년으로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 나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도 이렇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이러한 마음과 내가 해야 할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경쟁사회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마음과, 지구를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마음.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세상을 좀더 좋게 만드는 것과 같은 방향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언젠가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전세계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의미를 깨우치고,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의미 있는 삶에 대하여 2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삶의 의미를 찾아서>를 읽고서
김선일
우리들은 언제부턴가 인생의 목표를 행복으로 정해놓은 듯이 살아가고 있다.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도, 좁디 좁은 취업의 문을 통과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모두 많은 돈을 벌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한다. 돈을 많이 벌면 여행도 갈 수 있고,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고, 가족들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다. 그렇다면 돈이 없고 행복하지 않은 인생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프랭클 빅토르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우리의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며 우리인생은 언제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삶에는 진정으로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며, 우리가 죽는 그 순간까지 남아서 죽음 그 자체에도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지는 것이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의 유일무이함을 깨닫고 자신의 삶의 유일무이한 의미를 찾아야 된다고 한다.
나는 한번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다. 우리 인간이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부모님의 밑에서 태어나 길러지고, 언어를 습득하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교육의 단계를 거쳐오면서 자연스레 하나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리매김을 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과정이 즐거웠고 행복했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좋은 머리 덕에 학습에도 소질이 있었고, 주위의 사물에 감탄을 하면서 감동을 받을 줄 알았고, 많은 친구들과 원만하게 어울리면서 잘 지내왔다. 물론 중3과 고3 입시공부를 하는 시기에는 남들처럼 스트레스를 받기는 했지만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힘든 공부를 하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내 존재의 이유에 의문을 품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노력한 정도의 성취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노력해도 안 되는 건가’라는 좌절감을 경험한 적도 없다. 하지만 나의 지금까지의 인생이 평탄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 두 분 모두 몸이 편찮으시다. 아버지께서는 농사일을 하다가 팔을 심하게 다치셨고, 내가 군대에 있을 때는 심장이 심하게 안 좋아져서 큰 수술을 받기도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어릴 때부터 허리가 아프셔서 수술을 받으셨는데도 크게 나아지지 않아서 지금도 고생하고 계시다. 그리고 친가와 외가 쪽 모두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고 많은 어려움들이 일어나 우리 가족에게까지 심적으로 부담을 주었다. 어떻게 보면 그러한 환경이 나로 하여금 삶이 지닌 의미에 궁금증을 품어 볼 여유를 주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하루 빨리 내가 어른이 되어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편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것, 그것이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목표이자 의미가 아닐까 싶다.
프랭클 빅토르는 삶의 의미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 있는 특정한 개인과 관계가 있고 그것은 매우 상대적이라고 말한다. 즉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날마다 다르며 시간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 속에서 삶의 의미는 언제나 변해왔고, 앞으로도 상황에 따라 계속 변하게 될 것이다. 우리 개개인은 모두 유일무이한 의미를 지니고서 인생을 살아가며 유일무이한 상황들이 연속이 바로 인생이라고 말한다. 내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삶의 의미들 또한 내가 결혼을 하고 부양해야 할 부모님이 안 계시는 상황을 맞이한다면 나는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할 것이다. 아직은 내가 어떠한 삶의 의미를 찾게 될지는 모르지만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중심에는 사랑이 놓여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나눈다. 부모님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님을 사랑하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는 그러한 점에서 무척 좋은 책이었다. 결국 우리 인생의 답은 사랑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다. 저자는 ‘우주는 너무 광대해서 낱낱의 인격과 맺는 관계를 초월해 있다. 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 자신의 작은 자아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 삶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고 말한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는 그러한 삶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니어링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서 자신들이 머무를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이웃들과 함께 조용히 살아간다. 그리고 책과 편지를 통해 올바른 세계를 만들기 위한 목소리를 낸다. 그것은 그들이 선택한 삶이다. 세계를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에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다. 혁명으로서 그 길을 이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들처럼 조용히 책을 통해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길만 있는 법은 아니다. 길가에 쓰레기를 줍고, 힘든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세계를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나이를 먹고 죽게 되고 우리의 존재는 사라지게 되지만 우리가 살았던 그 시간은 영원히 남게 된다. 그래서 앞으로 이 세상에 살게 될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 모두는 하나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은 정말 놀랍다. 누군가 쓴 책이 누군가의 삶에 방향을 설정해주고, 또 누군가가 만든 영화는 지구상의 누군가에게 꿈이 되기도 하는 걸 보면 정말 그렇다. 우리 또한 지금 삶과 죽음의 철학이라는 수업에서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의 책을 함께 읽으면서 그들의 삶을 보면서 배우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저자 헬렌 니어링은 책 속에서 말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삶의 연속성과 이어짐을 믿었다.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믿는 더 많은 만남과 더 많은 기회를 간절히 바랐다.”
우리가 수업에서 그들의 책을 접하게 된 것을 보면 그들의 바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의 삶이 계속 이어지고 있고, 앞으로 계속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죽음은 끝이 아니다.
책 속에서 스콧이 죽는 마지막 대목을 읽을 때 마음이 무척 편안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 일리치는 죽음으로 넘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읽는 동안 무척 초조했지만, 스콧의 죽음은 물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느낌으로 편안함을 주었다. 스콧은 자신의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에는 식사를 끊으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을 하나의 경험으로서 받아들인 것이다. 헬렌은 남편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안이 잘 정돈된 문가에 서서 그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저녁을 맞이하는 남자의 면모’ 이 얼마나 편안한 모습인가.
예전에 나의 죽는 순간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는 내가 죽을 때가 되면 어떤 모습으로 죽고 싶을까’를 고민해 본 것이다. 스콧의 죽음을 보면서 다시 한번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내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영화 몇 편이 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이다. 숨이 멎는 순간 영화가 끊기게 될지, 아니면 죽음 뒤의 세상에서 영화를 계속 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죽는 순간까지 영화의 감동을 느끼고 싶다. 바라는 게 있다면 죽는 순간에도 영화의 감동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맑은 정신만큼은 유지 했으면 좋겠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의 스콧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스콧은 삶의 마지막 날을 지내면서 이러한 글을 썼다.
“인류가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지구는 어마어마한 생명체를 안고 있는 먼지 알갱이이자, 전체로 하나인 의식체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인류의 역할은 많든 적든 완전히 그르쳐졌습니다. 우리는 공을 놓치고 있어요. 시간을 찔끔찔끔 낭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뭔가 더 가치 있는 일을 다시 만들고 건설할 수 있을까요? 나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창조하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서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것이 삶의 마지막 날에 이르러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입니다. 당신이 믿는 대로 행동하시오. 당신이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친절하도록 해요. 나는 사람들이 몸으로나 정신으로나 그렇게 살도록 돕고 싶은데, 그렇게만 되면 지구는 지난 날보다 더 살기에 좋은 곳이 될 거요”
대학생 3학년으로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 나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도 이렇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이러한 마음과 내가 해야 할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경쟁사회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마음과, 지구를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마음.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세상을 좀더 좋게 만드는 것과 같은 방향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언젠가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전세계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의미를 깨우치고,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시험 기간을 보내며 / 날 변화시키는 것들에 대한 생각
시험 기간을 보내며 / 날 변화시키는 것들에 대한 생각
2011년 4월 20일
어린이 대공원의 벚꽃 / 4월 19일
학교는 시험기간이라서 학생들은 시험공부를 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시험을 적게 치러서 여유가 많이 있다. 오히려 시험 기간인 요즘이 평소 때보다 훨씬 여유롭다. 시험을 안보는 강의들도 대개는 휴강을 하기 때문에 수업도 안들어가고 과제도 없다. 3월 2일 복학한 이후로 가장 여유로운 대학생활의 한 때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 하하. 친구들에게 나의 이러한 상황을 말하니 모두들 너무 부러워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부러워 한만큼 다음 시험 때는 아마 엄청난 공부의 양을 소화해내야 할 것이다.
덕분에 어제와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어린이대공원으로 벚꽃을 구경하고 왔다.
일본에 있는 친구들이 벚꽃을 찍어서 메일로 보내줬기 때문에 나도 사진을 찍어 답장을 보내주고 싶었다. 아직까지 일본 친구들은 사진을 찍어 보내면서 자신들의 근황을 얘기해주고 나의 안부를 물어준다. 그들의 연락은 언제나 나를 부끄러워지게 만든다.
사실, 오늘은 성동구사회복지관을 다녀왔다. 저소득층 자녀 학습지원 및 학습멘토로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었는데 연락이 온 것이다. 가서 신청서를 작성하고, 그 분야를 담당하고 계신 사회복지사님과 몇몇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런 질문을 한가지 하셨다.
왜 지원을 하게 됐고, 이번 경험을 통해 무엇을 얻길 바라는 지.
그 질문을 받고서 나도 나에게 속으로 물어봤다. 왜 지원을 한거고, 무엇을 바라고 하는 걸까.
그 자리에서는 나도 머리속으로 생각을 하면서 말을 했기 때문에 두서없는 내용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1,2학년 때는 이런 걸 생각도 하지 못했던 내가 왜 지금은 이런걸 하려는 거지. 3년의 휴학 기간 동안 무슨 일이 날 행동하게 만들었을까.
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을 하자마자 경제를 배우기 시작하고, 그 안에서 경쟁이라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경제의 사회과학의 틀 안에서 경영학이라는 실용학문을 배우는데, 그것은 자기가 조직의 관리자가 되었을 때 자신의 조직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모든 걸 배우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경영에서 빼놓을 수 키워드는 바로 경쟁이다. 지금 수강하고 있는 전공과목 관리회계, 조직설계론, 환경분석론에서도 경쟁을 빼놓지 않고 얘기한다. 경쟁전략과 경쟁우위의 개념을 계속 반복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영학과의 수업 분위기는 매우 경쟁적일 수 밖에 없다. 모두가 조금 더 자기 PR을 강하게 하려고 노력을 하고, 돋보이는 프레젠테이션을 하기 위해 궁리를 하고, 좀 더 효율적인 시스템을 생각해내는 연습을 한다. 그게 나의 복학 전의 대학생활이었던 것 같다.
군복무 2년과 일본생활 1년이 없었다면 나의 마인드는 같은 길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군복무를 하는 동안 정말 다양한 선후임들, 상관들을 만나면서 나는 다른 세계를 경험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치열하게 경쟁을 살아가며 살아가는 줄로 생각을 했으니 정말 좁은 시야와 세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 가서는 더욱 더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나에게 사랑을 주었다. 대학교를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앞으로는 중고등학교 때와 같은 친구들을 사귀기는 힘들 것이라고, 형식적인 인간관계가 많아질 것이라고. 실제로도 나는 그랬던 것 같다. 저 사람은 나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난 전 사람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며 사람을 만나곤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정말 진심을 주고받는 따뜻한 관계였다. 내가 만난 친구들이 워낙 좋은 사람들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서로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는 그런 관계 속에서 난 진심으로 행복을 느꼈다. 서로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지지해주면서 우리는 날마다 웃었다.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는 친구의 꿈도, 디즈니랜드의 댄서가 되고 싶다는 친구의 꿈도, 유엔에 들어가서 세계를 더 좋게 만들고 싶다는 친구의 꿈을 모두 공유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의 소중함을 알았다.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귀국하는 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준 저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사람 사이의 사랑에 국경 같은 건 정말 아무런 장벽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같은 국경 안에 사는 우리들은 서로를 미워하기도 하고, 어느 한 사람을 끝없이 끌어내리기도 한다. 조금 더 서로를 존중하고 위하며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모두가 조금 더 서로를 배려해주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면서 살아간다면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워킹홀리데이 기간 동안 많이도 돌아다니고 일본 이곳 저곳을 여행 했던 것도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결국은 사랑을 배우고 돌아왔다. 그게 가장 값진 경험이었다.
이게 내가 생각한 ‘왜 자원봉사에 지원을 하고 무엇을 얻길 바라는가’에 대한 답변인 것 같다. 얻길 바라는 게 있다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데 도움을 줬다는 보람이다.
오늘은 우체국에 들러 마스미에게 편지를 부쳤다. 벚꽃 사진을 함께 보내주고 싶었는데 급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에 편지만 먼저 보냈다. 벚꽃 사진은 인화하면 보내야겠다.
그리고 어제는 내가 일했던 시부야 매장에 전화를 했다. 어제가 시부야점의 4주년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점장님 이시켄상과 도쿄지역 매니저 보브상이 전화를 받고 무척 기뻐해줬다. 매장에 직접 가서 축하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니 일본은 지금 위험하니까 오지 말라고 하셨다. 나중에 꼭 놀러 가겠다고 말씀 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참 그리고, 오늘 집에서 부모님께서 서울에 올라오셨었다. 아버지의 병원 진료 때문에 올라오는 길에 내가 고시원에서 먹을 반찬을 많이 싸오셨다. 장조림, 파김치, 멸치볶음 등 모두 맛있어 보였다. 어머니께 자원봉사에 대해 말씀 드리니 3학년이니까 공부에 부담이 안되게끔 잘 해보라고 하신다. 부모님께서는 항상 아침은 꼭 먹으라고 당부하시고 내려가셨다.
역시 아직까지 철이 없는 아들이라 부모님께 직접 감사하다는 말은 못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잘 내려가셨어요? 오늘 먼 서울까지 반찬이랑 필요한 것들 갖다 주셔서 고마워요. 맛있는 반찬들과 밥 맛있게 먹을게요. 언제나 형과 저를 위해 애써주셔서 정말 감사 드려요. 저도 공부 열심히 할게요! 일교차가 심하니 감기 조심하시고 언제나 건강히 지내세요 ^^ 사랑해요.’
2011년 4월 20일
어린이 대공원의 벚꽃 / 4월 19일
학교는 시험기간이라서 학생들은 시험공부를 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시험을 적게 치러서 여유가 많이 있다. 오히려 시험 기간인 요즘이 평소 때보다 훨씬 여유롭다. 시험을 안보는 강의들도 대개는 휴강을 하기 때문에 수업도 안들어가고 과제도 없다. 3월 2일 복학한 이후로 가장 여유로운 대학생활의 한 때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 하하. 친구들에게 나의 이러한 상황을 말하니 모두들 너무 부러워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부러워 한만큼 다음 시험 때는 아마 엄청난 공부의 양을 소화해내야 할 것이다.
덕분에 어제와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어린이대공원으로 벚꽃을 구경하고 왔다.
일본에 있는 친구들이 벚꽃을 찍어서 메일로 보내줬기 때문에 나도 사진을 찍어 답장을 보내주고 싶었다. 아직까지 일본 친구들은 사진을 찍어 보내면서 자신들의 근황을 얘기해주고 나의 안부를 물어준다. 그들의 연락은 언제나 나를 부끄러워지게 만든다.
사실, 오늘은 성동구사회복지관을 다녀왔다. 저소득층 자녀 학습지원 및 학습멘토로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었는데 연락이 온 것이다. 가서 신청서를 작성하고, 그 분야를 담당하고 계신 사회복지사님과 몇몇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런 질문을 한가지 하셨다.
왜 지원을 하게 됐고, 이번 경험을 통해 무엇을 얻길 바라는 지.
그 질문을 받고서 나도 나에게 속으로 물어봤다. 왜 지원을 한거고, 무엇을 바라고 하는 걸까.
그 자리에서는 나도 머리속으로 생각을 하면서 말을 했기 때문에 두서없는 내용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1,2학년 때는 이런 걸 생각도 하지 못했던 내가 왜 지금은 이런걸 하려는 거지. 3년의 휴학 기간 동안 무슨 일이 날 행동하게 만들었을까.
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을 하자마자 경제를 배우기 시작하고, 그 안에서 경쟁이라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경제의 사회과학의 틀 안에서 경영학이라는 실용학문을 배우는데, 그것은 자기가 조직의 관리자가 되었을 때 자신의 조직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모든 걸 배우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경영에서 빼놓을 수 키워드는 바로 경쟁이다. 지금 수강하고 있는 전공과목 관리회계, 조직설계론, 환경분석론에서도 경쟁을 빼놓지 않고 얘기한다. 경쟁전략과 경쟁우위의 개념을 계속 반복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영학과의 수업 분위기는 매우 경쟁적일 수 밖에 없다. 모두가 조금 더 자기 PR을 강하게 하려고 노력을 하고, 돋보이는 프레젠테이션을 하기 위해 궁리를 하고, 좀 더 효율적인 시스템을 생각해내는 연습을 한다. 그게 나의 복학 전의 대학생활이었던 것 같다.
군복무 2년과 일본생활 1년이 없었다면 나의 마인드는 같은 길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군복무를 하는 동안 정말 다양한 선후임들, 상관들을 만나면서 나는 다른 세계를 경험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치열하게 경쟁을 살아가며 살아가는 줄로 생각을 했으니 정말 좁은 시야와 세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 가서는 더욱 더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나에게 사랑을 주었다. 대학교를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앞으로는 중고등학교 때와 같은 친구들을 사귀기는 힘들 것이라고, 형식적인 인간관계가 많아질 것이라고. 실제로도 나는 그랬던 것 같다. 저 사람은 나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난 전 사람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며 사람을 만나곤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정말 진심을 주고받는 따뜻한 관계였다. 내가 만난 친구들이 워낙 좋은 사람들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서로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는 그런 관계 속에서 난 진심으로 행복을 느꼈다. 서로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지지해주면서 우리는 날마다 웃었다.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는 친구의 꿈도, 디즈니랜드의 댄서가 되고 싶다는 친구의 꿈도, 유엔에 들어가서 세계를 더 좋게 만들고 싶다는 친구의 꿈을 모두 공유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의 소중함을 알았다.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귀국하는 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준 저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사람 사이의 사랑에 국경 같은 건 정말 아무런 장벽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같은 국경 안에 사는 우리들은 서로를 미워하기도 하고, 어느 한 사람을 끝없이 끌어내리기도 한다. 조금 더 서로를 존중하고 위하며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모두가 조금 더 서로를 배려해주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면서 살아간다면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워킹홀리데이 기간 동안 많이도 돌아다니고 일본 이곳 저곳을 여행 했던 것도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결국은 사랑을 배우고 돌아왔다. 그게 가장 값진 경험이었다.
이게 내가 생각한 ‘왜 자원봉사에 지원을 하고 무엇을 얻길 바라는가’에 대한 답변인 것 같다. 얻길 바라는 게 있다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데 도움을 줬다는 보람이다.
오늘은 우체국에 들러 마스미에게 편지를 부쳤다. 벚꽃 사진을 함께 보내주고 싶었는데 급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에 편지만 먼저 보냈다. 벚꽃 사진은 인화하면 보내야겠다.
그리고 어제는 내가 일했던 시부야 매장에 전화를 했다. 어제가 시부야점의 4주년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점장님 이시켄상과 도쿄지역 매니저 보브상이 전화를 받고 무척 기뻐해줬다. 매장에 직접 가서 축하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니 일본은 지금 위험하니까 오지 말라고 하셨다. 나중에 꼭 놀러 가겠다고 말씀 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참 그리고, 오늘 집에서 부모님께서 서울에 올라오셨었다. 아버지의 병원 진료 때문에 올라오는 길에 내가 고시원에서 먹을 반찬을 많이 싸오셨다. 장조림, 파김치, 멸치볶음 등 모두 맛있어 보였다. 어머니께 자원봉사에 대해 말씀 드리니 3학년이니까 공부에 부담이 안되게끔 잘 해보라고 하신다. 부모님께서는 항상 아침은 꼭 먹으라고 당부하시고 내려가셨다.
역시 아직까지 철이 없는 아들이라 부모님께 직접 감사하다는 말은 못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잘 내려가셨어요? 오늘 먼 서울까지 반찬이랑 필요한 것들 갖다 주셔서 고마워요. 맛있는 반찬들과 밥 맛있게 먹을게요. 언제나 형과 저를 위해 애써주셔서 정말 감사 드려요. 저도 공부 열심히 할게요! 일교차가 심하니 감기 조심하시고 언제나 건강히 지내세요 ^^ 사랑해요.’
알 것 같으면서도 전혀 모를 것 같은
1시를 넘은 시각 , 도서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다.
다들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나 또한 이웃 나라의 지진에 대한 뉴스를 수시로 지켜보는 한편, 이번 주 레포트를 쓰고 있다. 레포트 주제는 '한국 기업의 경쟁력은 무엇이 문제고, 경쟁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다. 나라는 사람은 아픔의 나눔에 대해 생각을 하면서 경쟁에 대한 문제를 논하고 있다니,,, 참,,, 이상과 현실에 대한 괴리만 있는게 아니다. 현실과 현실의 괴리도 있다.
내가 이 레포트를 쓰면 지구의 아픔이 조금은 덜하려나.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잘 써볼텐데. 그런데 아무리,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나 자신을 위해 쓰는 걸로 밖에 안보여.. 이 시간까지 레포트를 쓰는 이유는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한 것 말고 뭐가 있겠는가...
우리 살아가는 세상은 이렇게나 넓은건가. 지구는 그렇게도 넓은건가.
분명 며칠 전에 한 다큐멘터리를 보고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이 땅 위의 모든 청춘을 응원한다는 글을 올렸는데, 지금은 조금만 응원하고 싶다. 지금 열심히 공부하는 청춘들은 조금만 잘 살아도 좋으니 세상 사람 모두가 아프지 않고 다 잘 살았으면 한다.
알 것 같으면서도 전혀 모를 것 같은
청춘, 공부, 인생, 사람, 자연, 지구, 사랑 그리고 삶과 죽음../
2011년 3월 13일 일요일, 자정이 넘은 도서관에서
다들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나 또한 이웃 나라의 지진에 대한 뉴스를 수시로 지켜보는 한편, 이번 주 레포트를 쓰고 있다. 레포트 주제는 '한국 기업의 경쟁력은 무엇이 문제고, 경쟁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다. 나라는 사람은 아픔의 나눔에 대해 생각을 하면서 경쟁에 대한 문제를 논하고 있다니,,, 참,,, 이상과 현실에 대한 괴리만 있는게 아니다. 현실과 현실의 괴리도 있다.
내가 이 레포트를 쓰면 지구의 아픔이 조금은 덜하려나.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잘 써볼텐데. 그런데 아무리,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나 자신을 위해 쓰는 걸로 밖에 안보여.. 이 시간까지 레포트를 쓰는 이유는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한 것 말고 뭐가 있겠는가...
우리 살아가는 세상은 이렇게나 넓은건가. 지구는 그렇게도 넓은건가.
분명 며칠 전에 한 다큐멘터리를 보고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이 땅 위의 모든 청춘을 응원한다는 글을 올렸는데, 지금은 조금만 응원하고 싶다. 지금 열심히 공부하는 청춘들은 조금만 잘 살아도 좋으니 세상 사람 모두가 아프지 않고 다 잘 살았으면 한다.
알 것 같으면서도 전혀 모를 것 같은
청춘, 공부, 인생, 사람, 자연, 지구, 사랑 그리고 삶과 죽음../
2011년 3월 13일 일요일, 자정이 넘은 도서관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더 이상 하지 않을지, 더 치열하게 싸움을 할 건지
2010년 3월 8일
복학 후 일주일
복학하고 나서 일주일이 흘렀다. 생활 리듬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다.
그 사이 운이 좋게도 압구정의 일본식 술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일주일에 세번씩 일을 하며 용돈도 벌 수 있게 됐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학교에서 뽑는 일본 대학의 교환학생에도 지원해 보았다.
정말 교환학생을 갈 것인지 안 갈 것인지는 결과를 보고나서 정해 볼 마음이었다.
여전히 마음은 많이 복잡하고 초조하다. 환경은 사람을 바꾸기 때문이다.
1학년 때 보였던 싱그러운 캠퍼스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함께 어울려 다녔던 선배들은 모두 취직을 해서 직장을 다니고 있고,
여자 동기들도 몇몇은 벌써 직장을 다니고 있다보니,
남겨진 남자 복학생들은 취직에 관한 화제만 입에 올린다.
만나는 동기생마다 물어보는 말이 '진로는 정했냐' '스펙은 많이 쌓았냐' 등의 얘기들이다.
영어로 진행되는 원어강의에 들어가서 수업을 듣고 있는데 나를 빼곤 모두 다 영어를 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본에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것을 매우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하고 혼자 해낸걸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처음으로 회의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내가 일본이 아니라 영어권 국가에서 1년을 보내고 왔으면 어땠을까. 이 수업에서도 자신감있게 애기할텐데...'
여자 동기는 나보고 '일본어를 공부하더라도 영어는 기본으로 깔아놓고 해야된다며' 영어 공부에 대한 압박을 더 준다.
하루는 일본인 친구를 사귀어서 일본어 회화의 감을 잊지 않고 싶어서 일본에서 온 교환학생과 연락하기 위해 학교의 국제교류팀에 찾아가 봤지만,
이번 학기에 학교를 다니는 일본인은 2명 뿐이라고 한다. 지난 학기에는 7명이었는데 이번 학기는 교환학생이 적게 왔단다.
그리고 그 두명에게 모두 한국인 '버디(도우미)'가 있다고.. 아,, 아쉽네...
오늘 아침 등교를 할 때였다.
어제의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었다.
늦게 일어난 탓에 서둘러서 짐을 싸고 학교 도서관으로 빨리 걸어가고 있는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앞으로는 늦잠을 자면 안돼. 이건 나와의 싸움이야.'
평소 때라면 그런 생각을 하고나서 마음에 자극이 되고 열의가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의문이 들었다.
'나와의 싸움이라고?'
'난 왜 맨날 나와 싸우려고 하지?
그러고 보니 항상 그랬어. 시간과의 싸움이다, 잠과의 싸움이다, 열등감과의 싸움이다 뭐다 맨날 맨날 싸움만 하고 있어.
왜 맨날 싸우려고만 하고 있는거지.
좋아. 싸움만 하고 있다고 치자. 그래서 싸움을 해서 이기고는 있나?
시간을 이겨서 뭐하고, 나를 이겨서 뭐가 좋았던 게 있었나?
아~ 오늘은 이겨서 좋았어~ 라고 느꼈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내일이면 또 시작될 싸움이고, 30대가 되어도, 40대가 되어도 나를 둘러싼 것들과의 싸움은 끊이지 않을텐데,
결국 난 죽을 때까지 싸움만 하다가 살아가게 되는거 아냐?
그럼 난 죽기 전에 생각하겠지. 열심히 싸워 온 인생이었어. 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냐. 싸우려고 태어난것도 아니고, 싸움만 하다가 죽기는 싫어. 상대방과는 자그만한 마찰도 일으키지 않으려고 조심하게 행동하고 신중하게 말하는 나인데 왜 유독 나 자신에게는 그렇게 관대하지도 않고 맨날 이기려고만 하고 있는건지.
나 완전 싸움꾼아냐??'
그런 생각을 하고나서 바쁘게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앉아 천천히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생각의 결론은 일단 유보다. 앞으로는 자신과의 싸움을 더 이상 하지 않을지, 더 치열하게 싸움을 할 건지.
일단은 이번 주에 제출 할 과제가 3개 있는데 그걸 먼저 써야겠다.
복학 후 일주일
복학하고 나서 일주일이 흘렀다. 생활 리듬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다.
그 사이 운이 좋게도 압구정의 일본식 술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일주일에 세번씩 일을 하며 용돈도 벌 수 있게 됐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학교에서 뽑는 일본 대학의 교환학생에도 지원해 보았다.
정말 교환학생을 갈 것인지 안 갈 것인지는 결과를 보고나서 정해 볼 마음이었다.
여전히 마음은 많이 복잡하고 초조하다. 환경은 사람을 바꾸기 때문이다.
1학년 때 보였던 싱그러운 캠퍼스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함께 어울려 다녔던 선배들은 모두 취직을 해서 직장을 다니고 있고,
여자 동기들도 몇몇은 벌써 직장을 다니고 있다보니,
남겨진 남자 복학생들은 취직에 관한 화제만 입에 올린다.
만나는 동기생마다 물어보는 말이 '진로는 정했냐' '스펙은 많이 쌓았냐' 등의 얘기들이다.
영어로 진행되는 원어강의에 들어가서 수업을 듣고 있는데 나를 빼곤 모두 다 영어를 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본에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것을 매우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하고 혼자 해낸걸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처음으로 회의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내가 일본이 아니라 영어권 국가에서 1년을 보내고 왔으면 어땠을까. 이 수업에서도 자신감있게 애기할텐데...'
여자 동기는 나보고 '일본어를 공부하더라도 영어는 기본으로 깔아놓고 해야된다며' 영어 공부에 대한 압박을 더 준다.
하루는 일본인 친구를 사귀어서 일본어 회화의 감을 잊지 않고 싶어서 일본에서 온 교환학생과 연락하기 위해 학교의 국제교류팀에 찾아가 봤지만,
이번 학기에 학교를 다니는 일본인은 2명 뿐이라고 한다. 지난 학기에는 7명이었는데 이번 학기는 교환학생이 적게 왔단다.
그리고 그 두명에게 모두 한국인 '버디(도우미)'가 있다고.. 아,, 아쉽네...
오늘 아침 등교를 할 때였다.
어제의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었다.
늦게 일어난 탓에 서둘러서 짐을 싸고 학교 도서관으로 빨리 걸어가고 있는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앞으로는 늦잠을 자면 안돼. 이건 나와의 싸움이야.'
평소 때라면 그런 생각을 하고나서 마음에 자극이 되고 열의가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의문이 들었다.
'나와의 싸움이라고?'
'난 왜 맨날 나와 싸우려고 하지?
그러고 보니 항상 그랬어. 시간과의 싸움이다, 잠과의 싸움이다, 열등감과의 싸움이다 뭐다 맨날 맨날 싸움만 하고 있어.
왜 맨날 싸우려고만 하고 있는거지.
좋아. 싸움만 하고 있다고 치자. 그래서 싸움을 해서 이기고는 있나?
시간을 이겨서 뭐하고, 나를 이겨서 뭐가 좋았던 게 있었나?
아~ 오늘은 이겨서 좋았어~ 라고 느꼈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내일이면 또 시작될 싸움이고, 30대가 되어도, 40대가 되어도 나를 둘러싼 것들과의 싸움은 끊이지 않을텐데,
결국 난 죽을 때까지 싸움만 하다가 살아가게 되는거 아냐?
그럼 난 죽기 전에 생각하겠지. 열심히 싸워 온 인생이었어. 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냐. 싸우려고 태어난것도 아니고, 싸움만 하다가 죽기는 싫어. 상대방과는 자그만한 마찰도 일으키지 않으려고 조심하게 행동하고 신중하게 말하는 나인데 왜 유독 나 자신에게는 그렇게 관대하지도 않고 맨날 이기려고만 하고 있는건지.
나 완전 싸움꾼아냐??'
그런 생각을 하고나서 바쁘게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앉아 천천히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생각의 결론은 일단 유보다. 앞으로는 자신과의 싸움을 더 이상 하지 않을지, 더 치열하게 싸움을 할 건지.
일단은 이번 주에 제출 할 과제가 3개 있는데 그걸 먼저 써야겠다.
2010년 12월 17일에 서있는 내가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보내는 글
2010년 12월 17일 일기
내가 지금까지 이루어 온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은 이 시간 이후로 집어치우도록 한다. 남들은 공부 외에도 운동도 잘하고, 남달리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는데ㅡ 난 그 동안 바보처럼 공부만 해온걸까.와 같은 생각들.
내가 살아온 22년의 시간은 절대 헛되게 살아온 것이 아니다.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 밖에 한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내가 투자하고 노력을 해온 것들이다.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노력해 온 순간들은 여전히 내 몸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그것을 헛되게 보내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살아온 고귀한 시간들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다. 과거의 시간에 대한 후회들은, 만약 시간이라는 것이 여러개의 표면으로 되어있다고 한다면,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중학교, 고등학교의 내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내가 학창시절 공부를 했던 것들이 대한민국이라는 특수한 사회의 부속체로서 맹목적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혹은 주위의 기대때문에 어쩔 수 없이 노력했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 순간 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게 맹목적인 경쟁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나로서는 살아가는 방법이었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던 순간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다. 그러니까 과거의 나를 부정하려 하는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기로 한다.
히로가 열심히 야구공을 던지면서 노력을 하는 것과 히데오가 열심히 배트를 휘두르면서 노력을 하는 것과, 그리고 세이지군이 열심히 바이올린을 만들고 시즈쿠가 밤 늦게도록 글을 써내려갔던 그런 노력들과 내가 열심히 공부했던 노력은 일맥상통한다. 어느 하나 고귀하지 않은 노력은 없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좋은 환경을 만나기도 하고, 운이 좋게 더 빨리 성공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충분히 부러워 해도 된다. 하지만 부러워하는 대신, 나 또한 내가 살아온 삶의 시간들에 대해 부끄러워하면 안되는 것이다. 부끄러워하는 것은 내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내가 노력을 했을 때는 나에게 꿈이 있었기 때문에 노력을 했던 것이고, 그런 노력을 부끄러워 하는 것은 내 꿈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힘들게 수험공부를 해왔고 노력을 해왔다. 사람은 서로가 너무도 달라서 그 결과물에는 차이를 보일지 언정, 노력을 하는 순간의 고귀함은 세상의 모든 고귀함과 가치를 동일시 한다. 나 자신을 믿고서 지금까지 노력해온 나 자신과, 또한 지금도 과거의 시간 속에서 노력하고 있을 나를 비롯해 다른시간들을 살아가고 있는 나를 위해서라도 지금 이순간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시간만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여러 시간들 속에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여러시간들 속에 존재하는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 지지 않기 위해 현재의 시간에 충실해야 한다.
2010년 12월 17일의 시간 속에 서있는 나 자신의 모습은, 과거의 자신들에게는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미래의 나 자신에겐 더욱 밝은 길을 열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위치, 곧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다. 현재라는 시간은 나라는 사람이 꿈꾸어 온 이상을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것만으로도 매우 부족한 시간이다.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서, 그때 그시절 열심히 살아줘서 고마워란 메세지를 전하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우리는 (모든게 연결되어 있는) 이 우주 속에서의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 과거의 노력들이 지금 하나도 헛되이 쓰이지 않는 것처럼, 지금의 노력 또한 미래에는 더욱 귀중하게 쓰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생각이 가는대로, 나를 둘러싼 우주가 미소지을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가기로 한다.
2010년 12월 17일에 서있는 내가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보내는 글이자 오늘의 일기//
무심코 지나쳐버린 나의 일상의 조각들을 세심히 돌아보자
모처럼의 휴일 / 일상을 돌아보기
http://ksi8084.blog.me/40108199726
2010년 6월 8일 모처럼의 휴일 / 일상을 돌아보기
내일은 모처럼만의 쉬는 날인데 비가 온다고 한다. 10일만의 휴일인데, 비가오다니 야속하다. 빨래도 못하고, 이불도 못널고, 외출도 어렵다. 휴일에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 집에서 명상이나 하면서 일본 생활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도대체 비오는 휴일엔 뭘 해야 휴일을 잘보냈다고 소문이 날까.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가서 공부나 할까. 반찬이나 만들까. 죽은 듯 오랫동안 잠이나 잘까. 아니면 또 파전을 해먹을까.
오늘은 비가 내려서 그런지 콜드스톤에도 사람이 적었다. 덕분에 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젠 많이 익숙해져서 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한다. 다행이다, 익숙해져서. 익숙해져서 그런지 이젠 편안하다. 처음 거대한 시부야 역에 와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쩔쩔매는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역의 개찰구를 빠져나와 눈감고 가게를 찾아올 정도다. 시부야 교차로의 엄청난 인파에 더 이상 놀라지도 않는다. 이렇게 시부야와 긴자가 일상으로 다가온 것이다.
어렸을 적 처음 63빌딩을 봤을 때도 엄청 감탄했었다. 하지만 대학교에 올라가서 매일 보면서 지나치는 63빌딩은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63빌딩은 늘 그 자리에 계속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시부야의 엄청난 인파도 오늘이 지나고 또 내일이 와도 분명히 엄청난 인파가 몰릴테고, 긴자의 화려함도 내일도 오늘과 다름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상이 되어간다. 서울 사람들은 서울에 살기 때문에 남산타워에 올라가지 않는다. 앞으로도 올라갈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고,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뉴스에 내일부로 남산타워를 철거한다는 소식이 나온다면 지금까지 한번도 안가본 사람들이 분명 대거 몰릴 것이다. 그래도 남산타워는 살면서 한번 정도는 올라가봐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서울의 남대문을 한번도 제대로 구경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남대문의 전소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남대문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나중에 복원된다고 하더라도 이전의 남대문과 새로운 남대문은 다르다.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게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그런 격언을 접할 때마다 다시 한번 하루를 돌아본다. 하지만 그런 마음 속의 다짐들도 하루하루가 지나면 다시 약해지고 만다. 내가 계속 살아가는 한 또 그런 격언들을 자주 접하게 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철저한 믿음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도쿄 생활을 일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내가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무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얻는 것은 편안함이다. 하루를 주기로 바쁘게 돌아가는 도쿄의 시계에 몸과 마음이 맞춰지면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잃는 것은 편안함에 가려진 일상의 소중함이다. 늘 지나치는 케이크 가게의 누군가의 땀방울로 만들어진 케이크가 단지 화페의 교환가치로 밖에 안보이는 것 처럼.
그래서 내일 휴일은 일상을 돌아보자. 내가 그 동안 무심코 지나쳐버린 나의 일상의 조각들을 세심히 돌아보자. 분명히 어딘가에서 나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을 일상이 존재할 것이다.
http://ksi8084.blog.me/40108199726
2010년 6월 8일 모처럼의 휴일 / 일상을 돌아보기
내일은 모처럼만의 쉬는 날인데 비가 온다고 한다. 10일만의 휴일인데, 비가오다니 야속하다. 빨래도 못하고, 이불도 못널고, 외출도 어렵다. 휴일에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 집에서 명상이나 하면서 일본 생활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도대체 비오는 휴일엔 뭘 해야 휴일을 잘보냈다고 소문이 날까.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가서 공부나 할까. 반찬이나 만들까. 죽은 듯 오랫동안 잠이나 잘까. 아니면 또 파전을 해먹을까.
오늘은 비가 내려서 그런지 콜드스톤에도 사람이 적었다. 덕분에 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젠 많이 익숙해져서 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한다. 다행이다, 익숙해져서. 익숙해져서 그런지 이젠 편안하다. 처음 거대한 시부야 역에 와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쩔쩔매는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역의 개찰구를 빠져나와 눈감고 가게를 찾아올 정도다. 시부야 교차로의 엄청난 인파에 더 이상 놀라지도 않는다. 이렇게 시부야와 긴자가 일상으로 다가온 것이다.
어렸을 적 처음 63빌딩을 봤을 때도 엄청 감탄했었다. 하지만 대학교에 올라가서 매일 보면서 지나치는 63빌딩은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63빌딩은 늘 그 자리에 계속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시부야의 엄청난 인파도 오늘이 지나고 또 내일이 와도 분명히 엄청난 인파가 몰릴테고, 긴자의 화려함도 내일도 오늘과 다름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상이 되어간다. 서울 사람들은 서울에 살기 때문에 남산타워에 올라가지 않는다. 앞으로도 올라갈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고,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뉴스에 내일부로 남산타워를 철거한다는 소식이 나온다면 지금까지 한번도 안가본 사람들이 분명 대거 몰릴 것이다. 그래도 남산타워는 살면서 한번 정도는 올라가봐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서울의 남대문을 한번도 제대로 구경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남대문의 전소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남대문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나중에 복원된다고 하더라도 이전의 남대문과 새로운 남대문은 다르다.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게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그런 격언을 접할 때마다 다시 한번 하루를 돌아본다. 하지만 그런 마음 속의 다짐들도 하루하루가 지나면 다시 약해지고 만다. 내가 계속 살아가는 한 또 그런 격언들을 자주 접하게 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철저한 믿음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도쿄 생활을 일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내가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무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얻는 것은 편안함이다. 하루를 주기로 바쁘게 돌아가는 도쿄의 시계에 몸과 마음이 맞춰지면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잃는 것은 편안함에 가려진 일상의 소중함이다. 늘 지나치는 케이크 가게의 누군가의 땀방울로 만들어진 케이크가 단지 화페의 교환가치로 밖에 안보이는 것 처럼.
그래서 내일 휴일은 일상을 돌아보자. 내가 그 동안 무심코 지나쳐버린 나의 일상의 조각들을 세심히 돌아보자. 분명히 어딘가에서 나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을 일상이 존재할 것이다.
저 거리 위의 수많은 사람들은 행복할까, 이케부쿠로에서
콜드스톤 이야기 - 이케부쿠로 지원 / 도쿄의 모습
http://ksi8084.blog.me/40107893924
2010년 6월 3일
콜드스톤 이야기 - 이케부쿠로 지원 / 도쿄의 모습
내가 일하는 콜드스톤 매장은 시부야점이다. 일본 전체에 37여 점포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한국이 짧은 기간 내에 이곳 저곳 콜드스톤이 무척 많이 생기고 있는 것에 비하면 무척 매장이 적은 편이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에도 콜드스톤이 있다고 말해주면 깜짝 놀라한다. 게다가 일본보다 매장 숫자가 더 많다고 하면 더 놀라워한다.
어제는 이케부쿠로 매장으로 지원을(Help) 나갔다. 이케부쿠로 콜드스톤은 선샤인시티(일본에서 세번째로 높은 빌딩) 지하에 위치해 있다. 모든 매장에 많은 크루가 근무하고 있지만 매장에서 크루가 쉬는 날이 겹치는 경우 다른 매장의 크루가 지원을 나간다. 시부야점의 점장님이 이케부쿠로에 지원을 나가보는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아직 일한지 3주 밖에 안됐는데 괜찮겠냐고 했더니, 어차피 일은 똑같으니까 문제 없을 거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건대 매장에서 일할 때 압구정점이랑, 분당점으로 지원을 나간 적이 있다. 한국의 콜드스톤 매장도 매장마다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데, 일본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걸 느꼈다. 매장을 주로 찾는 손님의 연령대가 모두 다를 뿐더러, 무엇보다 매장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크루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케부쿠로점은 시부야점에 비해서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시부야점보다 크게 붐비지 않기 때문에 크루들도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일하는 것 같다. 시부야점은 사람이 워낙 많아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그래서 일을 마치고 나면 정말 대사를 치른 것 같은 느낌을 매일 받는다. 이케부쿠로 매장은 9시에 문을 닫아서 마감 업무도 훨씬 느긋했다. 시부야 점은 그날 그날 바쁜 정도에 따라 10시~10시반까 영업을 하고 청소를 하고 나면 11시반 정도가 된다.
애초에 일본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먼저 아르바이트를 지원한 곳이 콜드스톤 이케부쿠로점 이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전화를 받았던 크루가 매장 쪽에서 연락을 줄테니 핸드폰 번호를 알려달라고 해서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핸드폰을 개통하고 난 뒤에 지원한 곳이 지금 일하고 있는 시부야점이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 시부야점도 매우 좋지만, 이케부쿠로가 집에서 전차로 6분 거리여서 매우 가깝다는 것은 조금 아쉽다.
도쿄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도 본인들이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명동, 강남, 압구정, 청담, 홍대, 신촌, 종로 등등 자신들이 주로 가는 곳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보기엔 서울도 각 상권마다 분위기와 느낌이 다르지만 도쿄는 그 차이가 훨씬 심하다. 신주쿠, 긴자, 에비스, 롯본기, 우에노, 오다이바,하라주쿠 등등 도쿄의 거의 모든 지역이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나도 아직까지 안가본 곳이 많지만 어디든 갈 때마다 전혀 다른 곳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신주쿠, 시부야, 이케부쿠로는 도쿄 최대의 번화가들이지만 그 사이에서도 차이가 존재한다. 느낌이 다르다. 내 룸메이트 이나다군은 하라주쿠를 좋아한다. 나는 이케부쿠로가 좋다. 시부야와 신주쿠는 벅차다. 수많은 인파도 벅차고, 거리마다 빼곡차게 들어서있는 높은 빌딩의 상가들도 벅차다. 물론 이케부쿠로도 사람이 굉장히 많지만 이케부쿠로는 시원하게 뚫려있는 느낌이다. 건물들도 그렇게 높지도 않아서 밝은 느낌이다. 사람들도 길거리 패션도 다르다. 시부야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멋을 낸 사람들이 많지만 이케부쿠로는 그것보다 약간 가볍고 건강한 느낌의 패션이다.
결국 도쿄의 이곳 저곳의 느낌이 모두 다르다는 것도 그 곳에서 이뤄지는 소비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에 불과하다. 도쿄는 거대한 소비 집단체이다.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어느 도시든 마찬가지지만) 우에노는 저렴하고, 하라주쿠는 조금 저렴하고, 신주쿠는 비싸고, 긴자는 터무니없이 비싸다. 어떤식으로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끄집어낼 수 있을까 궁리만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서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길거리의 호객꾼들과, 빌딩을 쌓을 수 있는 정도의 수많은 찌라시(전단지), 화려한 간판과 초대박 세일 벽보로 도배한 창문, 호객용 녹음멘트와 음악(비꾸 비꾸카메라~)들이 길거리를 가득 메운다. 서울도 이와 크게 다를 건 없지만 도쿄가 더욱 더 기계적이다. 사람들이 얻는 즐거움도 소비를 통해 얻는 즐거움으로만 가득차 있는 느낌이다. 소비를 통해 한 인간의 모습이 결정될 수 있지만, 인간이 결코 소비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좀 더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도쿄를 비롯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음을 굳게 먹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도시라는 거대한 소비의 숲에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비만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하루하루 유지해나가는 건 아닌가 염려를 하면서 말이다.
이케부쿠로의 느낌이 좋다는 얘기를 하다가 이상한 쪽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저 생각은 언젠가부터 가졌던 생각인데, 글을 쓰다보니까 어떻게 연결이 된 것 같다. '저 거리 위의 수많은 사람들은 행복할까?' 라고 생각했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 뭐. 난 나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놀고 열심히 살면되지.
http://ksi8084.blog.me/40107893924
2010년 6월 3일
콜드스톤 이야기 - 이케부쿠로 지원 / 도쿄의 모습
내가 일하는 콜드스톤 매장은 시부야점이다. 일본 전체에 37여 점포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한국이 짧은 기간 내에 이곳 저곳 콜드스톤이 무척 많이 생기고 있는 것에 비하면 무척 매장이 적은 편이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에도 콜드스톤이 있다고 말해주면 깜짝 놀라한다. 게다가 일본보다 매장 숫자가 더 많다고 하면 더 놀라워한다.
어제는 이케부쿠로 매장으로 지원을(Help) 나갔다. 이케부쿠로 콜드스톤은 선샤인시티(일본에서 세번째로 높은 빌딩) 지하에 위치해 있다. 모든 매장에 많은 크루가 근무하고 있지만 매장에서 크루가 쉬는 날이 겹치는 경우 다른 매장의 크루가 지원을 나간다. 시부야점의 점장님이 이케부쿠로에 지원을 나가보는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아직 일한지 3주 밖에 안됐는데 괜찮겠냐고 했더니, 어차피 일은 똑같으니까 문제 없을 거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건대 매장에서 일할 때 압구정점이랑, 분당점으로 지원을 나간 적이 있다. 한국의 콜드스톤 매장도 매장마다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데, 일본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걸 느꼈다. 매장을 주로 찾는 손님의 연령대가 모두 다를 뿐더러, 무엇보다 매장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크루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케부쿠로점은 시부야점에 비해서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시부야점보다 크게 붐비지 않기 때문에 크루들도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일하는 것 같다. 시부야점은 사람이 워낙 많아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그래서 일을 마치고 나면 정말 대사를 치른 것 같은 느낌을 매일 받는다. 이케부쿠로 매장은 9시에 문을 닫아서 마감 업무도 훨씬 느긋했다. 시부야 점은 그날 그날 바쁜 정도에 따라 10시~10시반까 영업을 하고 청소를 하고 나면 11시반 정도가 된다.
애초에 일본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먼저 아르바이트를 지원한 곳이 콜드스톤 이케부쿠로점 이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전화를 받았던 크루가 매장 쪽에서 연락을 줄테니 핸드폰 번호를 알려달라고 해서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핸드폰을 개통하고 난 뒤에 지원한 곳이 지금 일하고 있는 시부야점이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 시부야점도 매우 좋지만, 이케부쿠로가 집에서 전차로 6분 거리여서 매우 가깝다는 것은 조금 아쉽다.
도쿄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도 본인들이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명동, 강남, 압구정, 청담, 홍대, 신촌, 종로 등등 자신들이 주로 가는 곳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보기엔 서울도 각 상권마다 분위기와 느낌이 다르지만 도쿄는 그 차이가 훨씬 심하다. 신주쿠, 긴자, 에비스, 롯본기, 우에노, 오다이바,하라주쿠 등등 도쿄의 거의 모든 지역이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나도 아직까지 안가본 곳이 많지만 어디든 갈 때마다 전혀 다른 곳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신주쿠, 시부야, 이케부쿠로는 도쿄 최대의 번화가들이지만 그 사이에서도 차이가 존재한다. 느낌이 다르다. 내 룸메이트 이나다군은 하라주쿠를 좋아한다. 나는 이케부쿠로가 좋다. 시부야와 신주쿠는 벅차다. 수많은 인파도 벅차고, 거리마다 빼곡차게 들어서있는 높은 빌딩의 상가들도 벅차다. 물론 이케부쿠로도 사람이 굉장히 많지만 이케부쿠로는 시원하게 뚫려있는 느낌이다. 건물들도 그렇게 높지도 않아서 밝은 느낌이다. 사람들도 길거리 패션도 다르다. 시부야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멋을 낸 사람들이 많지만 이케부쿠로는 그것보다 약간 가볍고 건강한 느낌의 패션이다.
결국 도쿄의 이곳 저곳의 느낌이 모두 다르다는 것도 그 곳에서 이뤄지는 소비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에 불과하다. 도쿄는 거대한 소비 집단체이다.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어느 도시든 마찬가지지만) 우에노는 저렴하고, 하라주쿠는 조금 저렴하고, 신주쿠는 비싸고, 긴자는 터무니없이 비싸다. 어떤식으로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끄집어낼 수 있을까 궁리만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서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길거리의 호객꾼들과, 빌딩을 쌓을 수 있는 정도의 수많은 찌라시(전단지), 화려한 간판과 초대박 세일 벽보로 도배한 창문, 호객용 녹음멘트와 음악(비꾸 비꾸카메라~)들이 길거리를 가득 메운다. 서울도 이와 크게 다를 건 없지만 도쿄가 더욱 더 기계적이다. 사람들이 얻는 즐거움도 소비를 통해 얻는 즐거움으로만 가득차 있는 느낌이다. 소비를 통해 한 인간의 모습이 결정될 수 있지만, 인간이 결코 소비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좀 더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도쿄를 비롯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음을 굳게 먹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도시라는 거대한 소비의 숲에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비만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하루하루 유지해나가는 건 아닌가 염려를 하면서 말이다.
이케부쿠로의 느낌이 좋다는 얘기를 하다가 이상한 쪽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저 생각은 언젠가부터 가졌던 생각인데, 글을 쓰다보니까 어떻게 연결이 된 것 같다. '저 거리 위의 수많은 사람들은 행복할까?' 라고 생각했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 뭐. 난 나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놀고 열심히 살면되지.
피드 구독하기:
글 (At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