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3 - 자신감, 그리고 용기를 갖는다는 것
자신감. 초등학교 4학년 때 였을까. 선생님께서 '자신감'이라는 단어에 대해 조사해오라고 숙제를 냈었다. 하지만 난 그 숙제를 해오지 않은 상태로 일어 서서 자신감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대로 얼버무렸다.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당시 나는 자신감을 용기와 비슷한 정의로 설명했던 것 같다.
지금에서도 자신감과 용기는 비슷한 성질의 것이라고 본다. 자신감을 가지는 문제는 곧 용기를 가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용기를 가지기 위해선 자신감이 필요하기도 하다. 상호관계에 있는 것이다. 어떠한 행동이나 시도를 하기 위한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을 믿어야 한다. 그러한 시도와 행동이 실패했더라도 나의 인생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고, 나라는 사람은 여전히 나라는 사람에 머물 것이라는 믿음. 나라는 사람에 머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자신을 믿는 것 뿐이다.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 무얼 믿고 우리 자신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무얼 믿을 건 따로 없다. 그냥 자기 자신만을 믿을 뿐이다. 그게 바로 용기다. 믿을게 아무것도 없지만 그저 자신 스스로를 믿는 것. 굳이 믿을 근거를 찾고 싶다면 사실 근거는 이미 있다. 우리가 살아온 길을 보면 된다. 우리는 잘 살아있다. 죽지 않고 잘 살아왔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서로가 서로를 행복하게 만들며, 같이 웃고 울며 우리는 믿지 못할만큼 잘 살아왔다. 혹시 아쉬움이 남는 과거의 삶으로 비춰진다면 그건 용기가 조금 부족했던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하는데, 대체 우리는 어떤 용기가 필요할까. 살아가는 것 자체에 대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늘 선택으로 시작해서 선택으로 귀결되는 문제이고, 선택은 언제나 늘 용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용기있는 선택이 우리의 인생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 나간다. 여러가지의 선택지 중에서 어떤 길을 택했을 때 우리의 인생이 더 재미있어질지를 생각해보고, 자신이 마음이 가는 선택지를 과감하게 고르는 그런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누군가는, 많은 사람들은 평생 용기를 가져보지 못한 채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용기를 계속 가지려 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용기는 필요하다. 지금보다 더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는 선택지를 과감하게 선택하자. 더 재미있게 살기 위해 평생을 죽을 때까지 배움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인생은 늘 오늘 여기서 시작하는 법이다.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2 - 실패한다는 것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2 - 실패한다는 것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경우를 '실패'라고 하자. 원하는 대학에서 떨어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얻지 못하고, 평생을 이어가고 싶었던 사랑에 금이가는 그런 것들. 우리는 실패를 하며 살아간다. 실패의 연속이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마음 먹은대로 될리 만무한 것이다. 이것은 실패가 없으면 인생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우린 태어나고, 우린 자라고, 우린 배우고, 우린 원하고 바란다. 그리고 그 끝에 실패가 있다. 우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우리의 생각하는 하루는 우리가 원했던 것이 아니며, 우리가 생각했던 우리가 원했던 인생이 아닌 경우가 많다.
경제학에서는 이 모든 걸 간단한 개념으로 정리해주었다. '자원의 희소성'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 수는 한정되어 있어서 그것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 실패다. '자원의 희소성'은 비단 재화와 서비스에 국한되는 얘기는 아니다. 무한한 자원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공간이 한정되어 있고, 내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관심과 애정이 한정되어 있고, 우린 죽는다.
우린 죽는다. 우린 오래 살기를 원하지만 죽는다. 지금 당장 죽는 것은 아니지만 가까운 미래 혹은 먼 미래에 우린 모두 죽을 것을 알고 있다.
우린 모두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하지만 죽게 된다. 하지만 '죽음'을 가지고 실패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낳음과 죽음은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태어난 모든 것은 죽는다. 밤하늘의 별들도 태어났다 사라지고, 우리 마음의 사랑과 미움도 커졌다 작아지고, 내가 있었다 없어진다.
죽어버려 사라지고 흔적조차 없어진다면 그 끝에는 어떤 의미가 남겨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후에 우리는 어떤 의미를 찾을까. 의미가 남겨진들 그건 또 무엇을 의미할까. 어떤 의미가 남겨진 '죽음'만이 의미 있는 죽음이냐는 말이다.
애초에 의미는 없다. 시작부터 의미는 없었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다. 인류의 시작과 멸망, 나와 당신의 탄생과 죽음은 어떤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것의 존재와 그 시작과 끝에는 어떠한 의미는 없다. 때문에 '무언가의 끝'에서 어떠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 '의미 없다'.
우린 숱한 실패와 몇몇의 성공들이 함께 하는 인생을 살아가며 그 끝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가 실패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했다면 당연하다. 의미는 없었으니까.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실패의 연속인 우리의 삶도 그리고 죽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삶의 의미 == null;
우리들의 실패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니 실패를 한다고 해서 상처를 받지도 의지를 잃지도 말자. 우리가 의미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면 매우 잘 살고 있는 것이다. 계속 실패하자. 계속 살아가자.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경우를 '실패'라고 하자. 원하는 대학에서 떨어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얻지 못하고, 평생을 이어가고 싶었던 사랑에 금이가는 그런 것들. 우리는 실패를 하며 살아간다. 실패의 연속이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마음 먹은대로 될리 만무한 것이다. 이것은 실패가 없으면 인생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우린 태어나고, 우린 자라고, 우린 배우고, 우린 원하고 바란다. 그리고 그 끝에 실패가 있다. 우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우리의 생각하는 하루는 우리가 원했던 것이 아니며, 우리가 생각했던 우리가 원했던 인생이 아닌 경우가 많다.
경제학에서는 이 모든 걸 간단한 개념으로 정리해주었다. '자원의 희소성'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 수는 한정되어 있어서 그것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 실패다. '자원의 희소성'은 비단 재화와 서비스에 국한되는 얘기는 아니다. 무한한 자원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공간이 한정되어 있고, 내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관심과 애정이 한정되어 있고, 우린 죽는다.
우린 죽는다. 우린 오래 살기를 원하지만 죽는다. 지금 당장 죽는 것은 아니지만 가까운 미래 혹은 먼 미래에 우린 모두 죽을 것을 알고 있다.
우린 모두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하지만 죽게 된다. 하지만 '죽음'을 가지고 실패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낳음과 죽음은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태어난 모든 것은 죽는다. 밤하늘의 별들도 태어났다 사라지고, 우리 마음의 사랑과 미움도 커졌다 작아지고, 내가 있었다 없어진다.
죽어버려 사라지고 흔적조차 없어진다면 그 끝에는 어떤 의미가 남겨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후에 우리는 어떤 의미를 찾을까. 의미가 남겨진들 그건 또 무엇을 의미할까. 어떤 의미가 남겨진 '죽음'만이 의미 있는 죽음이냐는 말이다.
애초에 의미는 없다. 시작부터 의미는 없었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다. 인류의 시작과 멸망, 나와 당신의 탄생과 죽음은 어떤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것의 존재와 그 시작과 끝에는 어떠한 의미는 없다. 때문에 '무언가의 끝'에서 어떠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 '의미 없다'.
우린 숱한 실패와 몇몇의 성공들이 함께 하는 인생을 살아가며 그 끝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가 실패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했다면 당연하다. 의미는 없었으니까.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실패의 연속인 우리의 삶도 그리고 죽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삶의 의미 == null;
우리들의 실패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니 실패를 한다고 해서 상처를 받지도 의지를 잃지도 말자. 우리가 의미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면 매우 잘 살고 있는 것이다. 계속 실패하자. 계속 살아가자.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1 - 창작한다는 것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1 - 창작한다는 것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를 주제로 하는 첫 끄적임이다. 원래 시리즈 제목을 '인생의 행위에 대하여'로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주체는 '인간'일수 밖에 없기도 하니 '인간의 행위'로 정했다. 그러고서 처음으로 떠올리는 인간의 행위는 '창작'이다.
사실 모든 게 창작이다. 창작이 아닌게 없다. 내가 쓰고 있는 글도 창작이며,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창작물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도 결국 창작의 연속이다. 창작은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고 그것은 '무'를 '유'로 치환함이다. 인간의 인생에서 '무(없음)'란 무엇인가. 그건 살지 않음 (살아가지 않은 시간들, 오지 않은 시간들)이고, 그 반대로 살아온 시간들은 모두 '유'가 된다. 즉, 살아가는 행위 자체만으로 무를 유로 바꾸는 창작이다.
인생의 시간 속을 흘러간다는 점에서 창작은 필연적이며 그럼 중요한 것은 '어떻게' 창작하느냐의 문제로 넘어간다. 결국 인생을 어떻게 살것인가의 문제이다. 우린 태어남과 동시에 아주 커다란 흰 종이를 건네 받았고, 각자의 그림을 그려나간다. 처음부터 그림은 잘 그릴 수 없기에, 부모의 양육과 사회의 교육을 받으며, 그리고 사회에서 정해진 룰에 맞춰 그림을 그려나가는 법을 배운다. 예술도 그렇다.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는 것에도 모두 그 세계의 룰들이 존재한다.
우린 선택해야 한다. 가장 먼저는 룰을 따를지 말지, 따른다면 어느 정도 룰을 따를지,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를 말이다. 사실 이러한 선택지들 사이에서 우열은 없다. 모든 창작 과정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가지기 때문이다. 형식에 잘 맞춰 쓰여진 글이나, 형식을 파괴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담아내는 글.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음악과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음악. 사회에서 바람직하게 바라보는 한 인간의 삶이나, 사회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쁜지를 가려낼 수는 없다.
창작은 애초에 좋고 나쁨을 가려낼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니다. '좋은 창작'과 '나쁜 창작'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삶과 나쁜 삶, 바람직한 삶과 바람직하지 않은 삶을 나눠서 구분하는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창작은 어디까지나 창작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다.(후에 의미없음에 대한 글을 썼을지라도)우리는 그저 의미를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인생에 주체적으로 임하여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그런 인생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사회에서 만들어 내는대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그 나름대로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면 된다.
흔히 말하는 '의미 부여' 작업이다. 의미부여만큼 창작에서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흰 종이에 물감을 의도해서 뿌리든, 물감이 엎지러져서 종이에 뿌려지든, 우리는 두 가지 상황에서 모두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 내가 그린 그림, 내가 쓴 글, 내가 산 오늘 하루, 내가 살아온 세월에 우린 얼마든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그렇게 의미를 부여한 순간에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창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정리하자면 창작이 성립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세가지는 창작자 - 창작물 - 의미다. 내가 아무 생각없이 보내고 있는 시간에도 약간의 의미를 더해주면 그건 하나의 창작으로서 완성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의 창작품으로 완성되어지는 순간, 그건 이미 좋고 나쁨의 가치 판단의 필요성을 뛰어넘는 세계에 도달한다. 무가 유로 변환되는 세계, 창작의 세계다.
창작한다는 것,
나는 이 에세이 한 편으로 내가 쓴 모든 글과, 앞으로 내가 쓸 모든 글들을 옹호하였다.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에 다시 한번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지님' 을 탈출할 수 없는 '깨질 수 없는' 창작이 되었다. (←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다)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를 주제로 하는 첫 끄적임이다. 원래 시리즈 제목을 '인생의 행위에 대하여'로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주체는 '인간'일수 밖에 없기도 하니 '인간의 행위'로 정했다. 그러고서 처음으로 떠올리는 인간의 행위는 '창작'이다.
사실 모든 게 창작이다. 창작이 아닌게 없다. 내가 쓰고 있는 글도 창작이며,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창작물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도 결국 창작의 연속이다. 창작은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고 그것은 '무'를 '유'로 치환함이다. 인간의 인생에서 '무(없음)'란 무엇인가. 그건 살지 않음 (살아가지 않은 시간들, 오지 않은 시간들)이고, 그 반대로 살아온 시간들은 모두 '유'가 된다. 즉, 살아가는 행위 자체만으로 무를 유로 바꾸는 창작이다.
인생의 시간 속을 흘러간다는 점에서 창작은 필연적이며 그럼 중요한 것은 '어떻게' 창작하느냐의 문제로 넘어간다. 결국 인생을 어떻게 살것인가의 문제이다. 우린 태어남과 동시에 아주 커다란 흰 종이를 건네 받았고, 각자의 그림을 그려나간다. 처음부터 그림은 잘 그릴 수 없기에, 부모의 양육과 사회의 교육을 받으며, 그리고 사회에서 정해진 룰에 맞춰 그림을 그려나가는 법을 배운다. 예술도 그렇다.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는 것에도 모두 그 세계의 룰들이 존재한다.
우린 선택해야 한다. 가장 먼저는 룰을 따를지 말지, 따른다면 어느 정도 룰을 따를지,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를 말이다. 사실 이러한 선택지들 사이에서 우열은 없다. 모든 창작 과정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가지기 때문이다. 형식에 잘 맞춰 쓰여진 글이나, 형식을 파괴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담아내는 글.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음악과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음악. 사회에서 바람직하게 바라보는 한 인간의 삶이나, 사회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쁜지를 가려낼 수는 없다.
창작은 애초에 좋고 나쁨을 가려낼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니다. '좋은 창작'과 '나쁜 창작'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삶과 나쁜 삶, 바람직한 삶과 바람직하지 않은 삶을 나눠서 구분하는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창작은 어디까지나 창작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다.(후에 의미없음에 대한 글을 썼을지라도)우리는 그저 의미를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인생에 주체적으로 임하여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그런 인생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사회에서 만들어 내는대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그 나름대로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면 된다.
흔히 말하는 '의미 부여' 작업이다. 의미부여만큼 창작에서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흰 종이에 물감을 의도해서 뿌리든, 물감이 엎지러져서 종이에 뿌려지든, 우리는 두 가지 상황에서 모두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 내가 그린 그림, 내가 쓴 글, 내가 산 오늘 하루, 내가 살아온 세월에 우린 얼마든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그렇게 의미를 부여한 순간에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창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정리하자면 창작이 성립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세가지는 창작자 - 창작물 - 의미다. 내가 아무 생각없이 보내고 있는 시간에도 약간의 의미를 더해주면 그건 하나의 창작으로서 완성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의 창작품으로 완성되어지는 순간, 그건 이미 좋고 나쁨의 가치 판단의 필요성을 뛰어넘는 세계에 도달한다. 무가 유로 변환되는 세계, 창작의 세계다.
창작한다는 것,
나는 이 에세이 한 편으로 내가 쓴 모든 글과, 앞으로 내가 쓸 모든 글들을 옹호하였다.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에 다시 한번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지님' 을 탈출할 수 없는 '깨질 수 없는' 창작이 되었다. (←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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