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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야말로 우리 인생을 이어가게 하는 마음일지 몰라요

오랜만에 쓰는 글은 얼마나 두려운가

많이 두렵죠. 오랜만에 쓰는 글에는 '내 글'이 없었을지도 몰라요. 내가 글을 써오던 방식. 글을 쓸 때면 했던 생각들, 그런 걸 기억해내기 쉽지 않을테니까요.

개인이 살아온 시간의 기록으로서의 글이라고 한다면, 글을 쓰지 않은 공백만큼 우리의 시간을 통째로 잃어버리고 마는게 아닐까요.

네, 물론 시간을 통째로 잃는 일은 없어요. 우리는 글을 쓰지 않는 시간에도 살아왔던 게 분명하니까요. 하지만 그 시간은 희미해지고 말거에요. 시간이 희미해진다는 것. 그건 잊혀진다는 거죠.

우린 왜 잊혀짐을 두려워할까요. 글쎄요.
우린 왜 두려움을 두려워할까요. 글쎄요.

두려움은 대체 무엇이길래 우리 인생에 그토록 따라다니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 인생은 두려움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네요.
그 이유라고 한다면, 저는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이곳에 두려움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어요.

그때 그때마다 두려워하고 있는 대상이 다른 것뿐이죠.
언제는 사랑을 하지 못할까 두렵고, 언제는 사랑을 잃을까 두렵고, 언제는 내 자신이 정체해 있는 것 같아 두렵고, 언제는 모든 행복이 순식간에 사라질까봐 두렵고 말이죠.

두려움이야말로 우리 인생을 이어가게 하는 마음일지도 몰라요.

오랜만에 글을 쓴다는 건 확실히 두려운 일이에요.
그 간의 공백을 채울만큼의 좋은 글을 쓰지 못할까에 대한 두려움일거에요.

전 또 두려움을 느끼고 있네요.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우린 웃고, 우린 울며 살아가야지

폴 오스터 <선셋파크 >를 읽었으니 쓰는 글

소설이건 영화건 처음 접하면 그 작품을 받아들이는 동안 '이 사람과 함께 여정을 해야겠다'라고 받아들여지는 인물들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 여정동안 나와 그 인물의 짝사랑이 시작되는것이다. 그 인물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지만, 나는 작가의 글을 통해 그인물을 지켜보며 나만의 짝사랑을 키워 나간다. 흥미롭게도 이번 소설에서는 그런 인물이 한 둘이 아니었다. 주인공 마일스는 물론, 필라, 빙, 앨런, 앨리스, 마일스의 아버지 모리스,  엄마 메리-리까지 모두 내가 아끼고 끌어안고 싶어 마다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뉴욕 선셋파크 근처의 비어있는 집을 무단점유 하여 살아가는 네 명의 젊은이를 비춘다. 그들 모두는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마냥 자유롭게 살아간다. 때로는 본인의 의지대로, 때로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들과 함께 바람에 맞춰 흔들리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드 프렌즈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뮤지컬 렌트 때문이었는지 늘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한 집에서 살아가는 것을 꿈꿔 왔다. 도쿄의 게스트하우스 시절은 내가 바라오던 모습이 가장 가깝게 이뤄졌던 시기다. 함께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가족처럼 마음이 잘 맞았으며, 다들 제 각기 인생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안고 있었다.

주인공 마일스 혼자만의 얘기만 존재했더라면, 그가 선셋파크의 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선셋파크라는 하나의 소설은 완성되지 않았다. 나의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와, 그리고 제 3자의 이야기는 쌓이고 쌓여 하나의 소설과 영화가 되어간다. 완성되어진 그 작품은 희극이기도 하면서 비극이기도 하고, 늘 그 중간을 오가는 느낌을 줄 것이다.  바람에 날리고, 비에 젖고, 뜨거운 햇살을 쬐고, 너를 안고, 너와 키스하고, 우린 웃고, 우린 울며 살아가야지. 살아가야지.

"이 모든 사실의 요점은 삶에서 상처는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입어 보아야만 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를 안는 기쁨, 다시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는 기쁨, 다시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기쁨, 다시 그녀가 먹는 모습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의 손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의 벗은 몸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의 벗은 몸을 만지는 기쁨, 다시 그녀의 벗은 몸에 키스하는 기쁨, 다시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가 머리 빗는 모습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가 손톱에 매니큐어 바르는 모습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와 함께 샤워를 하는 기쁨, 다시 책을 놓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기쁨, 다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모습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가 안젤라에게 퍼붓는 욕설을 듣는 기쁨, 다시 그녀에게 큰 소리로 책을 읽어 주는 기쁨, 다시 그녀의 트림 소리를 듣는 기쁨, 다시 그녀가 이 닦는 모습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의 옷을 벗기는 기쁨,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포개는 기쁨, 다시 그녀의 목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와 함께 거리를 걷는 기쁨, 다시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기쁨, 다시 그녀의 가슴을 핥는 기쁨, 다시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기쁨, 다시 그녀 옆에서 잠을 깨는 기쁨, 다시 그녀와 함께 수학 문제를 토론하는 기쁨, 다시 그녀에게 옷을 사주는 기쁨, 다시 그녀의 몸을 닦아 주고 그녀가 자기 몸을 닦아 주는 기쁨, 다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쁨, 다시 그녀와 함께 현재를 살아가는 기쁨, 다시 그녀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기쁨, 다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기쁨, 다시 그녀의 열렬한 검은 눈빛을 받으며 살아가는 기쁨, 그러고 난 뒤 지금부터 석 달 이상, 4월까지는 다시 그녀와 함께 있을 기회가 없으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 그녀가 1월 3일 오후 포트 오소리티 터미널에서 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 "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게 다예요. 더 나은 사람,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거요. 아주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좀 공허하기도 하지요.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4년 동안 대학에 가서 전 과정을 이수했다고 증명해 주는 학위증을 받는 식이 아니잖아요.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길이 없어요. 그래서 더 나아졌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더 강해졌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로 그냥 계속 밀고 나갔어요. 한참 지나니까 목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노력 자체에만 집중하게 되었어요. (사이. 또 와인 한 모금을 마신다)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저는 투쟁에 중독되어 버렸어요. 저 자신을 놓쳐 버리고 만 거죠. 계속 죽 해나갔지만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도 더는 모르게 되었어요."

"그는 아버지를 실망시켰고, 필라를 실망시켰고, 모든 사람을 실망시켰다. 차가 브루클린 다리를 건널 때 그는 이스트 강 건너편의 거대한 건물들을 바라보며 사라진 건물들, 무너지고 불타 더는 존재하지 않는 건물들, 사라져 가는 건물들과 사라지는 손에 대해 생각했다. 미래가 없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 가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부터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놀랍게도 인생은 놀랍다

놀랍게도 인생은 놀랍다
이 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 이 시작은 어딜까. 믿기지 않은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보고싶었던 그 사람을 만났다. 놀랍게도 인생은 놀랍다. 꿈에 그리던 그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나의 꿈에 자주 나타났다. 그가 나타날 때마다 나의 마음은 아팠다. 어색함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우리는 지난 시간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에게 미안해했고 그는 나에게 미안해했다. 그렇다. 우린 미숙했다. 인간사의 많은 일들이 지나가고 난 후에 우리는 미숙함으로서 지난 날의 후회를 모두 감쌀 수 있다. 이건 치사한 방법 같지만 사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실제로 우린 지난 시절 미숙했기 때문이다. 지금 또한 과거가 되고, 그걸 얼마 떨어지지 않은 미래에서 바라볼 때 우린 지금의 순간도 미숙한 시기였다고 바라볼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살아간다. 우린 만나서 서로의 미숙함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누가 더 미숙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린 모두 미숙했다. 우린 그 이후로 또다른 시간을 살아냈기 때문이다.

살아냈다고 하는 것에 대해
우린 인생을 살아가기도 하고 살아내기도 한다. 살아가는 것과 살아내는 것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살아가는 것은 몸을 좀 더 삶의 흐름에 유유히 내맡기는 것이다. 살아내는 것은 삶의 자연스런 흐름을 거슬러 거기에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내는 느낌을 준다. 삶을 좀 더 객체화시키기도 한다. 아직 나에게 삶은 살아내는 대상인 듯 싶다.우리가 나눈 시간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정말이다.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너와 나는 같은 시간에 있었던 것 뿐이지만 그 시간은 너무나도 많은 걸 남긴다.


2014년 7월 26일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1 - 창작한다는 것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1 - 창작한다는 것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를 주제로 하는 첫 끄적임이다. 원래 시리즈 제목을 '인생의 행위에 대하여'로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주체는 '인간'일수 밖에 없기도 하니 '인간의 행위'로 정했다. 그러고서 처음으로 떠올리는 인간의 행위는 '창작'이다.

사실 모든 게 창작이다. 창작이 아닌게 없다. 내가 쓰고 있는 글도 창작이며,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창작물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도 결국 창작의 연속이다. 창작은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고 그것은 '무'를 '유'로 치환함이다. 인간의 인생에서 '무(없음)'란 무엇인가. 그건 살지 않음 (살아가지 않은 시간들, 오지 않은 시간들)이고, 그 반대로 살아온 시간들은 모두 '유'가 된다. 즉, 살아가는 행위 자체만으로 무를 유로 바꾸는 창작이다.

인생의 시간 속을 흘러간다는 점에서 창작은 필연적이며 그럼 중요한 것은 '어떻게' 창작하느냐의 문제로 넘어간다. 결국 인생을 어떻게 살것인가의 문제이다. 우린 태어남과 동시에 아주 커다란 흰 종이를 건네 받았고, 각자의 그림을 그려나간다. 처음부터 그림은 잘 그릴 수 없기에, 부모의 양육과 사회의 교육을 받으며, 그리고 사회에서 정해진 룰에 맞춰 그림을 그려나가는 법을 배운다. 예술도 그렇다.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는 것에도 모두 그 세계의 룰들이 존재한다.

우린 선택해야 한다. 가장 먼저는 룰을 따를지 말지, 따른다면 어느 정도 룰을 따를지,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를 말이다. 사실 이러한 선택지들 사이에서 우열은 없다. 모든 창작 과정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가지기 때문이다. 형식에 잘 맞춰 쓰여진 글이나, 형식을 파괴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담아내는 글.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음악과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음악. 사회에서 바람직하게 바라보는 한 인간의 삶이나, 사회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쁜지를 가려낼 수는 없다.

창작은 애초에 좋고 나쁨을 가려낼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니다. '좋은 창작'과 '나쁜 창작'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삶과 나쁜 삶, 바람직한 삶과 바람직하지 않은 삶을 나눠서 구분하는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창작은 어디까지나 창작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다.(후에 의미없음에 대한 글을 썼을지라도)우리는 그저 의미를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인생에 주체적으로 임하여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그런 인생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사회에서 만들어 내는대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그 나름대로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면 된다.

흔히 말하는 '의미 부여' 작업이다. 의미부여만큼 창작에서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흰 종이에 물감을 의도해서 뿌리든, 물감이 엎지러져서 종이에 뿌려지든, 우리는 두 가지 상황에서 모두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 내가 그린 그림, 내가 쓴 글, 내가 산 오늘 하루, 내가 살아온 세월에 우린 얼마든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그렇게 의미를 부여한 순간에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창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정리하자면 창작이 성립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세가지는 창작자 - 창작물 - 의미다. 내가 아무 생각없이 보내고 있는 시간에도 약간의 의미를 더해주면 그건 하나의 창작으로서 완성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의 창작품으로 완성되어지는 순간, 그건 이미 좋고 나쁨의 가치 판단의 필요성을 뛰어넘는 세계에 도달한다. 무가 유로 변환되는 세계, 창작의 세계다.

창작한다는 것,
나는 이 에세이 한 편으로 내가 쓴 모든 글과, 앞으로 내가 쓸 모든 글들을 옹호하였다.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에 다시 한번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지님' 을 탈출할 수 없는 '깨질 수 없는' 창작이 되었다. (←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다)

모든 창작은 빚짐이다

(남들에게는)보잘 것 없는 에세이겠지만, 뜨거운 햇볕 아래 서있다가 문득 글을 시리즈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시리즈 제목을 정했다.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다. 써보다가 글이 잘 써지면 끈기를 가지고 써보고, 그렇지 않고 '글을 이어나가는' 흥미를 찾지 못하면 조용히 접을 생각이다.

최근 내가 글을 잘 못쓰는 명백한 이유를 한 가지 찾았다. 책을 안읽는다. 문장의 흡수가 적으면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글을 많이 읽어야만 글도 써지고 싶은 법이다.모든 창작이 그러함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무는 유를 창조하지 못한다. 모든 창작은 빚짐이다. 그러니 빚지자. 주위의 모든 존재에 빚을 지자. 영화-음악-책-그림-사진-사람을 관통하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빚을 지고서, 거기에 나만의 숨을 넣어 창작을 하자.

내일은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지라도 달이 아름다운 밤

2013.03.25

왜 항상 밤이 되면 생각이 많아지는 걸까
밤이 되면 새로운 다짐들이 떠오르고, 잊고 있었던 옛 일들이 떠오르고, 가족들이 보고 싶고, 친구들이 보고 싶고, 책을 읽고 싶고, 영화를 보고 싶고, 옛 사진들을 들춰보게 되고, 글이 쓰고 싶어지고, 심지어 무언가를 먹고 싶어진다. 밤에 몰려오는 생각과 욕구들이 하루 중에 균등하게 찾아오면 좋을 텐데. 그렇다면 적절히 욕구를 분출해내어 더 생산적인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밤에는 잠을 자야만 또 내일 하루를 맑은 정신으로 보낼 수 있다. 그야말로 정말 맑은 정신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밤새 날뛰던 여러가지 생각들은 잠잠 해지고, 눈을 감으면 손에 잡힐 것 같은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도 희미해지고, 어떤 새로운 다짐들도 힘을 잃고 사그라든다. 그래서 아침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하루를 우리 인생으로 본다면
우리는 우리 인생의 느즈막한 때를 황혼이라고 부르지 않나. 저녁 노을로 물들어 가는 이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때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생 중 가장 아름다운 때도 그 즈음이지 않을까 싶다. 하루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공기의 고요함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여유로이 즐기는 때. 그리고는 다시 우리의 정신활동이 활발해지지 않을까. 새로운 생각도 많이 들게 되고, 인생에서 만나온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워 하며, 반성과 새로운 다짐을 반복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평생을 산다는 것은 하루라는 일생을 평생 산다는 것이다. 새벽-아침-오전-정오-오후-저녁-밤-다시 새벽에 까지 이르는 시간들을 평생 살지만, 그 평생은 평생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평생은 오늘 하루에 다름없다고도 할 수 있는데...

하루를  되돌아보며 후회하는 일들이 있다면,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서도 후회하는 일이 있겠지
오늘은 누구를 만났으면 좋았을걸. 그 사람에게 그렇게 심하게 말하지 말걸. 가족들에게 전화를 할 걸.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할 걸. 영화를 볼 걸. 이런 생각들이 하루를 마감하면서 들게 된다. 오늘은 다행인 일이 한가지 있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의 특성상 대외기관과 협력해야 할 일이 많은데, 그러다보니 하루 종일 몇번이고 협력기관의 담당자와 통화를 하고 이메일을 주고 받는다. 오늘은 아침에 출근하니 그 담당자로부터 매우 기분이 좋지 않은 메일을 와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심각할 일도 아니었는데, 그동안에 쌓이고 쌓인 게 많다 보니 난 기분이 상했고, 회신 메일에 나의 안좋은 감정을 모두 드러냈다. 그러면서 지우고 다시쓰고 반복하기를 몇 십번. 그 담당자와 앞으로도 몇 번이고 일을 함께 해야하기 때문에 이번에 세게 나가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기분 상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메일을 공격적인 멘트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결국은 '발송'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그 메일을 인쇄해서 옆의 동료에게 보여줬다. 이런 저런 일이 있어서 이런 메일을 보내려고 하는데, 이런 메일을 받으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다. 동료는 보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아차' 싶었다. 나는 나의 이런 공격적인 메일을 써내려가면서 이런 메일을 쓰고 있는 나의 행동을 합리화 했고, 이런 정도의 메일을 쓰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결국 그 메일은 보내지 않았고, 전화를 걸어 좋은 목소리로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전화를 하고나니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리고 그 메일을 보내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싶었다. 옆에 그 동료가 없었더라면 메일은 발송됐을 것이고 그 사람과 나의 사이는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게 오늘 정말 잘한 일이다. 나 스스로 감정을 잘 컨트롤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상황'이 나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것이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내가 해군 병장 시절 생활반장을 맡고 있던 때였다. 생활반의 한 수병이 취침시간이 지난 뒤 생활관의 규칙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 생활반 전체가 기합을 받는 일이 있었다. 전체에게 피해를 끼친 그 수병 때문에 정말 화가 치밀어 올라서 어떻게 그 수병을 혼낼지 생각했다.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정말 그 수병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되는지 고민했다. 나는 그 수병을 조용히 불렀다. 그 수병은 경직된 얼굴로 떨고 있었다. 자기가 크게 잘못을 했던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최대한 화를 가라앉히고 그 친구를 조용히 타이르면서 얘기했다. 오늘은 너의 잘못 때문에 다른 생활반 친구들이 밤 중에 고생을 했으니까, 다른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다음부터는 그런 실수 없도록 해달라고. 그리고는 웃으면서 조용하게 넘어갔다. 사실 그 순간 나의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 때문에 그런지 나와 그 수병은 그 이후로 정말 친하게 지냈고, 전역을 하고나서도 가끔 연락하는 좋은 사이로 지내고 있다.

인생의 시간이 흐르고 난다면
인생의 시간이 흐르고 난다면 그런 일들이 많이 떠오르지 않을까. 내가 잘못했던 일보다는 (지우고 싶은 기억들 보다는) 상황을 이겨내고 스스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할만한 일들이 떠오르지 않을까. 그런 것들 말이다. 정말 크게 잘못해서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엄청 크게 혼날 걸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뜻밖으로 따뜻하게 타일러 주시던 그 때 그런 기억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부모님과 선생님들도 엄청나게 자신의 내면과 싸우고 계셨을 것이다.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서 화가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니 말이다. 나도 조금 더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감정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 많은 (내면의)것을 분출해내며 즐겁게 살아간다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에 놓인 인간들에게 반드시 좋은 살이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이성으로서 제어하며)  너무 억누르지 않으며, 너무 분출해내지 않으며 그렇게 어렵게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쉬운것은 재미없다)

결국에 누가 옳았는지는 판단할 수 없다.
육십억개의 인생을 놓고 보았을 때(없어져간 영혼들까지 포함하면 수백억) 결국에 누가 옳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옳은 것 같다는 느낌과 그른 것 같다는 느낌만 있어 그 느낌에 기대어 역사를 써내려가지만 그 판단 또한 중립이 아니고서는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우주에 깔려있는 수많은 별들의 존재를 두고 (혹은 그 별의 탄생과 소멸의 역사를 두고) 그 존재가 (혹은 역사가) 옳다 그르다를 말할 수 없듯이 말이다. 태양은 지구에게는 따듯한 햇살과 지구 만물에게 에너지를 전달해주는 고마운 존재이지만, 화성에게는 너무 가까워서 모든 걸 타들어가게 만드는 별이고, 또 다른 행성들에겐 그 열과 빛이 너무 적게 전달되어서 있음에 못미치는 별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냥 있게 된 존재들끼리 (존재하게된 있음들끼리) 어울어져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이 누가 되었든 하나님이 창조했든 원숭이에서 진화를 했든, 우리들이 사랑의 결실이든 하룻밤의 실수든, 결과적으로는 존재하게 되었고, 존재들끼리 어울리며 존재하는 것이다. (즐겁게 혹은 괴롭게. 하지만 이왕이면 즐겁게)

오늘도 일을 마치고 학교에 들러 후배와 밥을 먹고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렸다.
후배가 얘기했다.
하늘에 달 좀 봐, 너무 이뻐. 뭐가 이쁘냐. 맨날 같은 달인데. 정말? 어떻게 저렇게 예쁜 달을 보고서 감흥이 없을 수 있지? 감성이 너무 메마른거 아냐? 봐봐 정말 이뻐. 요새 달이 참 좋은가봐. 
단언컨대 달이 좋았다기 보다는 그 후배의 마음이 좋았던 거다. 왜냐하면 그 후배는 나와 밥을 먹는 내내 자기가 요새 어떤 학문에 빠져있는지, 그 학문이 얼마나 재밌는지, 요즘 엑셀 작업에서 이런이런 부분에서 막히고 있는데 내가 해결방법을 알고 있는지, 내일은 외국에서 오신 교수님이 특강을 하는데 교수님으로부터 일찍 와서 도와주면 좋겠다는 요청을 받아서 얼마나 기분 좋은지, 계속 떠들었기 때문이다. 오늘 그 후배에게는 달이 좋아보일 수 밖에 없는 날이었다. 분명 오늘 그 달은 누군가에겐 눈물을 머금은 것처럼 슬프게 보였을 수 있다.

아름다운 달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 하자.
결과적으로는 오늘 하고 싶었던 얘기를 모두 글로 풀어내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귀가하는 길에 든 생각들, 집에 들어와 밀린 설거지를 하면서 든 생각들, 샤워를 하고 컴퓨터 전원을 켜기 전까지 들었던 생각들이 3분의2 정도는 이 글에 담긴 것 같다. (지금 이 순간까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는 생각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글의 끄트머리에서 후배의 달 이야기를 쓰다보니까 갑자기 달이 보고 싶어졌다. 오늘 정말 달이 그렇게 예뻤을까. (객관적으로) 아까는 내가 안경을 끼지 않고 봐서 별 감흥이 없었던 것 아닐까. 글을 닫는대로 밖에 나가 다시 한 번 잘 봐야겠다. 밖에 나가서 그 달을 봤을 때 달이 '내 눈에도' 아름답다면, 오늘 하루와 오늘 이 글의 제목은 '달이 아름다운 밤'이다. 끝.

스무살의 자서전 #5 나의 인생, 나의 아름다운 인생

스무살의 자서전 #5
나의 인생, 나의 아름다운 인생
자서전 끝내며


나의 인생, 나의 아름다운 인생

스무 살에 쓰는 자서전을 통해서 나는 잠시나마 과거로의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쓴 내용은 나의 삶을 만들어온 굵직한 내용들뿐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건 지난 20년의 모든 사건들이고 모든 환경들이다. 큰 일부터 해서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까지 모두 '나'를 만드는데 일조를 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나의 선택이었다. 사건들도 환경들도 다 내가 선택한 것이다. 전학을 가서 환경을 바꾸려 한 것도 나의 선택이고, 영어 테이프 대신 팝음악을 귀에 익힌 것도 나의 선택이고, 학교 옆에 있던 비디오가게에서 비디오를 빌려다 봤던 것들까지 모두 나의 선택들이다. 지난날의 선택을 후회해도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지금 내가 여기 서있기 때문이다. 그 때의 공기가 아닌 지금의 공기를 마시고 있고, 그 때의 시간이 아니라 지금의 시간을 달리고 있다.

수많은 선택으로 만들어져 온 나의 인생. 내 나이 스무 살의 인생.  나는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지나온 모든 순간이 행복했고, 과거의 행복이 쌓이고 쌓인 지금의 순간도 행복하고, 지금의 행복이 쌓일 내 미래도 행복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나는 걱정이 없다.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즐기면서, 미래를 내다보고 꾸준히 달리는 이상 나의 인생은 아름답다. 지금, 나는 젊고, 힘이 넘치고, 희망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의 내 인생의 테마는 열정과 의지다. 열정과 의지만 있으면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난 내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The End
2010년 10월 30일
 
자서전을 끝내며

처음엔 자서전을 쓰기 전에 남들에 비해 평탄한 인생을 걸어 온 내가 도대체 무슨 할 애기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여곡절이 없는 인생 스토리를 살아온 저로서는 이 자서전이 자칫 살아온 날들의 일기에 불과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우여곡절을 그려내는 드라마틱한 인생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저를 있게 해주고, 제 꿈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 과정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하고 위의 글을 써내려 가고 있습니다..
자서전을 쓰면서 제가 잊고 살아왔던 것들을 되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학교 선생님에 대한 얘기를 써내려 갈 때면, 졸업앨범에서 전화번호를 찾아 오랜만에 전화를 드릴 수도 있었고, 그 동안 소홀해진 친구한테 문자 한 통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자서전을 쓰면서 더 큰 용기를 얻고 인생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한 번쯤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볼 필요성이 있는 시점에서 이런 좋은 과제를 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스무살의 자서전 #4 나의 고등학교 - 세 가지 행복과 공부

스무살의 자서전 #4
나의 고등학교 - 세 가지 행복과 공부
시골소년이 서울까지 오다


나의 고등학교 - 세 가지 행복과 공부

초등학교 6학년 이후로 줄 곧 나의 위치는 중상위권이었다. 반에서 늘4~5등을 했다. 결코 1등은 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1등을 되고 싶은 욕심은 없었다. 나는 나의 위치에 만족했다. 성적이 심하게 떨어지는 일도 없었고, 크게 오르는 경우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내내 성적 순위에 대한 압박감은 전혀 없었다. 혹시 또 내가 아래쪽으로 많이 밀려나거나 그랬다면 모를 일이지만, 늘 나의 위치는 온전했다. 내가 1등을 하는 정도의 머리와 노력 정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또한 반에서 1등 하는 애들은 자연스레 모든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고 은근히 반을 대표한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에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다. 하지만 나 정도의 위치에 있는 애들은 선생님들의 적당한 관심과, 학업에 대한 적당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무척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너무나도 쉽게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는 법을 깨우쳐 버린 듯 했다. 나의 감정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참 평탄하고 평탄한 고등학교 생활이었다. 하지만 나의 기분은 늘 허공에 떠있었다. 음악과 사진과 영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3년을 기숙사에서 보냈던 나는 적당한 규제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즐길 수 있었다. 토요일 외박 날만 되면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니고, 엄마와 함께 데이트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순간을 즐겼다. 결코 학업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억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탈하지도 않았다. 공부를 한 시간 하는 것과 영화를 보러 가는 것 중 무엇이 더 가치 있을지를 따져가면서 행동했다. 적당히 조화로웠던 내 고등학교 시절 3년이었다. 고등학교 때 잊지 못할 친구들과 잊지 못할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FOCUS 친구들을 만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2학년 때는 정말 마음이 통하고 잘 맞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는데, 가장 기억에 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는 나의 고등학교 2학년 한 해의 모든 것을 함께 했다. 우리 둘은 공부, 놀이, 고민 상담까지 모든 걸 공유했다. 서로의 개그스타일도 비슷하고 취향도 닮아서 우리는 그렇게 잘 어울려 놀 수가 없었다. 정말 2학년 때는 학교에 가서 걔 때문에 웃는 걸로 시작해서 걔 때문에 웃으면서 일과를 마칠 수 있었다. 나보다도 머리가 좋고 창의력이 좋아서 난 늘 그 친구한테 많은 걸 배웠다. 심지어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법까지도 배웠다. 그 친구는 내 인생에 정말 큰 영향을 주었다. 항상 그 친구를 보면서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낼 거라는 확신을 하곤 했다.

일본으로 갔던 고등학교 수학여행은 나의 마인드를 확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일본에 갔다 와서 일본의 매력에 빠진 나는 당장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세계가 넓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넓디넓은 세계로 나아가고 싶었다. 나는 세 달 동안 일본어를 공부해서 일본어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라고 스스로 마음먹었다. 나는 한국 땅을 벗어나 더 넓은 곳에서 뛰고 싶어졌다. 한 번에 이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좀 더 넓은 곳에서 많은 아이들과 공부하고 싶어서 시골에서 도시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리고 줄곧 전라북도 전주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이곳에 더욱 머무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음의 목표는 서울이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내 옆자리의 친구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에 있는 고등학생들과 경쟁을 해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까 숨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마음먹고 일본어 공부를 시작해서 일본어 자격증을 딴 것은 나에게 큰 활력제가 되었다. 관심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수능 날짜를 세어가며 그 어느 때보다도 공부를 열심히 했다. 세상에 태어나 왕이 되어 가장 대접받는 시기, 고3 시기에 나는 조용히 목표를 향해서 항해지도를 그려나갔고, 마침내 내 노력의 결과는 빛을 발하였다./

시골소년이 서울까지 오다

나는 건국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을 했다. 처음엔 조금 더 높은 학교를 목표로 잡았지만, 건국대학교에 합격을 나고서도 합격한 것에 대해 감사했다. 난 열심히 대학생활을 해 나갔다. 하루하루를 새로운 계획으로 세워가면서 늘 바쁘게 지냈다. 금융동아리, 사진 동아리, 영화동아리 모두 세 동아리에 가입을 했고, 나는 어느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또 학업도 마찬가지였다. 힘들게 공부해서 올라 온 서울의 대학인만큼 열심히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동시에 잡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술자리를 피하게 되었고, 생활의 무게를 학과 공부 쪽으로 옮기면서 그 동안 크게 벌려 놓은 활동 범위들을 조금씩 좁히기 시작했다.

1학년 때는 학교생활 외에도 서울을 즐겼다. 서울은 한국의 수도이고, 난 늘 이곳에서의 생활을 꿈꿔왔다. 그리고 서울에서의 숨가쁜 생활을 나를 쾌감으로 몰아넣었다. 서울에서는 모든 게 빨리 빨리 돌아갔다. 사람들의 걸음도 빨랐고, 행동도 빨랐고, 경쟁 순위가 바뀌는 것도 빨랐다.  오직 느린 건 도로 위의 자동차들뿐이었다. 1학년 때는 건대입구에서 약 40분간 떨어진 신림에서 형과 함께 거주했다. 7시 정도에 지하철 2호선에 올라 등교할 때는 정말 지옥 같은 순간들의 반복이었다. 지하철 안에 꽉꽉 채워진 사람들, 다음 정거장에서 자리가 없어도 계속 들어오는 사람들. 그러고는 두세 정거장에서 그 많은 인원이 물밀듯이 빠져나간다. 그러면 그제야 난 자리를 잡고 앉아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비효율적이고 편향적인 개발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그래도 숨 막히는 지하철의 그 살벌함도 지방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이른 아침의 서울의 지하철은 아침부터 나의 각오를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다가 숨 막히고 공기가 안 좋은 출근시간대의 지하철을 피하기 위해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기로 했다. 난 새벽 4시에 일어나 학교길 채비를 하고 4시 50분에 첫차(버스)에 올랐다. 첫차를 처음 탔을 때, 나는 승객들이 많이 없어서 자리가 남아있을 걸로 기대했다. 하지만 첫차에도 사람은 무척 많아서 앉을 곳이 전혀 없었다. 서울은 이런 식으로 나의 또 한 번 뒤통수를 때려주었다. 서울엔 인구가 많고, 그래서 나처럼 출근 시간대의 지하철을 피하고 싶어 일찍 첫차를 타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지하철보다야 숨통이 트이는 버스였기 때문에 나는 늘 첫차를 탔고, 때문에 새벽 4시에 일어나야만 했다. 나의 서울 탐방은 주로 생기 넘치는 곳이 중심이 되었다. 명동과 동대문 운동장과 코엑스, 사람이 많은 곳을 가서 사람 보는 재미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는 재미를 느끼곤 했다. 그렇게 바쁘게 지냈던 1학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나갔고, 학업에서도 인간관계면에서도 서울탐방에서도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보람차게 1년을 보냈다.

그 1년 동안 난 성장하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고서는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생활방식이나, 사고하는 방식이나, 사람을 만나는 법이나 나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 즐겁기만 했던 대학생 1년을 보낸 뒤, 나는 군대에 지원할 수가 없었다. 그 즐거움을 좀 더 만끽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내가 탐구하고 있는 학문에 대해서도 정체성을 확실히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2학년까지 마치고 군대를 가기로 결정했다. 2학년에 첫 입학하자마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1학년 때 서울 구경도 많이 하고, 영화도 많이 봤으니, 이번엔 내 스스로 돈을 벌자 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르바이트 비는 학생인 나에게는 충분할 정도였고, 나는 1학년 때보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기숙사에 들어왔기 때문에 돈을 쓰지 않고 계속 모을 수도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부모님의 선물을 사갈 때는 내 스스로의 모습이 대견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아직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지만, 그 동안 나에게 바친 부모님의 땀에 대해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오전과 낮 시간엔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1학년 때보다 더 바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면서 내가 속해있는 조직에 대해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서 새로운 인간관계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느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2년 동안 나는 대학에서 등록금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전공수업보다 배울 것이 많고 유익한 교양수업들이 그러했고, 대학생활의 본보기가 되어주는 선배들이 그러했다. 기쁘게도 네 학기 중 어느 학기 하나 빼놓지 않고, 삶에 등불이 될 만한 교양수업들을 만날 수 있었고, 좋은 본보기가 되는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내가 환경의 산물이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해주듯이 말이다. 건국대학교라는 환경은 내가 인간으로서 성숙할 수 있도록 돕는데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또 언제까지나 환경 속에 숨어있는 기회를 발견해내는 일은 나의 몫이라는 것을 진작 깨달았던 터다. 이런 생각은 날 어느 조직, 어느 환경에 가서든 잘 적응하게 만드는데 도움을 줄 것도 같다.

대학교 2년 동안 나는 나의 꿈을 향해 끊임없이 달렸다.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넓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나의 목표이자 꿈.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는 친구와 둘이서 제주도 자전거 일주를 감행하면서 끈기를 얻고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는 학교에서 실시하는 해외 탐방 프로그램에 뽑히게 되어 저 먼 땅 유럽에까지 발 도장을 찍고 왔다. 유럽에 갔을 때의 감격이란 정말이지, 최고였다. 나는 계속해서 나의 꿈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좁은 시골에서 태어난 소년이 면의 소재지로 이사를 오고, 그 소년이 시내의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고, 지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벗어나, 서울로 대학을 오게 되고, 대륙을 벗어나 제주도에 가고 일본에 가고, 유럽에 가기까지는 20년의 세월이 걸렸을 뿐이다.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좀 더 넓은 세계로 향해 나아가는 꿈을 품는다면, 나의 꿈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난 나아간다.

스무살의 자서전 #3 내 인생의 관심사와 만나다

스무살의 자서전 #3
내 인생의 관심사와 만나다
영화를 만나다
사진을 만나다

내 인생의 관심사와 만나다

집에서 가장 가깝기도 하고 평소 가고 싶어하던 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됐고 반 배치고사를 본 뒤 반을 배정받았다 .1학년 3반, 문정자 담임선생님. 초등학교 2학년 이후로의 기억은 많이 선명하고, 중학교 이후의 기억은 거의 모두 살려낼 수 있을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등교 첫 날의 교실 안 풍경을 기억할 정도니 말이다. 수업이 시작 전 나는 즐겨보던 어린이 잡지 '어린이동산'을 읽고 있었다. 그러자 멀리서 담임선생님께서 나의 자리로 다가 오시더니 무엇을 보고 있냐고 물으셨다. 나는 책의 표지를 보이면서 어린이동산 이라는 잡지를 읽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말씀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제 중학생이 되었으니 어린이가 아니죠. 오늘까지만 보도록 하고, 중학생한테 어울리는 다른 책들을 읽어보세요."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었다. 그 날 이후로 난 학교에 그 잡지를 다시는 가져가지 않았지만, 집에선 여전히 즐겨 읽었다. 그 잡지에는 재미있고 유익한 내용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중학교의 수업은 초등학교의 방식과 180도 달랐고, 난 그러한 수업 방식에 무척 잘 적응해 나갔다.

중학교 시기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에 대한 것들을 알려준 시기다. 초등학교 때의 나의 관심사가 수시로 바뀌어서 꿈도 수시로 바뀌었지만, 중학교 때는 나의 취향을 적당하게 잡아내고 그것을 나의 관심사 만들 줄 알았다. 먼저 내가 수학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복잡하게 계산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을 하는 과정이 나의 머리를 정말 아프게 만들었다. 수학 시간만 되면 왜 계산기를 멀쩡한 계산기를 놔두고 왜 이렇게 고생해서 손으로 계산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불평을 하곤 했다. 한 번은 수학선생님을 찾아가 "전 정말 수학이 어려워요. 수학이 싫은데 어떡하면 좋죠." 라며 진지하게 나의 문제를 털어 놓기까지 했었다. 수학시험을 보면 성적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수학의 교과과정을 따라가기에 내 스스로가 벅차했다. 그 때 내가 수학을 좋아했더라면 내 인생은 바뀌었을 것이다. 수학 말고는 특별히 싫어하는 과목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내가 체육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몸이 성장하고 친구들 간에 공을 차는 실력 차이가 났고 자연스레 축구를 할 기회가 많이 없어졌다. 체력도 좋고 지구력도 좋았지만 공만 잡으면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체육의 실기는 주로 구기 종목 능력을 봤고 덕분에 나의 체육 실기 점수는 말도 못했다. 대신 미술의 실기와 음악의 실기는 괜찮았기 때문에 체육에서의 손실을 회복할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체육시간에 소홀했던 것이 후회되기도 한다. 좀 더 적극적으로 공놀이를 열심히 해서 중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 기분이 안 좋을 때나 스트레스가 쌓일 때 공을 차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울 뿐이다. 수학과 체육을 잃었지만 얻은 것이 더욱 많았다.

난 영어를 무척 좋아했다. 나는 중학교에 들어와서 영어를 처음으로 배우는 것이었고, 영어시간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흥분 속에서 언제나 열심히 했다. 그리고 나는 과학을 좋아했다. 과학 시간엔 옆자리의 짝꿍과 토론을 벌이곤 했다. "왜 갑자기 생물이 늘어난 거지", "그건 왜 그런 거지" 라는 식의 질문을 계속 서로 물어가면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사회 과목이었다. 국사를 비롯해서, 세계사, 그리고 경제현상까지 통틀어서 배웠던 사회시간은 정말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정말 자상하셨던 사회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묻는 질문에 늘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셨다. 특히 나는 국사를 좋아했었기 때문에 꽤 오랫동안 나의 꿈은 국사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시간이 좀 흐른 뒤 고등학교에 가서는 관심분야가 국사에서 경제로 바뀌었을 뿐, 사회는 역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라는 것은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이때부터 내가 앞으로 택해서 걸어가야 할 학문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중학교 시기는 내 인생의 방향과 즐거움을 찾아 준 것이다. 영어를 좋아했던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팝을 듣기 시작했다. 부모님께서 영어듣기를 하라며 휴대용 카세트를 사주셨지만, 나는 그것을 사용해 중학교 3년 내내 팝만 들었다. 팝을 좋아하게 되면서 내 인생은 리듬을 타게 되었다. 늘 팝만 들어서 한 친구는 나한테 제발 좀 그만 듣고 국산 가요 좀 들으라고 말을 했다. 나 말고 남들이 모두 듣는 가요를 듣지 않은 덕분에 나는 유명한 가수의 가요 하나 조차 제대로 따라 부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팝을 들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나와 똑같이 팝을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알고 있는 팝에 대한 지식을 교환하고 팝 얘기를 나누면서 둘도 없는 친한 친구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다. 우리 둘은 아침에 학교에 오자마자 팝 얘기로 시작해서 오후에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까지 팝 얘기로 대화를 나눴다. 정말 마음이 잘 맞았던 이 친구와 같이 고등학교로 진학하자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나중에 미국에 가서 살자는 꿈을 공유하기도 했다. 팝은 내가 발견한 첫 번째 즐거움이다. 팝을 좋아하게 되면서 마음이 잘 맞는 친구를 만나게 된 거고, 경쾌한 인생을 보내는 준비를 완료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한 소절도 따라 부르기 힘들었던 가요대신 가사를 줄줄 외웠던 팝은 내 인생의 반가운 손님이었다./

영화를 만나다

이어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팝을 들으면 경쾌한 걸음을 걷고 있던 나에겐 또 다른 손님이 찾아온다. 바로 영화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은 백 퍼센트 환경 덕이다. 먼저 중학교 2학년 초, 중학교에서 50미터 떨어진 거리에 '빅뱅'이라는 비디오대여점이 생겼다. 영화대여점의 비디오 대여료는 한 편당2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과 8박 9일이라는 파격적인 대여기간을 제시했다. 물론 오래된 프로에 해당했지만 말이다. 그 전엔 동네에 있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심형래의 영구시리즈를 빌려다 보거나, 정말 재미있다고 소문난 영화를 빌려다 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비디오대여점이 생기면서 나는 매일 같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과자 하나와 아이스크림 하나를 덜 먹으면 5편의 비디오를 빌려다 볼 수 있었다는 계산 하에 나는 그것을 적극 이용했다. 당시 비디오대여점은 일반 구프로와 추천프로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나는 추천프로를 모두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뒤 시간이 지나자 정말 추천프로의 비디오를 드문드문 빼먹고 거의 모두 빌려보게 되었을 정도였다. 처음에 영화는 나에게 가르침을 주거나 감동을 주지는 않았고 나도 그런 의도에서 영화를 빌려다 본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단지 방과 후 집에서 보내는 시간에 재미있는 비디오를 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재미를 얻기 위해서 빌려 본 것이었다. 월요일만 되면 비디오가게에 가서  '이번 주는 무슨 영화를 볼까' 라는 고민을 하며 일고 여덟 편의 비디오를 한꺼번에 빌렸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무엇을 먼저 볼까'라는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아쉬운 것은 내가 그 때 내가 본 영화들을 적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중학교 때 영화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비디오테이프 한 개는 교과서보다도 더욱 의미가 있었다. 그 이후로 난 영화 속에서 수많은 스승들을 만나게 됐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게 됐다.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에 나의 감정을 이입시켜 눈물을 펑펑 쏟아내기도 했다. 어느 날은 새벽녘 잠이 안 와서 영화를 한편 보는데, 그 영화가 어찌나 슬프던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계속 울었던 적도 있다.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포레스트 검프'를 보면서 인생은 초콜릿 박스와도 같아서 어떤 삶의 방향을 걸어가게 될지 예상할 수 없다는 주인공 어머니의 철학과, 어느 길을 가든 간에 자신의 앞만 바라보면서 꾸준히 달려가는 포레스트 검프의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모습은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의 Carpediem(현재를 즐겨라)이라는 외침 속에서 내 인생의 초점을 어디에다 맞추고 살아갈 것인지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파인딩 포레스터'를 보면서 인생의 역할 모델을 발견하게 됐고, '노팅힐'을 보면서 뜻밖에 찾아 올지 모르는 사랑에 대한 기대를 품게 되었고, '나홀로 집에'를 보면서 뜻하지 않게 가족의 소중함을 발견했다.

언제부턴가 무슨 영화를 보든 간에 꼭 한 가지의 배움을 발견하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영화는 나에게 가장 큰 스승님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영화에서 얻는 감동과 교훈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보다도 훨씬 더 오래갔고, 주인공의 모습과 행동은 머릿속에서 전혀 떠나가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 꿈이 국사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던 것도, 영화를 만나고부터는 영화감독이 되는 것을 꿈으로 가지기 시작했다. 친구나 가족은 나의 기분을 일일이 맞춰줄 수는 없었지만, 영화는 항상 나의 기분에 따라와 줬다. 힘들 땐 주인공이 크게 성공하는 영화를 골라보면 됐고, 웃을 일이 없고 힘이 나지 않을 땐 재미있고 웃기는 영화를 찾아보면 됐고, 화가 날 때는 눈물 나는 슬픈 영화를 보면서 감정을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점은 영화를 보기 전과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내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나의 모습이 바뀌는 데에는 100분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에 대한 환상을 펼쳐나갔다. 늘어가는 환상이 인생에 좋은 영향을 미칠지 악영향을 미칠지는 모를 일이었다. 분명한 건 내가 영화를 많이 보면서 또래보다 더 성숙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남의 삶을 보고 배우는 것이더라도 나에겐 하나하나 교훈으로 다가왔다. 전주에서는 전주국제영화제가 마침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첫 회가 개최됐다. 이 역시 영화와 나의 운명적 만남이 아닐까. 중학교 때는 혼자 돌아다녀보지 못해서 선뜻 버스를 타고 영화제에 갈 수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이후론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계속 참가하고 있다. 하필 전주영화제 기간이 학교의 중간고사 기간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지만, 나는 시험에 아랑곳 하지 않고 늘 영화제에 참석했다. 그 모든 것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가 던져준 현재를 즐기라는 메시지 아래 행해졌다. 고등학교 때는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어서 중학교 때만큼 영화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말이 되면 꼭 비디오를 빌려보고 극장을 찾아 영화를 즐기곤 했다. 단순히 영화를 즐기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나는 내가 사는 곳에 생기는 영화관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전주영화제 덕분에 전주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한국의 4대 멀티플렉스라고 불리는 극장들이 전주에 모두 들어왔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메가박스는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정말 많이 방문했다. 처음 생겼을 때는 운영과 관리 측면에서 미숙한 점이 많이 보여서 꾸준히 고객엽서 카드를 쓰면서 좋은 의견을 제시했다. 그런 노력이 결국은 복이 되어 돌아왔다. 메가박스에서 벌인 이벤트에서 내가 1등으로 당첨되어서, 100일 영화 무료 관람권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 때 관심의 힘을 새삼 깨달았다. 특정 대상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애정을 보이면 좋은 결과가 찾아온다는 사실. 좋은 일이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 그 관심은 순전히 내가 좋아서 보인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가 있다. 100일 무료관람권에 당첨 됐을 때는 너무나 기뻐서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모두 그 사실을 알리고 다녔다. 엄마도 그것이 행운이 아니라 나의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는 말을 해주셨다.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영화를 둘러싼 이외의 것들까지도 날 행복하게 만들어서 너무나도 감개무량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난 행복이라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진지하게 행복에 대해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 시절엔 행복을 정확히 내가 주무를 수 있을 정도로 다루진 못했지만, 나의 행복 곁엔 항상 영화가 함께 있었다. 서울로 대학을 와서도 영화에 대한 사랑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온라인을 통해 한 영화동호회를 가입하게 되고, 그 사람들과 함께 극장을 다니면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열심히 활동해서 결국 운영자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 한해 동안 극장에서 본 영화는 모두 180여 편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본 것이다.

그 뒤로 난 한 해에 꼭 영화 100편씩 보자는 다짐을 했다. 영화감독의 꿈은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잠시 뒤로 미루어 두었다. 하지만 그 꿈은 아직도 유효하다. 난 제임스카메론 감독처럼 미국의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감독상을 거머쥐고 싶다. 눈을 감고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면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감이 생긴다.  영화는 내가 팝에 이어 두 번째로 발견한 인생의 즐거움이다. 새로운 영화가 일주일 마다 극장에 바뀌어 걸리는 한 내 인생은 늘 새로움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진을 만나다

첫 번째 발견은 음악이었고, 두 번째 발견은 영화였다. 음악과 영화 모두 다른 사람의 창작물이다. 그래서 창작자와 그걸 감상하는 나는 일방적이고 수동적이 관계가 되어버린다. 나에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취미가 필요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세 번째로 발견한 나의 보물은 바로 사진이다. 그저 다른 사람의 사진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진을 찍어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에 대한 사랑은 중학교 3학년 때 시작 되었다.  나는 엄마께 디지털 카메라를 무척 사고 싶다고, 합리적인 이유를 대가면서 디지털 카메라를 사야 되는 이유를 말씀하셨다. 언제나 그랬듯 어머니께서는 디지털 카메라를 사주셨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사진을 찍기 시작한 나는 사진의 역사라든가 사진의 기초 같은 것들을 전혀 배우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피사체를 화면 안에 넣고 사진에 담을 뿐이었다.  디지털 카메라를 산 이후로 나의 모든 관심은 카메라에 쏟아졌다. 중학교 3학년이라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해야 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진을 찍는 일에 더욱 열중했다. 당시엔 디지털 카메라가 보편화되기 이전이었으니까, 나는 꽤나 학교에서 선두주자가 되었던 셈이다. 나는 중학교 친구들과 정말 많은 사진을 찍었고, 포토샵으로 사진을 편집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셔터만 눌러 대던 나는, 사진을 찍으면서 점차 좋은 사진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발견해 나갈 수 있었다.

나에게 좋은 사진이란 꾸밈이 없는 사진, 자연스러운 사진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뭘 모르고 과도하게 편집했던 사진들이 나중에는 정말 보기 안타까울 정도였다. 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전라북도의 디카 동호회 JBDICA라는 곳에도 가입해서 사진도 올리고 열심히 활동을 했다. 중학교 때 수만 장의 사진을 찍으면서 스스로 쌓아간 실력 덕분에,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제법 사진을 잘 찍는 다는 소문을 내고 다닐 수 있었다. 마침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나처럼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있고, 사진에 관심이 많은 친구와 만났다. 그 친구는 나보다 사진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기계 쪽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브랜드 별로 출시된 디지털 카메라의 모델명을 모두 꿰뚫기도 했다. 이후엔 디지털 카메라 시장이 엄청나게 커지면서 외우는 걸 포기했다. 나는 그 친구를 통해 사진 실력을 향상 시킬 수 있었고, 같이 사진을 찍으면서 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진을 찍으면서 놀다가 나중에 두 친구와 더 뭉치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디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역시 사진을 찍으면서 친해졌다.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져서 고등학교의 사진동아리를 만드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린 그 자리에서 바로 모임을 결성하고, 이름까지 FOCUS라고 지어버렸다. 그 이후 나의 고등학교 1년은 끝날 때까지 포커스 친구들과 함께 했다. 개성 만점이 FOCUS 친구들 덕분에 나의 고등학교 1년을 무척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반 친구들은 물론 다른 반에서도 우리 FOCUS의 이름이 조금씩 들렸다. 하지만 비공식 동아리였기 때문에 거의 우리 네 네 명의 친목 모임에 가까웠다. 하지만 고등학교가 끝날 때까지 나는 FOCUS의 이름을 잊지 않고 살았다.

사진은 나에게 많은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음악과 영화는 내가 행복을 받을 수 있는 통로고, 사진은 내가 직접 행복을 만들 수 있는 통로다. 친구의 사진을 찍어주고서 결과물이 만족스러울 때의 그 행복감은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은 나도 기쁘고, 잘나온 사진을 갖는 친구도 기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그 두 시선의 차이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창작해낼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느끼는 데에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고, 그 중에서도 사진은 누구나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창작의 길이었다. 글을 쓸 때처럼 곰곰이 생각할 필요도 없고, 작곡을 할 때처럼 멜로디를 머릿속에 그릴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피사체에 사진기를 대고 셔터만 누르면 새로운 창작물이 나오는 것이다. 다른 창작에 비해 고통이 너무 안 들어가서 정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지적될 수도 있지만, 사진은 노력 투입 대비 행복 산출이 매우 큰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내가 찍은 사진들은 온라인 게시판에 올리거나, 콘테스트에 많이 응모했는데, 콘테스트에서 꽤나 많은 상품을 받았다. 포탈사이트 네이버에서 졸업사진 콘테스트를 열어서 사진을 응모했을 때는 4위를 해서 MP3플레이어를 받은 적도 있고, 가장 큰 디지털카메라 사이트인 디시인사이드라는 곳에 사진을 올려서 '오늘의 사진'으로 뽑혀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사진을 보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느낀 건 사진이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느낌이었다. 사진이 찍기 전까지는 나는 운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진을 찍고부터는 여러 가지 콘테스트에도 당첨이 되고, 멋진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 지고, 동호회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으니 말이다. 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진을 찍는 순간만큼 행복한 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사진은 나에게 무척 긍정적 마인드를 정착 시켜주었다. 사진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의 속속들이를 발견해낼 수 있었고, 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것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해주었다. 내가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꺼내서 보면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거기에 배경음악까지 깔리면 정말 판타스틱한 여행이 돼버린다. 꾸밈없고 가식적이지 않는 사진을 좋아하지만,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는 정지화상을 통해 한 사람의 꾸밈을 혹은 가식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잘 웃지 않고 묵묵한 사람이 딱 한번 웃는 순간 그 표정을 포착하면 전혀 다른 모습의 이미지가 창출되는 것이다. 잘 웃지 않는 사람도 그 사진을 보면서 '내가 웃으면 이렇게 좋아 보이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이어 대학교에 와서까지 나는 영화를 좋아하고 사진을 잘 찍는 애로 통했다. 대학교에 들어와 늘 꿈꾸던 사진 동아리에 가입하고 열심히 활동했지만, 한꺼번에 많은 동아리를 들은 바람에 사진동아리를 포기하고 과 내의 동아리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과 동아리에서 엠티를 가거나 행사가 있으면 늘 내가 사진사가 되어서 사진 찍는 일을 도맡아 했다. 사진 찍는 일을 도맡아 하면 그 단체 사진에는 내가 들어갈 수 없게 되지만, 그것에 대한 아쉬움은 이미 고등학교 때 정리를 했었다. 같이 사진을 찍히는 것도 좋지만 다른 이들의 추억을 내가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기쁨을, 사진사는 그 기쁨을 가진다. 여전히 난 사진기를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주위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나와 그들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스무살의 자서전 #2 시골 소년 뛰어 놀며 자라다

스무살의 자서전 #2
시골 소년 뛰어 놀며 자라다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
큰 세계로 첫 발을 내딛다


시골 소년 뛰어 놀며 자라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전라북도 완주군의 작은 시골마을, 홍개라는 곳이다. 약50여 가구가 있었던 것 같다. 마을 앞뒤로는 야산이 있었고, 좀 떨어진 곳으로는 작은 천이 흘렀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시골마을 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가족처럼 함께 어울려 지냈고, 마을의 아이들 또한 그랬다.

마을은 우리 꼬마들이 지켰다. 우리들은 항상 같이 어울려서 지냈는데,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면 다시 뭉쳐서 오늘은 뭘 하면서 놀까 라는 고민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요즘 도시의 아이들이 조기에 한글을 익히고, 여러 가지 학원을 다니는 것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우리가 하는 놀이는 모두 동네의 형들에게서 배우는 것들이었다. 겨울이 되면 마을에 버려진 빈 분유통을 찾아서 쥐불놀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 아침을 먹고 놀기 시작해서, 점심때가 되면 다시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다시 모여서 해가 지기 전까지 계속 놀았다. 당시 마을이 윗동네와 아랫동네로 나눠져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때 당시에는 굉장히 멀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아랫동네 사는 나로서는 윗동네 애들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결코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우리 형제와 가장 친했던 친구 역시 다른 집의 두 형제였다. 우리와 나이도 비슷했다. 늘 새로운 놀이를 원하고 매일 뛰어 놀던 그 때. 그 때는 행복이 무엇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테니 말이다.

시골에서 뛰어 놀던 나의 유년시절은, 학습지를 풀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었고, 한글을 빨리 깨우치기 위해 혼나지도 않았고, 나의 적성에 맞는 특기를 찾느라 여러 학원을 헤매지도 않았다. 산과 들을 나의 무대로 삼아 열심히 뛰어 놀 수 있던 시골의 환경 덕분에 나는 스트레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건강하고 즐거운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뛰어 놀기만 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어렸을 적부터 한글을 깨치기 위해 노력한 아이들과 똑같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뿐이다./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

정들었던 고향, 홍개를 떠나 그리 멀지 않은 곳 이서라는 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똑같은 시골이었지만 이사를 간 곳은 면의 소재지 이었고, 홍개에 비하면 슈퍼도 있고, 초등학교 중학교도 있고, 여러 가지 학원도 있을 만큼 발전한 곳이었다. 이 이사는 작은 곳에서 더 큰 곳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였다. 이 순간부터 내 인생의 목표가 암시되는 듯 했다. 물론 그 어릴 적에는 나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홍개에서 정말 가깝게 지냈던 형제 같았던 친구들과는 멀리 떨어지게 돼서 더 이상 함께 뛰놀 수 없게 되어서 많이 아쉬웠지만, 이서에는 더 많은 친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서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이서초등학교에 속해있는 이서 병설 유치원에 들어가 1년간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당시까지 한글을 알지 못했던 나는 그 때부터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고 정말 다양한 아이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때도 지난 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게 나는 열심히 뛰어 놀았다. 유치원 옆에 있는 놀이터라는 곳은 새로운 놀이의 소재가 되어주었고, 그곳에 데려만 놓으면 하루 종일 놀 수 있을 정도로, 우리들은 다양한 놀이들을 스스로 만들면서 놀았다. 그 유치원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모두 다 같이 같은 초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이서초등학교에는 멀리서 어린이학원을 다니다 온 친구들까지 만날 수 있었다. 엄마 손을 잡고 넓은 초등학교의 운동장에서 입학식을 했던 기억이 아주 흐릿하게 남아있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엄마는 나를 피아노 학원을 다니게 해줬고 그로부터 3년 동안은 학교가 끝나면 매일 피아노 학원을 가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내가 긴장했었을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처럼 나는 새로운 다짐을 가지고 시작했을까?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런 다짐을 가지고 초등학교 입학을 했다면 난 천재였을 테지만, 난 천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거 하나는 정확히 생각난다. 선생님께서 책을 나눠주실 때의 그 설렘. '읽기', '말하기와 쓰기', '즐거운 생활', '슬기로운 생활', '바른 생활', '산수' 교과서 책상 위에 쌓여갈 때 정말 기뻤다. 앞으로 무엇을 배우게 될까라는 흥분 속에서 책 전체의 그림들을 훑어보았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의 마음가짐이 늘 초등학교 때와 같다면, 정말 즐겁게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중학교에 올라가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새 책을 받는 것이 즐거움만은 아니었다. 책을 열어보자마자 ‘이제 이렇게 어려운 걸 배워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 먼저 하고는, 입을 쩍 벌리곤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에는 배운다는 것은 오로지 세상을 알아가는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지금의 나의 모습, 배움의 즐거움을 약간 잃어버린 나에게 뭔가 말을 해주고 있는 것 같다. 배움의 즐거움을 꽤나 일찍 깨달아서였을까. 나는 시험을 보면 전부 다 맞히거나, 늘 한두 개 정도만 틀렸다. 그래서 이서초등학교에서는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다. 바로 한 학년 위였던 형도 계속 전교 1위를 했으니, 우리 두 형제는 공부를 잘 한다고, 학교는 물론 동네에 까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피아노 학원을 다닌 것 외에는 다른 교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피아노에는 꽤나 소질이 없었던 것 같다. 3년 동안이나 다녔지만, 학원을 그만두자마자 모두 잃어버린 걸 보면 말이다. 피아노 학원까지 끝나고 나면 또 다시 놀이가 시작된다. 어렸을 적 보다는 좀 더 수준이 높아진 놀이들을 만들었다. 누가 가르쳐 준 놀이들을 하는 것이 아니었고, 모두 우리가 만들어 낸 것들이었고, 우리가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가면서 하나의 놀이로 완성해갔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놀기도 하고, 친구 집에 가서 놀기도 하고, 동네의 논과 밭에서 놀기도 하고, 동네의 형들과 자전거를 타면서 놀았다. 동네엔 형들이 굉장히 많았고, 우리의 놀이 사업은 정말 조직적으로 탄탄했고, 함께 놀자고 부르기만 하면 언제나 달려 나갔다. 교과과정을 따라가기엔 전혀 문제없을 정도로 학업 쪽은 수월했고, 노는 것도 전혀 소홀하지 않았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축구를 무척 좋아했었다. 학교가 끝나면 꼭 축구를 한 게임씩 한 것 같다. 친구들에 비해 썩 잘하지는 않았지만, 공에 집착을 보여 끝까지 따라다니는 것 하나는 잘 했다.

축구 보다는 내가 소질을 보인 쪽은 미술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인가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다. 교내에서 상상화 그리기 대회를 하면 나는 꼭 상을 타곤 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상상력이 좋다고 말씀해주셨다. 3학년 때는 우리 초등학교로 전문 미술 선생님이 오시게 되었는데, 나는 그 선생님에게 눈에 띄어 좀 더 체계적으로 미술을 교육받기 시작했다. 그 선생님은 학교 내에서 미술에 소질 있는 사람을 뽑아 미술대회팀을 만들었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는데 다달이 한두 대회는 꼭 참가했다. 높은 순위의 상들을 받지 못하고, 늘 장려상이나 입선 정도에 머물렀지만, 나의 실력에 그 정도의 상들을 받은 것에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특출 나게 잘하는 사람을 따라갈 정도는 못 되지만, 일반 사람들에 비하면 잘 하는 정도. 그게 내가 계속 존재해 온 위치이다. 그리고 늘 만족했다. 미술대회에서 상장을 받아오면 선생님들과 부모님께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아마 그 때 내 꿈은 화가였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재밌었고, 멋진 작품들을 보면서 화가의 꿈을 키웠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는 꿈을 한 가지만 가져서는 안 되는 법이다. 나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과학에 무척 많은 흥미를 보였고 나는 호기심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초등학생들은 호기심을 많이 가지고 있기 마련이고, 모두가 과학자가 되고 싶은 꿈을 한 번씩 품는 것 같기도 하다. 교내 미술팀에서 나의 실력이 인정받을 정도로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미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 받았고, 대회를 위해 미술선생님의 소개로 화원에서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학교에서 한 사람만 참가할 수 있는 대회에 내가 2년 연속으로 나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그 당시에 미술선생님께서 왜 나를 밀어주셨을까? 결국 내가 걸어온 길도 그와는 약간 길이 멀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 미술선생님께서 주신 선생님의 사랑으로, 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미술 실기 성적은 항상 최상급이었다. 여자 아이들보다도 밑그림 실력과 채색 실력이 뛰어나서, 친구들이 늘 미술학원을 다닌 적이 있는 거냐며 물었다. 눈에 띄지 않는 적당한 실력을 소유하고 있고, 자신이 그것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실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만 한다면 분명 튀게 돼있다. 초등학교 때의 미술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그런 교훈을 주신 것 같다. 학교에 미술 선생님이 아니라, 음악 선생님이 오셨다면, 그리고 따로 음악 교육을 받았다면 난 아마 남들보다 나은 음악 실력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이 축구공을 차고 있을 때, 나는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거나,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인지,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공을 차는 것에 실력을 잃어갔다. 역시나 어느 한 가지 일에 시간과 관심을 놓치게 되면 그 일에 대한 실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법이다.

공부를 잘 하면서도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 그리고 착한 아이. 이것이 나의 초등학교 시절 나에게 붙여진 수식어였다. 한 학년에 약 50여명이 있는 곳에서 1등을 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공부를 잘 해서 1등을 하는 것이지, 사람이 적어서 1등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서초등학교는 좁은 시골의 작은 학교였을 뿐이다. 사람이 적은 이서초등학교에서는 전교에서 벌어진 일이 몇 시간 뒤면 전교생이 모두 알게 되고, 한 사람의 일에 전교가 떠들썩 하곤 했다. 그리고 몇 학년에 누가 전학을 왔느니 하면, 그 학년뿐만 아니라, 전교의 모든 학년이 전학생에게 관심을 두었다. 같은 학년의 친구들은 물론이고, 전 학년의 이름을 외울 정도로 서로 사이가 가까웠다. 1학년 때 만나게 된 친구를 몇 년 동안 계속 같은 반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사이는 정말 가까웠고, 그 친구의 모든 것을 알 정도였다. 어린 나이여서 그런지 우리들은 별로 큰 일이 아닌 일로 싸움도 많이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큰 일이 아니지, 그 당시에는 정말 심각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도 누구를 죽이네 살리네 하는 심한 말들을 했었을 것이다. 또 한 번 마음이 틀어지면 다시 화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무척 오래 걸렸다. 그 때는 정말 사소한 일들에 상처를 크게 받았을 것이다. 나도 모든 친구들을 수용하진 못하고,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을 두어 그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같은 마을에 살았던 친구들 두 명이 있었는데, 우리는 스스로 삼총사 모임을 결성했고, 정말 모든 일을 함께 했을 정도로 가까웠다. 하지만 그 중에 한 명이 시내로 전학을 가게 됐고, 나도 나중에 전학을 가게 되어 죽마고우의 우정은 끝까지 이어갈 수 없었다. 지금도 그 친구들을 무척이나 보고 싶다. 그 친구들을 만나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 천진난만하게 놀 수 있을 것만 같다.

초등학교 때의 추억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끝없이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인센티브 제도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아시는 분이셨다. 선생님께서는 시험을 잘 보거나, 숙제를 잘 해오거나, 일기의 문장력이 좋거나 하면 사탕을 선물로 주셨다. 사탕은 늘 다양한 맛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공짜 사탕을 얻기 위해 늘 혈안이 되었다. 나 또한 사탕을 많이 받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었다. 선생님께서는 기업의 인센티브를 알고 계셨던 듯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우리 반의 말썽 일으키는 친구를 늘 바로 잡기 위해 엄청 시간을 많이 할애하셨다. 너무 그 친구에게만 신경을 써서 오히려 다른 아이들은 많은 관심을 많이 받지 못했다. 내 기억에도 3학년 때의 기억은 매우 조금 뿐이다. 4학년 때의 담임선생님께서는 신실한 기독교 신자이셨는데, 우리를 위해 많은 눈물을 흘리시고 정말 많은 기도를 해주셨다. 그 선생님께서도 학교 단체 생활에 적응을 잘 못하거나 비뚤어진 아이들을 바로 잡기 위해 애를 많이 쓰셨다. 학교가 끝나도 퇴근 하시지 않고, 그 아이들과 대화를 하면서 늘 기도를 해주셨다. 그 선생님께서는 몇몇 아이들에게 그 친구들과 더욱 더 가까이 지내라는 부탁도 하셨다. 그 선생님께서는 진심으로 우리를 위하셨고, 우리들이 바로 자라나길 원하셨다. 초등학교 선생님 중에서 가장 많은 기억이 남는 분 또한 그 선생님이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꼭 찾아 뵙고 싶은 은사님이시다. 그리고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을 이서초등학교에서 1년을 더 보내고 6학년 때 시내의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큰 세계로 첫 발을 내딛다

초등학교 5학년이 마칠 무렵 나는 부모님께 한 가지 부탁을 드렸다. 시내에 있는 학교로 가서 좀 더 많은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린 것이다. 부모님께서는 흔쾌히 허락을 하셨다. 내가 만약 이서초등학교에서 끝까지 있으면 늘 상위권에 앉아 있는 그 성적으로 안주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버스로 약 20분 거리에 떨어진 시내의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이서초등학교를 떠날 때는 그 동안의 추억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서 정말 많이 슬펐다. 도시의 학교를 처음 다니게 된 나는 처음에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의 학교에서는 전교생이 200명뿐이 되지 않아서 같은 학년의 친구들을 물론이고, 다른 학년의 형 동생들까지도 알 수 있었고, 서로서로 친하게 지냈었다. 하지만 전학을 간 학교는 한 반에 인원이 40명, 1학년에서 6학년까지 통틀어서 모두 60반이 넘었다. 전학을 간 나로서는 우리 반 친구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도 힘들었는데, 다른 반 애들을 안다는 것은 무리였다. 2000명에 가까운 애들 중에서 내가 알고 있는 건 고작 40명뿐이라는 사실은 나를 외롭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처음에 적응이 어려웠던 것은 바로 치열한 경쟁이었다. 시골의 초등학교에서는 시험을 보고 난 후 그냥 자기의 점수를 알게 되면 다른 친구들과의 점수를 비교해가면서 자기의 등수를 스스로 알아내는 것이었는데, 도시의 초등학교에서는 반에서의 자기의 등수와, 그리고 반끼리의 등수까지 나왔다. 한 학년에 많아야 두 반이었던 시골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시골에서는 누구는 몇 등이고, 누구는 몇 등이냐가 전혀 중요한 얘깃거리가 아니었을뿐더러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누구는 공부를 많이 잘하고, 누구는 좀 잘하고, 누구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정도로 나뉠 뿐이었다. 도시로 전학을 간 나는 자연스레 나의 등수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공부의 시간도 늘려갈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초등학교는 첫 이미지는 매우 차가웠다.

하지만 결코 안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골에서는 경험하지 못했을 여러 가지 것들을 경험하고, 여러 가지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원이 참가하는 운동회도 신기했고, 교생선생님들께서 학교로 교생실습을 나오시는 것도 무척 신기했다. 그리고 도에서 지원하는 과학영재교실이라는 곳도 참가할 수 있는 기회도 주워졌다. 경쟁적이기는 했지만 누구나가 경쟁적인 것은 아니어서, 기회를 얻으려고 조금만 노력한다면 모두 얻을 수 있었다. 난 결코 도시의 아이들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난 반에서 5등 안에 들었다. 그리고 그 등수는 늘 내 뒤를 따라다니게 되었다. 노력을 해서 얻은 결과고 나는 늘 그 정도의 성적에 충분한 만족을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께 나는 많은 사랑을 독차지 받았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나를 나중에 사위를 삼고 싶다는 말씀을 심심치 않게 하셨다. 전학을 간 학교에서도 많은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친한 친구들을 둘 수 있었다. 그 중 한 친구는 노래를 정말 잘 불러서 가수라는 소리를 듣는 친구도 있었고, 한 친구는 컴퓨터 게임을 정말 잘했다. 아쉬운 점은 반의 인원이 40명이나 되다 보니 모두가 하나 같이 친하게 지내는 것은 힘든 점이었다. 시골초등학교에서는 같은 반이 되면 무조건 친구가 돼서 잘 지냈고 다른 반의 아이들과도 단합이 잘 되는 편이었지만, 많은 인원 속에서는 당연히 끼리끼리 친한 친구들끼리 파가 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직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질수록, 경쟁이 심한 환경일수록 서로 간의 끈끈함과 따뜻함을 잃어가는 사실을 무척 빨리 체험했다. 또 내가 그런 현상을 막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그냥 그 조직에 적응해야 된다는 것도 알아버렸다.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에서 보낸 초등학교의 마지막 1년은 금세 지나갔다.

그렇게 시골의 이서초등학교에서 5년을, 도시의 초등학교에서 1년을 보낸 뒤 나는 중학교로 진학을 하였다. 아마 그 비율이 4년:2년 이거나 3년:3년 이었다면 아마 내 인생의 태도에 변화가 있었을 것이고, 내 인생이 변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경쟁이 심했던 환경에서 자랐다면 난 분명히 무척 경쟁적인 사람이 됐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우열을 비교하고, 조직에서 너무 앞으로 나아가려는 삶은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시골의 학교에 계속 다니면서 경쟁이 무엇인지 경험해보지 못하고 우물 안에서 나의 위치를 만족하면서 컸더라면 나는 지금 이 시대에서 경쟁력을 갖춘 사람이 되지 못했을 일이다. 경쟁보다는 협동이 있고 서로 노력하는 환경에서 5년을 보내고, 경쟁이 치열하고 뒤쳐지지 않기 위해 늘 노력해야 했던 1년을 보낸, 그 조화 덕분에 나는 현재의 매우 적당한 경쟁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 적당한 비율이었던 것 같다./

스무살의 자서전 #1 엄마와 가족의 사랑 속에서 자라다

스무살의 자서전 #1
엄마와 가족의 사랑 속에서 자라다
아버지 그 듬직한 이름
자랑스러운 우리 형


엄마와 가족의 사랑 속에서 자라다

큰 아버지는 아들만 하나, 나의 아버지는 아들만 둘, 그리고 고모네도 아들만 둘. 나는 아들만 있는 집안에서 위에 형을 하나 두고 둘째로 태어났다. 그렇지만 아들만 있는 집안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딸 역할을 하는 아들로 통했다. 엄마는 나의 태몽이 감이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흔히 감은 딸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태어날 때까지 딸일 것이라고 생각했지, 아들이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읽어서였을까? 나는 가족들에게도 친척들에게도 그리고 이웃들에게도 아들이 딸 역할을 참 잘한다는 말을 무척 많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 말을 들어서 그런지, 나는 으레 딸처럼 행동하려고 더 노력했다. 무엇보다 나는 엄마와 마음이 통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엄마와 더욱 궁합이 잘 맞으려면 내가 딸이 되어야 했다. 그렇다고 집안에 앉아 인형을 가지고 논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나가서 뛰어 놀기를 좋아했고, 칼 싸움하기를 좋아했고, 로봇 만화를 정말 좋아했다. 내가 딸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하고, 엄마와 계속 붙어 있으려고 했기 때문이지, 여자아이들의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주위 친척들이 말하길 내가 아주 갓 난 아기였을 때부터 엄마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 한시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고, 잠시라도 엄마가 눈에 안보이면 그렇게 떼를 썼다고 한다. 그건 다 엄마의 사랑이었던 것 같다. 엄마가 나를 진심 어린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에 엄마를 사랑하고, 내가 엄마와 진정으로 교감을 이룰 수 있는 딸이 되고 싶어 했던 것을 아닐까.
나는 어려서부터 엄마를 너무나 좋아했었다. 세상의 모든 어린 남자 아이들이 그랬겠지만, 나는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했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유년시절에 엄마의 크나큰 사랑을 먹으면서 컸기 때문에 나는 살면서 한번서 방황이라는 것을 해보지 않았다. 그저 집이 좋았고, 집이 최고였다. 나이를 먹고 커갈수록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 갔지만, 그래도 나의 마음의 중심엔 우리 가족이 있었다. 집을 너무 좋아하고 가족과 함께 하는 걸 좋아해서 그런지 나의 지금까지 인생에서는 이렇다 할 격정의 시기가 전혀 없다. TV속에 나오는 가출청소년이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청소년, 물놀이에서 사고를 당하는 애들 소식은 아주 머나먼 나라의 얘기였을 뿐이다. 집에서 넘치는 사랑 때문에, 나는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드라마틱한 소년시절을 보내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기도 하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나에게 어머니의 넘치는 사랑과 나의 집은 나를 올바르게 자라게 해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만약 엄마의 사랑이 없었다면, 가족의 사랑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늘 초등학교를 다닐 때와 중학교를 다닐 때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다. 우리 집은 논 가운데 길을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있었는데 나는 집이 가까워오면 크게 "엄마!" "엄마!"를 외쳤다. 엄마가 창문을 열어 볼 때까지 크게 외쳐댔다. 창문이 열리는 게 보이면 나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엄마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어 댔다. 1분 뒤에 집에 도착하면 바로 엄마를 볼 수 있을 텐데, 나는 1분이라도 엄마를 빨리 보고 싶어서 크게 불렀던 것이다. 창문이 열리지 않으면, 혹시 엄마가 어디 나가셨나 라는 생각 때문에 허겁지겁 집에 달려왔다. 엄마가 없으면 난 참을 수 없이 기운이 안 나고 몸에서 힘이 쪽 빠져버렸다. 외출하실 땐 보통 어디에 간다라는 쪽지를 남기고 외출하셨지만, 그 쪽지라도 없는 날에는‘엄마가 어딜 가셨지’라는 생각을 하며 걱정을 했다. 집이 있다지만 엄마가 있지 않은 집은 향기를 잃어버렸다. 멀리서 집을 바라보면 왠지 엄마의 향기가 느껴질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는데 거짓말 같게도 그런 생각이 들어맞는 때가 많았다.

난 어려서부터 유달리 건강했다. 그런데 나는 건강한 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제론 운동신경이 나보다 뛰어나고, 체력도 좋은 형은 오히려 나보다 감기를 잘 걸렸다. 어렸을 때도 형이 아파서 소아과에 갔던 기억뿐이지, 내가 아파서 소아과를 간 기억은 드물다. 어릴 적 나에게 아프다는 것은 곧 가족의 걱정과 사랑을 배로 받는 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감기에 쉽게 걸리고 체질적으로 약한 형은 나보다 가족의 사랑을 많이 받는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난 왜 아프지 않는 거야’ 라고 속으로 투덜거릴 때도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자주 아픈 형이 미운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형이 심하게 감기에 걸려서 체육관을 갔다가 아픈 몸을 이끌고 집으로 온 적이 있었는데 정말 나도 마음이 아팠다. 어쨌든 어린 나이의 나는 형에 비해 체질적으로 건강했고, 그 만큼 형에게 사랑을 뺐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번은 내가 배가 아파서 호되게 고생한 적이 있었다. 엄마는 내가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늘 말씀하셨다. 음식을 잘못 먹었던 탓인지 밤을 설쳐가면서 화장실을 오갔다. 그 때 엄마는 밤새도록 내가 화장실을 갈 때마다 화장실을 따라와 배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리고 홍역을 앓았을 때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모두 해주셨다. 그런데 정작 아플 때는 정말 아파서 엄마가 고생하는 것도 모르고 나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몸이 약하고 아파서 관심을 받고 사랑을 받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지금도 감기 기운이 살짝 보이거나, 감기에 걸리면 가장 먼저 엄마한테 전화한다. 크게 아프지도 않은데도 감기에 걸렸다는 소식을 알린다. 아직도 어린 시절처럼 아픈 것을 이용해 사랑을 더 받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깨달을 나이도 됐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님의 마음은 더 아프다는 것. 아프기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을 더 간절히 원하고, 부모님은 사랑을 주면서도 마음을 더 아파하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부모님이 날 걱정해주길 바라는 나의 모습에서 나는 부모님을 따라갈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진심으로 엄마를 좋아했고, 진심으로 아빠를 좋아했고, 진심으로 형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항상 우리 가족들을 모방하려고 노력했다. 가장 많이 따라 한 것은 역시 엄마다. 내가 아빠를 더 좋아하고 따랐더라면 아빠와 성격이 비슷했겠지만, 나의 성격은 엄마와 무척 흡사하다. 인생에 대한 가치관부터 해서 삶 속에서 여유를 찾는 방법 까지도 엄마를 따라 한다. 좋아하는 음식도, 좋아하는 음악도, 좋아하는 사람 스타일까지도 닮았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겠지만, 우리의 가족은 내 삶의 영원한 동반자가 돼 주고 좋은 삶의 지표를 제시해줄 것이다. /

아버지, 그 듬직한 이름

나의 아버지께서는 농부이시다. 완주군 이서면 이라는 곳에서 농사를 지으신다. 주로 벼농사를 지으시고 그 외에 계절별로 여러 채소 농사를 지으신다. 시골에서 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나의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운 생각 같은 것이 없었다. 나의 아버지도 내 친구들의 아버지도 모두 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골에서 좀 큰 도시의 학교로 전학을 갔을 때부터 나의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도시 친구들의 아버지들께서는 모두 직장을 다니시거나 사업을 하셨지만, 나의 아버지께서만은 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직업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것을 꺼려했다.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친구들 앞에선 그런 얘기를 하는 게 힘들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생각이 깊어지면서 내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나를 길러주신 것은 모두 아버지께서 힘들게 농사를 지으신 결과라는 것. 고등학교 때는 기숙사에 들어가서 살았는데, 부모님과 따로 떨어져 지내면서 나를 위해 고생하시는 부모님에 대해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때. 나의 친형은 대학교에 입학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나도 형의 대학 입시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온 형은 우수한 성적 때문에 고등학교에서 스카우트를 해갔다. 형도 그 학교의 기숙사에 들어가서 지냈고, 부모님은 바로 옆에서 형의 학업에 대해 관여할 수가 없으셨다. 다만 집에 오는 날이면 맛있는 음식을 꼭 해주시고, 학교생활에 필요한 용돈을 꼬박꼬박 챙겨주셨다.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던 우리 형은 서울대에 들어가게 됐다. 그리곤 우리 동네엔 현수막이 걸렸다. 작은 동네라서 큰 자랑거리가 될 만한 거리였다. '서울대 합격' 이라는 큰 현수막이 동네에 걸리던 날, 우리 부모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좁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서 자식 교육을 시킨 아버지로서는 큰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서울이란 대도시에서 비싼 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아무리 사교육을 받아도 넘기 힘든 곳이 바로 서울대의 문턱이다. 그 뒤로는 나는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었다. 물론 형이 열심히 공부한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다른 부모님들보다도 힘든 경제적 상황에서 자식 농사를 성공 시켰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아무리 기쁘거나 슬퍼도 감정 표현을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으신다. 우리들 뒤에서 그저 묵묵히 우리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계신다. 그 길이 잘 됐든 잘 못 됐든 일단은 우리가 가는 길을 응원해주신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말리신 적이 없다. 우리의 선택을 존중해주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에겐 늘 딱 한 가지만 부탁을 하셨다. '착하게만 자라라' 라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원하지 않으셨고, 남들보다 앞서 달리는 것도 원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묵묵하게 우리 두 형제를 밀어주었기 때문에 나와 형의 길이 더 수월해진 것 같다./

자랑스러운 우리 형

우리 집은 형제만 둘이다. 그것도 연년생이다. 우리 두 형제는 어렸을 때 엄청 사이가 좋았었다고 한다. 우리 둘이 한 번도 싸우지도 않고 너무도 친하게 지내서 동네 어른들이 어떻게 저렇게 사이가 좋을 수 있냐면서 칭찬을 했을 정도라고 한다. 어릴 적 일이라 기억이 선명하게 나지는 않지만 나는 형과 싸운 기억은 없는 것 같다. 형은 나보다도 훨씬 머리가 좋았다.  IQ테스트를 할 때는 엄청 높은 지수가 나와서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고,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에 가서도 전교 1등의 자리를 결코 놓친 적이 없다. 그에 비하면 나는 초등학교 때는 반에서 1등을 했지만,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는 반에서 5~6등 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상위권에 들어가고 싶은 욕심은 있었지만, 늘 노력해도 그 정도의 결과를 얻어냈던 것 같다. 공부하는 양을 비교하더라도 내가 우리 형에 비해 월등히 많았는데도, 형이 나보다 훨씬 결과가 좋았던 걸 보면서, 우리 형은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곧 그 결과는 서울대의 합격으로 드러났고 말이다.

나이가 먹고 우리 둘 다 커가면서 우리 사이는 예전만큼 가까워 지지 않았다. 형은 친구들과 노는 걸 좋아했고, 아빠의 성격을 닮아서 친구들과 같이 노는 걸 좋아했다. 커갈수록 형은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 나와,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적어진 것 같다. 형은 늘 집안의 장남처럼 듬직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동생인 내가 가지지 못할 진지함과 성숙함을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어느 한 수업시간에 자신의 유서를 써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 유서를 친구들 앞에서 낭독하는 것이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술술 써 내려갔다. 내 차례가 왔고 나는 내가 쓴 유서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 읽기 시작할 때부터 나의 음색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가족 얘기가 나올 때부터는 더 이상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형에게 쓴 부분을 읽을 때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자리에 서서 계속 울었고,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형한테는 이런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형, 그거 기억나. 형은 나보다 훨씬 공부도 잘하고 뭐든지 잘했잖아. 특히 나는 수학을 어려워했었는데 같은 방에서 공부 할 때면, 내가 모르는 문제를 형이 항상 잘 이해되도록 설명해줬지. 난 정말 형 같이 똑똑하고 좋은 형을 두어서 항상 자랑스러웠어.' 형이 집안의 장남으로서 공부와 노력을 게을리 하고, 삐뚤어진 길을 갔더라면 나도 그 길로 빠졌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늘 형처럼 공부를 잘하길 바랬고, 형을 보면서 많은 자극을 받아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다. 형은 나에게 좋은 모델이 되어줬던 것이다. 아버지를 닮아 육식을 좋아하고, 묵묵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운동을 좋아해서 나와는 취향 차이가 많이 나서 많이 가까워지는 것은 힘들지만, 언제나 사랑하는 형이다./

자서전을 쓴다고 시작하니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나의 가족들이었다. 내가 자라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나의 가족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늘 그들에게 내가 멋진 인생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2007년 10월 30일

상생의 길을 열다

<리더십과 동양고전 >에세이

상생의 길을 열다
우린 모두 하나로서 함께 살아간다

김선일

경영학과에서는 팀프로젝트를 자주 수행한다. 예전엔 팀프로젝트를 하면 능력 있는 조원들 속에서 묻어가곤 했지만 어느덧 나도 고학년이 되고서 조장을 맡게 되는 일이 잦아졌고 그러다 보니 리더십을 발휘해서 팀을 이끌지 않으면 안 된다. 팀프로젝트에서 중요한 것은 조원들 모두가 좋은 성과를 얻어내는 것이고, 그 성과라는 것은 좋은 학점이다. 같은 팀이 되었으므로 팀 모두가 힘을 합쳐서 한 사람이 했을 때보다 더 좋은 결과물을 나오도록 시너지를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경영학과에서 수많은 팀프로젝트를 수행해오면서 언제나 100%의 시너지를 발휘한 적은 거의 없었다. 팀원 개개인의 능력은 모두 제각각 이었고, 팀프로젝트에 대한 관여도 또한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누구는 반드시 좋은 학점을 받아야 하는 반면, 누군가는 굳이 좋은 학점을 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서 팀원들간에는 보이지는 않는 벽이 만들어지고 결국 소수의 사람이 팀프로젝트를 이끌어나가는 구조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대개 팀프로젝트의 결과에 대한 평가는 팀원 모두가 비슷한 수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열심히 참여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 같은 점수를 공유하게 된다. 만약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했을 때, 과정에 있어서 불공평함은 있었지만 마지막에 좋은 결과를 얻었으므로 이것은 상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해오는 과정에서 편법과 반칙이 있더라도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결과지상주의가 커다란 사회 문제로 작용해왔다.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편법과 반칙이 용인되다 보니 그로 인해 균등한 기회를 가지지 못했고,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정당한 몫을 돌려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의 욕구를 채우는 소비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전체적으로 국민의 생활 수준도 향상되었다. 그럼 과연 우린 상생의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을까.

상생이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상생의 길이란 함께 살아가는 길을 말한다. 여기서 ‘길’이라는 것은 과정을 말한다. 우리가 밟고 지나감에 따라 우리의 발자취가 그려지는 곳이며, 그것은 우리가 걸어 온 과거이자 앞으로 걸어나가야 할 미래이다. 그 길을 함께 걸어가자는 것이다. 길을 함께 걸어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누구의 발걸음은 빠르고 누구의 발걸음은 느리기 때문이다. 팀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어느 한 사람의 능력은 뛰어난 반면, 다른 한 사람의 능력은 뒤쳐지기 마련인 것과 같다. 태어날 때부터 좋은 환경을 가진 아이가 있는 반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아이가 있는 것과 같다. 대기업은 좋은 물건을 개발해서 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물건을 팔 수 있지만, 중소기업은 부족한 물적, 인적 자원으로 인해 시장에서 경쟁을 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을 비롯하여 이 세상의 모든 조직은 다르기 때문에 함께 걸어나간다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려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정말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이 존재한다. 누군가가 앞에서 끌어주거나 뒤에서 밀어주지 않으면 모두가 내일을 향해 걸어갈 때 항상 같은 곳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초등학교 때 나는 꽤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공부를 잘한다기 보다는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항상 잘 따라갔다. 초등학교 2학년, 구구단을 외울 때도 나는 반에서 다른 친구들보다 잘 외웠다. 하지만 몇몇 친구들은 구구단을 쉽게 외우지 못해서 쩔쩔맸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구구단을 외웠던 나로서는 그 친구들이 구구단을 왜 외우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우리반의 담임선생님께서는 반에서 구구단을 잘 외우는 친구들과 외우지 못하는 친구들로 나눠 서로 짝을 만들어주셨다. 잘 외우는 친구들이 한 사람씩 맡아서 친구들이 구구단을 외울 수 있도록 도와주도록 한 것이다. 나는 그때 ‘내가 선생님도 아닌데 이 친구들을 알려줄 수 있을까?’ 라고 의문이 들었다. 나도 특별한 요령 없이 반복을 통해 외우기만 한 것뿐이었으므로 그걸 내 짝에게 어떻게 알려줄지 정말 난감했다. 실제로 나는 가르치는 걸 무척 어려워했고 결국 내 짝이 내 생각대로 쉽게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자 난 어린 나이에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때 정말 내 짝에게 구구단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와 내 짝은 힘을 합쳐 열심히 외웠다. 결국 내 짝은 구구단을 모두 외우게 되었고, 우리 반 모든 친구들이 구구단을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어린 나이의 우리들은 그렇게 상생의 길을 걸었다.

상생의 길을 걷는 것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내가 발걸음이 느린 친구를 위해서 보폭을 좁히는 방법이 있다. 두 번째는 그 친구가 쉽게 따라올 수 있도록 손을 내밀거나 등을 밀어주는 방법이다. 보폭을 좁혀서 걷는 것은 발걸음이 느린 친구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고, 친구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함께 동반자가 되어 걸어가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린 세상을 더 따뜻한 세상으로 만들어간다. 따뜻한 세상이란 사랑이 있는 세상이다. 서양에서는 예수가 사랑을 말했고, 동양에서는 공자가 ‘인仁’으로서 사랑을 말했다.

공자는 인仁이란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원칙이고 구체적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자는 공손함, 관용, 신뢰, 영민, 은혜, 존경, 충성 등의 덕목을 실천하는 것으써 인간관계를 잘 맺는 것이 인이라고 하였으며, 이것은 “인으로써 정치를 하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라는 맹자의 인정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유학에서는 상생의 길을 걸어가는 방법으로서 수신을 강조한다.

인생은 무대와도 같다. 사람은 무대 위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많은 관계들을 형성한다. 사람이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지 않으면 관계들이 삐거덕거릴 것이다. 특히 천인관계라고 할 수 있는 자신과 자연의 관계, 혹은 인간과 사회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 자신과 사람들의 관계, 심신의 관계라고 할 수 잇는 자신의 생각과 행위 간의 관계 등을 잘 맺어야 한다. 수신을 통해 이 세가지 관계가 바르게 서면 사회에서 존경받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공자왈 VS 예수가라사대)

유교에서는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관계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갈고 닦는 것(修身養性)이야 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며, 그렇게 해야만 지도자와 기업가도 사회와 기업에서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해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사회의 관계는 서로 더불어 잘살 수 있을 때에만 사회의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점이다.

나아가 서로 더불어 잘 살기 위한 방법으로서, 공자는 己所不欲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을 말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이러한 황금률은 유교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중요한 교리로서 존재한다.

스스로 즐겁고 기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기쁘고 즐겁지 아니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불교)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 당하기를 원치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도 행하지 마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기독교)

위의 교리들은 우리가 상생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동서양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진리로서 자리잡고 있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간관계의 황금률을 수시로 잊어버리곤 하는 것 같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 혹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만 생각하는 이기주의로 곧잘 드러난다. 아직까지도 우리들은 길거리에 쓰레기를 너무 쉽게 던져버리지만 쓰레기를 줍는 것은 어려워한다. 자신이 좋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남을 경쟁에서 밀어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자신이 만든 창작물의 권리는 존중 받기 원하지만 다른 사람이 만든 창작물의 권리는 너무도 쉽게 무시해버린다.

팀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황금률 깨트리기 행동은 늘 미묘하게 작용한다. 어려운 역할은 조심이 피해가서 자신은 좀 더 비교적 쉬운 역할을 맡길 원한다. 그렇게 모두가 최소한의 노력을 들여서 공동 결과물의 좋은 성과를 원하다 보니 기대보다 낮은 결과를 접하기도 한다. 인간관계의 황금률이 쉽게 깨어지고 있고, 결과지상주의가 만연해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상생을 얘기할 수 있을까.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노여워하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공자는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을 이야기 하였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 것이 군자라고 하였다. 인간관계에서의 황금률이라는 것은 상호간에 지켜졌을 때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상대방이 그러한 나의 모습을 알아주지 못해도 노여워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모습이다. 팀프로젝트에서 남이 맡기 꺼려하는 것을 솔선수범으로 맡아서 하려 한다면, 모두가 자신이 그런 모습을 알아주지는 못하더라도, 스스로 더 나은 미래와 화합을 위해서 즐겁게 일을 해나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리더가 아닐까.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상생의 길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에겐 희망은 남아있다. 길이라는 것은 과거를 통해서 미래로 이어져있기 때문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갈등, 남자와 여자의 갈등, 진보와 보수의 갈등, 1%와 99%의 갈등, 사회 양극화, 등 소통 부재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지금 이 시기야말로 상생의 길을 열어나갈 때다. 또 상생의 길을 앞장서서 열어나갈 지도자가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백성이 즐거워하는 것은 즐거워하면 백성들 또한 윗사람의 즐거워함을 함께 즐거워하고, 백성의 근심을 걱정하면 백성들 또한 그 윗사람의 근심을 함께 걱정한다. 천하가 다같이 즐거워하는 것을 함께 즐거워하고, 천하가 다같이 근심하는 것을 함께 걱정한다. 그렇게 하고서도 왕 노릇을 하지 못할 사람이란 없다. (맹자, 양혜왕하)

우린 또한 우리가 속한 집단으로부터 상생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 스스로에게 공정의 잣대를 먼저 갖다 대고, 주위의 약자를 위해 손을 내밀어 주고, 타인을 존중하고, 자연을 소중히 하면서 우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함께 살아갈 때 세상은 더욱 따뜻해진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 가정, 학교, 국가, 전세계, 모든 자연과 우주 만물이 조화를 이루며 상생의 길을 걸어나갈 때 우린 더욱 따뜻해진다. 강과 바다가 둘이 아니고, 산과 들이 둘이 아니듯, 인간과 세계가 둘이 아니며 너와 나도 둘이 아니다. 우린 모두 하나로서 함께 살아간다.

「공자왈 VS 예수 가라사대」 차이더구이 지음, 知와사랑

2012년 6월 4일

네이트의 실시간 뉴스를 보는 단상

네이트의 실시간 뉴스를 보는 단상斷想
2012년 4월 18일

유독 네이버와 네이트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뉴스들의 노출빈도가 높아서 잘 안들어가려고 노력하지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들어와 뉴스나 보면서 숨을 돌려볼까라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네이트에 들어갔더니 결국 실시간 급상승 관심뉴스의 자극적인 제목들을 클릭 아니하지 못하고 모두 읽어버렸다.

우리 사회가 언제라도 한 번 조용한 날이 있었을까 하냐마는, 뭘 기대하고서 포털에 접속해서 기사들을 읽었는지 싶다.오늘 날짜 뉴스에는 10대들이 또래 여자를 살해하고 암매장했다는 얘기, 버스가 2시40분 늦게 도착해 관계자를 무릎꿇어 사과하게 했다는 '무릎녀'이야기, 얼마전 당선된 국회의원이 대필논문 논란으로 탈당한다는 얘기, 10대 학생이 괴롭힘을 당하고 자살했다는 얘기. 누구라도 그 제목만 보면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내용이 아닐까 싶다.
(모두 안타깝고, 분노하게 되고, 부정적인 내용의 기사들)

미디어는 이렇게 사회의 문제를 공론화시키고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한다. 오늘의 관심뉴스는 무엇인가 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뉴스창을 둘러보는 나와 같은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은 '이 기사', '저 기사'를 클릭하고 읽어내려가면서 결국 분노게이지만 상승시키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향한 분노. 그리고는 '이 나라는 안되겠다' '이 나라는 미쳤다' 라는 염세주의적 사고를 표출하기도 하고, 특정 인물에 대한 분노로 표출하기도 한다.

아래는 '10대들의 집단 구타-살해' 관련 기사에 달린 (베스트)댓글들이다.





모두들 '사형시켜라'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만큼 흉악한 사건이기 때문에 댓글들의 수위도 높은 점이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분노케 만드는 사건이다.  불특정다수의 말대로, 살인을 한 사람들을 사형시키고, 그리고 흉악범으로 클 것 같은 사람은 아예 싹부터 잘라버린다면 그럼 이 사회는 더 나아질까.  그때서야 그들의(우리들의) 분노가 좀 가라앉을 수 있을까. 조금 더 과학이 발전하게 된다면 아예 범죄인자를 가지고 태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모두 사전에 차단하자는 소리도 할까. (혹시나 해서 구글에서 검색해봤는데 영국의 과학자들이 범죄인자를 식별해내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한다는 뉴스를 발견했다.)
(과학자들, 범죄자로 성장할 수 있는 아이들 식별하는 기술 개발)

그래서 결론은, 네이트의 실시간 톱뉴스를 보면서 드는 짧은 생각은 미디어가 너무 쉽게 국민들을 분노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미디어의 순기능일수도 있고 역기능일수도 있다. 그들은 국민들을 '분노할만한' 기사에 노출시켜서 '댓글'이라는 수단으로 그들의 분노를 표출시키게 하고, 그걸로 끝이다. 누군가는 한숨을 쉬며 창을 내릴 것이고, 누군가는 다른 웹사이트로 접속해 언제 그런 분노를 가졌냐는듯 옷을 쇼핑할 것이고, 누군가는 분노를 더 공유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다른 사이트에 퍼다나르기도 하고, 더 분노한 누군가는 사건의 가해자들(혹은 주인공)의 정보를 파헤치면서 흔히 말하는 '마녀사냥'을 한다. 포털사이트의 입장에서는 페이지뷰 수가 곧 광고수익으로 연결되니 최대한 많은 네티즌들이 그들의 포털에서 기사를 봐주는 것을 좋아할 것이고, 네티즌들이 더 그 사이트에서 오래도록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 사건에 대한 제목을 더욱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만들어서 계속적으로 클릭하게 만들 것이고, 결국 우리들이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소모적인 댓글 논쟁을 벌일수록 올라가는 건 페이지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배너광고의 자릿세이다. 솔직히 그건 퇴근길의 국민들을 분노하게 하는 대가에 비할게 못되지 않는가.

아... 결국 이모든 것은 사랑의 결여라는 생각도 든다. 같은 반의 친구를 사랑하지 못하고, 버스기사님을 존경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지 못하니까 대필 논문도 쓰는 거고...
미디어가 국민들에게 '분노'를 배포하여 사회적으로 공론화시켜서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거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국민들에게 '사랑'도 있다는 걸, 여전히 이 사회는 아름답다는 걸 알려주는 기사들 또한 많이 보여줘야 하는건 아닌지 싶다.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의 학생들이 행복해질까?

2012년 3월 16일

이번 주부터 모든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모든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로운 과목들과 좋은 교수님들을 만난 것 같아 정말 기쁘다. 그리고 수업에서 교수님들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자꾸 속으로 '정말 그게 옳은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요새 모든 대상에 질문을 던지려는 버릇이 들었다. 다시 한 번 기대되는 한 학기라고 쓰고 싶다.

그제 <인지과학의 이해>의 홍우평 교수님께서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주셨다.
왜 중고등학교에 있는 일진이 대학에는 없을까? 도대체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사람의 행동이 그토록 크게 바뀔까?

생각해보면 초중고 전체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노스페이스 패딩도 대학에서는 전혀 다른 나라 이야기다. 대학교에서 빵셔틀이 과연 있을까. 대학교에서의 빵셔틀은 상상이 가지도 않는다. 만 18세에서 만 19세로 한 살 더 먹으면서 대단한 사고의 전환이 이뤄지는 걸까? 만약 고3을 마치고 나서 대학교 1학년이 되는게 아니라 고4가 된다해도 문제가 없어질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고등학교 4학년과 대학교 1학년이 사는 세계는 다르고 너무 다르다.

일진의 빵셔틀이라든지, 노스페이스 패딩 문제라든지 하는 중등교육 시기를 가로지르고 있는 여러가지 사회 문제들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몇가지 키워드들로서 그 원인들을 생각해낼 수 있다.

금지, 구속, 입시 교육, 획일화..

내가 고등학교를 다닌 건 벌써 7년도 더 된 일이기는 하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과 지금과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보인다. 적어도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노스페이스 패딩 같은 건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빵셔틀.. 다른 학교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학교에는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모든 학교가 이런 문제들을 갖고 있을리는 만무하다. 우리가 미디어로 접하는 뉴스들은 모두 특별한 경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그런 뉴스를 너무 자주 접하다보니 신경이 많이 가기도 하고,  등골브레이커라는 말은 대학가에서는 '등록금이 등골브레이커'라는 현수막으로 까지 이용되고 있으니 이미 사회적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큰 이슈가 된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저 우리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은 문제가 되어 학생들, 학부모들, 선생님들을 괴롭히고 있으니 안타깝다. 무엇보다 자식에게 비싼 패딩을 사입히지 못하는 부모님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정말 슬프다.

대학 사회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고3이 입시 공부에 목숨을 걸듯이, 대학생들은 취업이라는 장벽과 싸우고 있다. 지금은 등록금과의 싸움도 크게 벌이고 있고 말이다. 고등학생이 성적을 비관하여 뛰어내리듯이, 유수의 대학을 다니는 대학생들도 뛰어내린다. 다들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싸움의 성격은 비슷한듯 하면서도 너무도 다르다. 아침 8시부터 저녁때까지 같은 교실에서 구속을 받으며 공부하는 고등학생들과 넘치는 자유를 주체하지 못하는 대학생들의 싸움은 다르다. 그리고 적어도 대학생들에겐 취업, 연애, 스펙 등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술이든, 여행이든 그걸 풀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도 있다. 기분이 우울하면 머리 색깔을 바꿔서 기분 전환을 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엔 행복한 학생들이 많을까, 행복하지 않은 학생들이 많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의 학생들이 행복해질까?

지금부터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은 삶의 이음에 관한 것이다

2012년 2월 15일

지금부터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은 삶의 이음에 관한 것이다. 글을 쓸 때마다 어떤 식으로 글을 시작해야되는지 매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글을 이렇게 써내려가기 시작한 다음 이 글이 끝에 가서는 어떤 식으로 글이 끝맺음을 할지 전혀 알 수 없다. 애초에 내가 의도했던 방향으로 글이 써내려가지지 않을 수도 있고, 애초에 의도했던 글쓰기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과 고민을 담는 글이 나올 수도 있다. 일단은 이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부터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은 삶의 어느 순간에 느끼게 되는 '이어져 있음'에 관한 것이다. 어제 그러니까 2월 14일 저녁을 기숙사의 친구와 함께 먹으면서 하나의 대화 주제를 가지게 된다. 수강신청 기간을 일주일여 앞둔 시점이라서 모두가 시간표를 만드느라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이 친구가 원래 2학점이었던 '글쓰기'과목이 이번 학기부터는 3학점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전해주면서 우리의 대화는 이어져나갔다. 우리의 대화는 보통 관찰되어지는 자그만한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그 사실에서 그 친구는 학교 행정 당국의 부족한 공지, 학생의 의견을 전혀 수용하지 않는 처사, 학생회 역할의 필요성 등으로 이야기를 확장시켜 나갔다. 나는 그에 대해서 친구에게 반론아닌 반론같은 성격의 질문을 해가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애초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3시간 반동안 이어졌고 그러면서 대화의 주제는 한국 사회의 교육 시스템, 대학은 무엇이고 대학생은 누구인가, 즉 우리들은 누구인가로에 대한 이야기로까지 확장되어 나갔다. 

모든 사람들은 객관적 사실(현상)과 대상을 받아들일 때 모두 저마다의 가치관과 사상에 입각하여 다르게 바라보고 해석한다. 그것은 곧 다양성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이 사회를 유지하고 지속시키는 힘의 근원이 된다. 다름이 있기 때문에 사회는 진보와 퇴보를 거듭하며 진보해 나간다. 다양성의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일수록 더 건강한 사회다. 다양성을 해치려는 세력마저 또 다른 다양성으로 인정을 받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 것이다. 다양성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것은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고, 자신의 생각만을 옳다고 생각하여 남에게 강조하지 않으며 다름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은 본디 모두가 다른데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한다면 개개인의 존재 방식은 자꾸 억압받게 되어 건강하지 못한 사회적 현상을 표출하게 된다.

즉, 모든 객관적 현상에 대해서 사람마다 받아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 어제 대화의 핵심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평소에 그러한 생각을 쉽게 망각하고 살아간다. '아니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왜 이렇게 생각하는거지?' '어떻게 그 사건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그 사람이 불쌍하지도 않아?' 등등 우리들은 똑같은 현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비슷한 주파수의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기 때문에 많은 갈등을 유발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다양함' 또한 다양성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한 세력이 '다양한 다양성'보다 더 크다면 정말 '다양성'이 억압받기 때문에 건강한 사회가 못된다는 것이다.

나는 어제 친구에게 '나'라는 사람의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객관적 사실을 접했을 때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느끼는지 그리고 그 사실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다보니 그것은 지금까지 쭉 내가 살아온 날들에 이야기가 되었다. 친구에게 계속 말하면서 처음에 말할 의도가 없었던 나의 과거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계속 연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로 풀어내지 않았더라면 전혀 연관성을 가질 수 없는 별개의 사건이라고 보았을  개인적 역사가  같은 하나의 생각 아래 묶이고 있었다. 이야기는 꼬리의 꼬리를 물어 작년 대학생활까지 이어져와서 '환경분석론 수업의 교훈','불교철학 교수님의 가르침','인적자원개발론의 프로젝트에서 얻은 즐거움'으로 계속되었다.

길고 긴 대화를 마치고 각자의 방에 올라갔고 나는 다시 한번 친구와 나눈 대화의 의미를 되새긴다. 개인을 둘러싼 환경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개인이 특정 시간대에서 생각하는 것도 모두 다르지만 결국 같은 뿌리를 두고서 벌어지는 것들이다. 그 뿌리라는 것은 결국 '나'라는 사람이고 그건 '개인이 살아온 시간'과 동일하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내가 이 글에서 하고 싶은 애기를 적어보자.

개인이 만들어내는 모든 문제와 고민들은 사실 애초에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을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개인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내가 요새 가장 문제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마지막 대학생활을 앞두고 다가오는 취업 준비를 비롯한 미래에 대한 총체적 고민을 안고있다. 난관을 잘 헤쳐나가는 내 자신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당장 먹고 살 일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1년 동안 나의 모든 미래가 결정되는 건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존재한다.  이것이 내가 안고 있는 고민이다.

나는 어제 잠자리에 들기전에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최신 뉴스기사들을 읽어내려갔다. 하지만 그 때 우연하게도 나의 병영일기를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모든 병영일기를 인터넷에 올려놓은 덕분에 생각날 때마다 찾아 읽는 일이 많다.) 나의 군생활 일기 중에서 가장 많이 읽는 부분은 상병과 병장 때의 부분이었는데, 어제는 희한하게도 좀 더 오래 전의 일기를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삶은 늘 언제나 이런식으로 우연한 이끌림에 의해 재생된다.)

그리고 몇 개의 일기를 읽어내려가면서 난 '삶의 이어져 있음' (이 글의 주제)을 느끼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일기를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면 갈수록 그러한 글들이 나의 지금 모습에 반영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 당시에는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사실들에 대해 지금에서는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꼈다.

 09년 4월 27일 http://seonil.egloos.com/9967345
  "책 한자를 더 읽고, 단어 하나를 더 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내면의소리는 곧 나의 글로써 표현이 된다.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데 시간을 아끼지 말도록 하자. 글은 어떻게든 써지는 건가보다. 인생이 어떻게든 살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내 인생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로 내 인생을 꽉 꽉 채우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가 나 자신의 모습을 뛰어넘게 만든다. 그저 그런 사이의 사람이 부탁했으면 정중히 거절했을 일들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부탁하면 아무리 어려운 부탁이더라도 모두 들어주고 싶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계속해서 사랑하고 볼일이다. 참 골치아픈 인류애다. 사람을 사랑한다니.. 그래서 다들 보고싶다. 당신들과 함께 숨쉬는게 너무도 행복하다. 나는 타인의 인정과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걸 잊지말자. 

09년 4월 26일 http://seonil.egloos.com/9967342
"깨어있다는 생각. 눈이 깨어있고, 귀가 깨어있고, 그리고 내 정신이 깨어있고. 늘 깨어있자. 세상의 기운을 모두 받아들이자. 살아있음을 느끼자."

09년 4월 23일 http://seonil.egloos.com/9967340
가장 최악의 경우는 사람에 대한 흥미를 잃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흥미를 잃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갈 수 있나. 한겨레 신문과 씨네21을 읽으면서 내가 가지는 느낌이다. 그저 나하나만 잘 살자고 살면 안될 것 같은 그런 생각을 심어준다. 내 깊숙이 진보라는게 자리잡았던걸까, 아니면 모든 사람들은 진보로 향하게 되는 것이라서 그러는 걸까. 
진보라고 할 수 있나 싶다. 이건 인간애다. 다 같이 잘 살아보자에서 출발하는 그런... 
나란 사람 철저히 중간에 서려는 것 같다. 무섭고 잔인한 지성인이 되고 싶기도 하지만 내 모든걸 희생하는 매우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나야. 나는 언제든 변할 수 있으며 내 마음가는 대로 날 완성해가며, 세상의 모든 존재형태(방식)을 한없이 존중한다. 기형도로서의 삶도 멋지고, 할리데이비슨족들의 삶도 멋있고, 운동선수의 삶도 멋있고,. 그래 된장녀와 된장남의 존재 방식까지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 다름의 인정이다. 완전한 인정이다. 세상에 절대기준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 인정은 어디까지나 신념이 존재하는 인간에 한해서다. 자신의 행동과 말과 존재방식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 있을만한 신념. 굳이 설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알고 있어야 된다. 
사랑한다. 내 삶과 내 존재를 사랑한다. 그리고 살면 살아갈수록 명확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를 멋지게 만들어 갈 것이다.

09년 4월 11일 http://seonil.egloos.com/9936322
 기뻤다. 내가 썼던 글들을 보면서 당시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를 알수있는데 그 생각들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내 글들이 예전의 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때 당시 그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에 놀라버린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글쓰기에 집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글쓰기는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내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것은 한 나라의 일들을 기록하는 역사와도 같다. 이번처럼 예전에 썼던 글들에서 지금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건 대단히 멋진 일이다. 글쓰기의 위력을 실감한다. 내가 쓴글의 가장 큰 수혜자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란 사실을 알았다. 당분간은 일기를 온라인에 옮기는데 좀 더 치중하자. 그걸 통해서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고 있다. 너무도 재미있다. 내가 썼던 글을 통해서 '나'를 찾아가는 느낌이다. 나란 사람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나란 사람은 일정한 범위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지금은 매우 기쁘다. 내가 누군지 알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감이 충전된다. 부드럽게 나가자. 
  그때 당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하는게 아니다.) 나란 존재를 알아가는 것이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 때처럼 나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자. 그 범위는 상상력을 통해 확산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글쓰는 연습을 계속하다보면 어쩌면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세상을 바꿀수 있는 아이디어가 나올지도 모른다. 
  내가 그동안 기표에 너무 얽매여 있었던 것 같다. 기표는 기의를 모두 표현해낼 수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 머릿속의 생각들(기의)이고, 내게 필요한 것은 그것들을 최대한 모두 끄집어내어서 나에게 허락된 능력을 사용해 표현 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표의 함정에 빠지지 말도록 하자. 나에게 필요한 것은 글씨연습이 아니라 글연습이니까. 
  사람을 사귀는 방법이 필요한 게 아니라, 진정한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 
  세상의 핵심은 속뜻에 있다는 것을 지금 이순간부터 잊지 않기로 하자.

그리고 아래의 일기가 3년 전 딱 이 맘 때 내가 쓴 글이다.
난 어젯밤 이 글을 읽고서 내 스스로 갇혀있던 고민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이것이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삶'이 순간순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우주다. 

2009년 1월 19일 휴가를 나가서 (3년 전의 내가 쓴 글)  

  정말 길고 긴 하루였고 꿈을 꾸는 듯한 하루였다.

  오늘도 아침 일찍 서둘러서 일어났다. 전날 밤 인터넷으로 영화 '비카인드 리와인드'를 종로의 서울극장에 예매를 해놓았다. 형 집에서 9시정도에 빠져나왔다. 날씨가 꽤 따뜻했다. 종로까지는 지하철 대신 내가 좋아하는 버스를 타고 가기로 생각했다.일단 노량진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노량진에 거의 도착해서 며칠전 노량진에서 임용고시 대비강의를 듣고 있는 친구가 생각났다.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했고 바로 만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내가 가장 많이 의지하고 서로 많은 도움을 주고 가장 즐거운 추억을 함께 만들었던 나의 베스트프렌드! 너무 기뻤다. 거의 2년만에 처음 본것이니. 그 동안엔 그 친구의 연락처가 바뀌어서 연락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친구는 그대로였다. 예전처럼 밝았고 의욕도 넘쳐보였다. 우린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핫초코를 마시면서 그동안의 못다한 이야기들을 초스피드로 나누었다. 그친구나 나나 말이 엄청빠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그 친구와 떨어지게 된 이후로 그렇게 말이 잘 통하고 정신이 없을정도로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는 만나기 힘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약 한시간 동안 온갖 주제를 아우르며 이야기를 나눴다. 한시간이 1분 처럼 느껴졌고, 대화를 하면서 우리 둘 모두는 변하지 않았으면서도 더 성장한 모습에 서로 감탄을 했다. '네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고등학교 그 때의 모습, 여전히 변하지 않고 너로 남아줘서 고마워!' 대화 속에 오갔던 친구와 나의 고민들이 모두 잘 해결되길 바랄뿐이다.

영화 시작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급히 극장으로 갔다. 역시 오랜만에 가보는 종로. 영화 '비카인드 리와인드' 꼭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 영화는 무척 재미있었고 훈훈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어제 책을 사기 위해 학교 앞 서점을 갔지만 결국 고르지 못했다. 어떤 책을 사야 가장 돈이 아깝지 않고 현재 내가 필요로 하는 부분들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라는 생각때문이었다. 어쩌면 나의 완벽주의나 시간적 효율에 대한 강박증이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까. 비카인드 리와인드 영화는 문제를 단방에 해결해 주었다. 완벽할 필요는 없다는 것.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영화가 전해주는 메세지가 정확히 그것은 아니지만 내가 포착한 것은 그것이다. DVD의 날카로운 화질과 고감도의 음질을 비디오테이프는 절대 따라갈 수 없지만 그런 DVD조차도 완벽할 수는 없다. 그 채워지지 못하는 것이 휴머니즘이든 옛것에 대한 따뜻함이든 그리고 새로운 기술에 대한 것이든. 세상은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완벽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은 헛 될수도 있다. 그 영화를 보고서 종로거리로 빠져나왔는데 날씨가 따뜻한 것이다. 겨울인데도. 바로 가방안에 있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내가 보고 있는 영상에 배경음악이 흘렀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완벽한 해답을 찾는다기 보다는 해답에서 좀 비껴나와 인생을 즐기는 태도. 수많은 영화에서 보고 깨달았던 내용이지만 이번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깨달았다. That's why I love movie.

 그래서 난 서점으로 갔다. (그래서 난 비디오 대여점에 갔다.) 어제처럼 완벽한 책(완벽한 비디오)만을 찾으려 하지 않을거란 다짐을 했다. 쭉 훑어봤다. 마음이 이끌리는 분야(장르)쪽으로 갔다. 읽고 싶은 책(보고 싶은 비디오)을 집어 들었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카운터에가서 책 값을 (비디오 대여료) 계산했다. 서점(비디오 대여점)을 빠져나왔다. 기분이 좋았다. 
어젠 1시간 넘게 서점에 있었는데도 책을 사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바로 고를 수 있었다. 신중한 결정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흠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을 골랐고 그 책에서 인생의 완벽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은 가지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 어찌되었든 한 권의 책은 세상을 담고 있고 말이다. 나중에 내가 직업의 선택에서도 이런 생각이 중요하지 않을까. 너무 완벽한 직장, 연봉도 높고 복리후생도 좋고 일은 어렵지 않고 명예도 가져다주는 직장. 그런 직장을 찾아헤매다가 난 서점에서 처럼 방황만 하다가 서점 밖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취직을 하기 위해선 눈높이를 낮추라고들 말하지만 눈높이를 낮추어선 안된다. 그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꿈을 낮추는 것이나 다름없다. 눈높이를 낮추다기 보다는 완벽함에 대한 환상을 깨야한다는 것이 더 맞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책이라고해서 아카데미시상식의 작품상을 받은 영화라고해서 신이내린직장이라 불리는 몇몇 직장들이라해서 완벽한 것은 아니다. 결국은 나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다. 세상으로부터 칭송받는 좋은작품을 읽어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책 속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돈을 많이주는 기업이라고 해서 나와 맞지않으면 그건 아니다. 결국 이 모든 문제(선택에 관한 문제)의 답은 나 자신으로 통한다. '완벽'은 환상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가는대로 좋아하는대로 즐겁게 가야한다. 영화 한편이 나의 생각을 이렇게 확장시켜줬다.
오랜만에 도심을 걸었다. 종로-청계천- 을지로-시청-남대문시장-서울역까지. 예전에도 한가로운 날이면 자주걸었던 코스다. 길을 걷다보면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이 보인다.종로와 을지로의 높이 솟은 회사의 빌딩들과 세련된 회사원과 청계천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 예술과 들과 남대문시장의 언 손을 녹이는 상인들과 서울역의 노숙자들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삶. 그것을 모두 이해하고 아우르는게 내가 원하는 것이다. 편견없이 모든 세상사람들을 바라보고 싶다.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2009년 1월 19일 군생활 일기, 휴가를 나와서
 http://seonil.egloos.com/9901021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 된다.

다양성의 가치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연말에 그 해 본 영화와 읽은 도서들을 정리해 온 것이 벌써 6년째다. 기록해놓지 않으면 내가 어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는지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해에 어떤 영화들을 봤었는지 쭉 훑어 내려가다 보면 영화의 장면들도 빠르게 지나간다. 한 번 보고 묻어두기엔 좋은 영화들이 많기 때문에 정리를 해서 가끔 기억을 꺼내어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나에게 그 해에 얼마나 많은 영화를 보고 많은 책을 읽었는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숫자가 내가 접한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영화와 책을 접한다는 것은 한 사람과의 새로운 만남을 뜻하는데, 그러한 만남에서 다양성이란 가치는 굉장히 중요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을 접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늘 멀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은 편견에 사로 잡히고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정치가 대표적이다.) 영화와 책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다. 영화를 많이 보다 보면 당연히 그 선택의 다양성이 넓어질 수 밖에 없다. 한 달에 한 편의 영화를 보는 사람과 일주일에 한 편을 보는 사람이 있다고 치면, 한 달에 한 편의 영화를 보는 사람은 영화를 선택할 때 있어서 굉장히 신중해질 수 밖에 없다. 모처럼만에 보는 영화이기 때문에 돈이 아깝지 않을만큼 재미있어야 하고 자신의 취향과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 꼼꼼하게 영화평들을 읽어보아야 한다. 그에 반해 일주일에 한 편씩 영화를 보는 사람에겐 전자의 경우보다 영화 선택의 기준이 까다롭지 않게 되고 그러다 보면 좀 더 다양한 영화를 접하면서 뜻밖의 보물 같은 영화를 만나기도 하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듯이 영화와 책이란 것도 그렇다. 기준을 까다롭게 만들고 살아가다 보면 소중한 인연을 놓치듯이 소중한 영화를 놓친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좋은 기회를 잘 잡아야 하는 것이다.

나도 물론 취향의 늪에 빠져 있는 사람이다. 영화음악을 극히 좋아하고, 액션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고, 일본 문화를 좋아한다. 나만의 취향에 빠져 놓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돌아볼 일이다. 어제만 해도 그렇다.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불렀는데 모르는 가요가 어찌나 많던지…

내 생에서 아름다웠다고 생각되는 모든 순간들은

10월의 마지막 날
2011년 10월 31일

언제나 날씨가 좋은 날이면 모든 걸 던져버리고 어딘가로 놀러가고 싶은 심정이 마음을 가득 메운다. 오늘은 유난히도 정말 따뜻한 날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어제는 쌓이고 쌓인 할 일들 덕분에 밤을 샜다. 수많은 팀 프로젝트와 과제들이 쌓여있다고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만 잘 활용한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밤을 새는 것도 다음 날을 생각하면 매우 안좋은 선택이지만 밤을 새는 것도 내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는 선택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힘이 빠지는 하루였다. 내가 가장 힘이 빠지는 때는 사람들에게서 이기심을 발견할 때다. 사람은 누구나가 이기적이라는 가정은 경제학에서 '합리적'이라는 용어로 묘사가 된다. 사람은 이기적이라는 것이 수많은 이론들을 지탱해주는 전제라고 하지만  나는 모든 사람이 이기적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개그콘서트의 '애정남'에서 "세상이 왜 아름다운 줄 아십니까?" 라고 늘 물어보는데 나는 그 대답으로 '세상 사람 모두가 이기적이지는 않기 때문에'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이 자기 앞의 이익을 챙기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보게 된 세상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얘기다.

생각해보면 내 생에서 아름다웠다고 생각되는 모든 순간들은 '이기적이지 않은 마음'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서라도 남과 혹은 집단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고 있다.

친구 철민이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철민아, 왜케 힘드냐.. 모르겠다 진짜"
"니가 니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하니까 그렇지."
"야 내가 뭐 나를 힘들게 하냐.그냥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것 뿐인데."
"야 그게 너를 힘들게 하는거지 뭐냐."

오랜만에 도서관 열람실에 와서 앉아있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10월 31일, 10월의 마지막 날이다. 여유롭게(?) 과제를 하면서 책상에 앉아있는 것도 오랜만이다.

뭐 하루하루 살다보면 어찌 매일 기분이 좋을 수 있으랴. 기분이 안 좋은 날도 있고, 기분이 좋은 날도 있는 거지. 그냥 오늘은 기분이 안 좋은 날로 하루를 보내고 싶었나보다.

대한민국의 대학 교육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이러한 글이 올라와 있다.
"대학 평가에서 좋지 않은 성적은 거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학교의 이사장으로서 자기 학교가 평가를 좋게 못 받았으니 충분히 이해가 간다.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학교의 모든 선생님들이 학교의 지역 내 순위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아온 우리들이다.

바로 며칠 전 친구와 밥을 먹으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대학 교수들 만큼 좋은 직업도 드물지 않을까? 초중등교사에 비해 연봉도 훨씬 높고 매번 방학도 있고 안식년도 있으니 말야" 라는 내용이었는데, 새삼 이렇게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을 보니 교수님들도 스트레스와 압박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기업이 물건을 파는 것 처럼 교수님들은 새로운 분야의 연구를 한다. 때문에 정말 학습과 연구에 흥미를 두지 못하는 사람은 그런 직업을 가지면 안되겠다.

이 글을 보면서 파악할 수 있는 숨은 의도 중 하나는 바로 이 글을 모든 학생과 학교 관계자들이 볼 수 있도록 학교 홈페이지에 공개적으로 올렸다는 사실이다. 학교의 이사장이라면 충분히 모든 교수들에게 메일과 같은 수단으로 연락을 취할 방법을 갖고 있음에 틀림이 없는데도 굳이 공개적으로 올린 이유는 '모두 이 글을 읽어라' 라는 것이다. 즉, 편지 내용에서는 학생들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학생들도 이 글을 보고 좀 느껴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학생이라면 이 글을 보고 '이번에 학교 평가에서 성적이 좋지 않게 나왔으니 제발 좀 공부 좀 더 열심히 해서 취업률도 높이고 고시도 많이 패스해서 학교의 이름을 떨쳐라.'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충분할 것 같다. 학생은 학교에 등록금을 내고 교육 서비스를 제공받는 일종의 고객이기 때문에 학교의 이사장이 학생들을 질타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학교의 이사장은 '학문', '공부', '배움' , '교육' 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아마 모든 걸 경쟁과 평가로 연결시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학생은 취업률 0.1%의 오르내림을 좌우하는 대상으로, 교수님들은 연구실적 건수를 올리는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나. 마치 어느 높으신 분이 국민들은 크게 신경쓰지도 않고 있는 국민소득에 그토록 연연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덧 시간의 흐름 속에 잊혀져 간 카이스트 대학생들의 연속 자살 사건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보기에 적절한 시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이사장의 교수님들에 대한 논문 건수를 올려달라는 부탁으로 대학의 평가가 올라갔을 때,  그것의 가장 큰 수혜자는 내가 될 수도 있다. 이 학교 졸업자라는 명패로 서류심사에서 당락이 결정될 수도 있고 대우가 달라질 수도 있다.(학력사회)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1인당 국민 소득이 상승함으로 인해 수혜를 받는 건 역시 국민들이다. 외국에 나가서도 '국민 소득이 높은 나라'에서 왔다고 하면 쉽게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이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와 같이 후진국에서 온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는 모습들이 그걸 잘 보여준다. 중국의 국민소득이 점차 상승해지자 명동에서는 중국 관광객들을 잡기 위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뉴스에도 보고 있고 말이다.

참 아이러니일 수 밖에 없다. 아이러니라고 쓰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고 읽는다. 하지만 이것이 옳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고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경쟁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방법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있다. 워낙 오래된 유머지만 아이슈타인이 2000년대의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노벨물리학상을 받지 못했을 뿐더러 영어와 내신성적의 걸림돌로 인해 대학의 문턱 조차 밟지 못했을 거라는 가슴 아픈 유머도 잘 말해주지 않는가.

자, 이제 비판을 했으면 대안을 내놓을 차례다. 노사관계론을 가르치시는 교수님께서 '대안 없는 비판'이 가장 쓸모없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이사장이었다면 교수님들에게 어떤 편지를 썼을까?' '대한민국의 대학 교육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글씨, 바꾸기로 마음먹으면 바꿀 수 있는 것

2011년 10월 21일

시험기간에는 유난히 필기를 많이 하게 된다. 배운 것을 다시 쓰고 정리하면서 머리 속으로 '이건 암기하고 있는게 아니라 이해하고 있는거야' 라고 생각을 하며 암기를 한다. 그렇게 필기를 하다보면 늘 드는 생각이 '참, 글씨 진짜 못쓴다...'

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을 볼 때 겉모습을 보고서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유일하게 내가 사람을 볼 때 신경을 써서 관찰하는 부분이 바로 글씨다. 큰 기대치를 주지 않은 사람이 글씨를 잘쓰면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되고, 굉장히 반듯하고 성실할 것 같은 사람이 글씨가 엉망이면 그 사람도 다시 보게 된다. 흔히 말하는 '어른 글씨'라는 것이 있는데, '어른 글씨'를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의 인품까지 좋아보이는 것이다. (무한도전 '무한상사편'을 보면서 난 정준하씨를 다시 봤다. 그리고 '추석특집편'에서 박명수씨의 글씨를 보고 그도 다시 봤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어른 글씨를 따라하기 위해 무수히도 많은 연습을 했었다. 우리 부모님 두 분 모두 글씨를 정말 잘 쓰시는데 그 영향이 무척 컸던 것 같다. 꼭 열심히 연습해서 부모님처럼 글씨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또 부모님께서는 나의 글씨 교육에 무척 엄하셔서, 초등학교 다닐 적에는 내가 한 숙제를 보고서 글씨가 엉망이라며 처음부터 다시 쓰게 한 적도 있다.

아마 컴퓨터가 없었으면 주위에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어른들은 어린 시절에 컴퓨터가 없었으니까 글씨를 잘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키보드는 시간을 줄여줬지만 사람들에게서 글씨체를 빼앗아갔다.
한 사람의 글씨는 반듯반듯 쓰여져 나오는 컴퓨터의 '폰트'가  절대로 담지 못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그 옛날 연애편지를 또박또박 공들여서 썼던 이유도 글씨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함이지 않았을까. 사람의 글씨는 정말 너무나도 정직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심성의껏 썼는지 대충 휘갈겨썼는지 바로 구분할 수 있게 만든다.

나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스스로 펜글씨교본도 사서 글씨 쓰는 연습을 많이 했었는데 그 이후론 전혀 연습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글씨를 쓰다보면 어떻게 써야 예쁘게 써지는지 몰라서 펜 끝이 맴돌 때가 많다. 글씨쓰기라는 것도 자전거나 수영처럼 몸으로 습득하는 일이어서 한 번 손가락의 근육을 길들여 놓으면 그 글씨의 모양새가 (자기가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한 동안 유지된다. 즉 바꾸기로 마음먹으면 바꿀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글씨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글씨를 잘 쓰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능하다면 언젠가는 내 글씨체를 컴퓨터 폰트로도 개발하고 싶다. 그 날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꾸준히 갈고 닦아야겠소.

온 나라가 너무 SEX에 심각할 정도로 민감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의 뉴스를 보며

연일 성폭행 관련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정말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 들린다.  영화 '도가니'로 성범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이제는 나와 가까운 곳에서 이런 일들이 생기니 신경이 더욱 쓰일 수 밖에 없다.

모든 사건과 현상은 당사자나 제 3자의 시각에 의해 해석되고 전달되기 때문에 정확한 진실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당사자의 글이나 언론에서 연일 생산해내고 있는 기사로 보았을 때 가해-피해 관계가 명확한 것 같다. 진실을 잘 밝힌 뒤 가해자에게 엄중한 처벌이 내려져야 할 것이다. 이미 가해자들의 실명까지 거론된 상태에서 해당 학생들은 더 이상 학교 생활이 힘들 것 같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던 대학교에서도 해당학생을 출교 처리 한 것을 보면 이번에도 여론에 의해 출교되지 않을까. 출교 처분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성범죄자를 출교 한다는 것은 성범죄자에게서 교육을 받을 권리를 박탈하려는 것으로 봐야되는건가. 출교 한다면 다른 대학교에 다시 입학할 수 없는 건가. 만약에 입학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학생들을 받아주는 다른  대학교는 성범죄자의 교육받을 권리를 인정하는 건가. 단지 명문대였기 때문에 출교 처분을 한 것이라면, 대한민국의 성범죄자들 가운데 그 학교 출신인 사람들은 모두 동문명단에서 지우는 것도 가능한가. 해당 학생들의 출교 처분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한국 사회의 여론의 무서운 힘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만약에 그 사건이 이슈화 되지 않았었다면 그 때도 학교는 자체적으로 학생들을 출교시켰을까.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영화 '도가니'의 경우를 보더라도 정작 사건이 터진 후에도 성폭행을 저지른 교사들이 모두 복직했다가 이번에 이슈화 되면서 다시 심판을 받지 않았는가. 한국 사회의 여론은 굉장히 감정적이다. 감정적인 시선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좀 더 넓게 보지 못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하여 좀 더 나은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는데도 그걸 차단해 버린다. 지금도 감춰져 드러나고 있지 않은 제 2,3의 도가니 사건들을 비롯한 극악무도한 성폭행 사건들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경찰청의 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성폭력 범죄는 5만건(2010년 2만300건)이 넘고 그 중 약 2만건은 청소년 피해자이고, 장애인 성폭력은 841건이라고 한다. http://media.daum.net/society/view.html?cateid=1067&newsid=20111007060212622&p=newsis 성폭력범죄의 신고율이 적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높은 수치다.)  그 중 도가니 사건과 이번 두학교의 성폭행 사건처럼 이슈화돼서 사건이 표면 위로 떠오르면 여론은 정의의 칼을 뽑아든 사도 마냥 심판을 내린다. 정작 우리가 싸워서 근절시켜야 할 더 큰 상대는 따로 있는데 건드리기 쉬운 개인 범죄자를 두들겨 패고 있다. 그리고는 정치나 기관(학교) 권력이 여론의 뜻에 따라 움직였을 경우 '정의는 죽지 않았다.' 고 말한다. 그리고는 성폭행에 대한 사건이 잠잠해지면 여론도 함께 잠잠해진다, 또다른 사건이 이슈화 될 때까지 기다리면서.

글의 요지는,
온 나라가 너무 SEX에 심각할 정도로 민감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마치 나라 전체가 성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가 자위대 행사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가지고 '자위녀'라는 말까지 만들어냈다면 할 말 다했다...정말...) 뭔가 많이~ 잘못 됐다고 본다. 항상 근본적인 해결과 대안의 모색보다는 (이젠 너무나도 듣기 지겨운 말이 되버린) 마녀사냥에만 급급하는 한국의 여론.  (한국 사회의 여론이라고 말은 하긴 했지만 한국의 인터넷 여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