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는 삶에 대하여 -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고서

<삶과 죽음의 철학> 에세이
의미 있는 삶에 대하여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고서

‘두려움, 나이가 든다는 것, 탐욕, 결혼, 가족, 사회, 용서, 의미 있는 삶 그리고 죽음’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저자 미치는 모리교수와 위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사람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을까. 앞으로 더 살아갈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을까. 나도 한 번 생각해 본다. 내가 만약 지금 죽는다면 난 주위 사람들에게 무엇에 대해 얘기를 해주고 싶을까.
예전 중학교 수업 시간에 유서를 쓰는 시간을 가졌던 적이 있다. 아직 중학생밖에 되지 않은 우리들에게 유서를 쓰라고 했기 때문인지 반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선생님은 반의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자신이 정말 내일 죽는다고 생각해고 유서를 써보라고 하셨다. 이내 반 아이들은 연필을 잡고 진지하게 유서를 써 내려갔고, 교실에는 숙연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두 명씩 유서쓰기를 끝마치자 선생님은 이제 반 아이들 앞에서 각자의 유서를 낭독할 거라고 하셨다. 다시 한번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나름대로 정말 심각한 내용을 쓴 친구들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유서를 다 쓴 순서대로 한 명씩 앞에 나가서 자신의 유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유서는 모두 진지했다. 그리고 유서의 내용들은 어느 한 지점에서 맞닿아 있다는 걸 알았다. 거기에는 사랑이 있었다. 모두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했다. 자기의 부모님과 형과 누나들, 동생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했다. 나의 유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할머니와 외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형에게 보내는 유서를 따로 적었다. 내가 낭독할 차례가 되었고 나는 앞에 나가 나의 유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유서를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되었고 목이 메여서 말이 나오지 않게 돼서 결국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의 문턱에 간 순간에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삶 중 최고의 순간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삶은 보다 삶다웠다. 선한 것도 많았고 삶 자체도 정말 사는 것 같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생의 출발점에 밝은 점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최고의 순간들은 어린 시절이었음을 깨닫는다. 거기에는 사랑이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나락에 떨어져 빛을 보았고, 빛을 보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삶이 그래서는 안 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자 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들이 가여워졌다. 아내가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쳐다보았다. 눈물은 그녀의 코와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이어 그는 생각한다.

맞아. 저들에게 내가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저들에게 미안하지만 내가 죽는 게 저들에게도 나을 거야.
이반 일리치는 죽음의 문턱을 넘는 순간에 그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고, 짧은 순간이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어디에 있는 거지? 죽음이라니? 그게 뭔데? 그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죽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에게 있어서는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반 일리치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리교수를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조언을 해 줄 스승이 있었다면 그의 인생에 좀 더 의미를 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건 이반 일리치에게만 해당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그러한 스승이 필요하다. 모리 교수는 우리들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말한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사는 동안 자기 삶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배우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울 것이고, 자기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세상이 아주 다르게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걸 깨닫고서 바라보는 세상에는 두려움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나이 듦에 대한 존경과 용서가 있다. 그리고 사랑이 있는 것이다. 모리 교수의 말대로 삶과 죽음을 동일 선으로 인식하고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우린 언제까지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그 날 하루를 매우 의미 있게 보낼 거라고 하지만 우리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영원한 생의 날들이 펼쳐져 있을 거라는 믿음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힘겨운 경쟁을 하고 조금 더 많은 재산을 모으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우리가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더 나은 삶고 더 나은 죽음을 위한 것이다.
  “죽어간다는 생각과 화해하는 것, 우리 모두 찾는 게 바로 그거잖아. 결국 우리가 궁극적으로 죽어가면서 평화로울 수 있다면 마침내 진짜 어려운 것을 할 수 있겠지. 살아가는 것과 화해하는 일 말일세”
모리 교수는 죽어간다는 생각과 화해를 한다면 우리에게 있어 진짜 어려운 일인 살아가는 것과 화해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우리는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늘 살아가는 게 어려운 것이다.

올 해 들어 국내 명문 대학교의 대학생이 4명이 잇따라 자살을 하고 교수도 1명이 자살을 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한국 사회는 침통에 빠져있다. 같은 대학생 신분인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이번 일의 무게는 남다르다. 한 인터뷰에서 그 학교의 학생이 경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이 사회를 향해 말한다. 자신들은 행복하지 않다고. 올해 초에는 강원도의 한 대학생이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자살을 했다는 뉴스도 있었다. 나는 한국 대학생들의 자살에 대한 기사를 더 찾아보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대학생만 한 해에 약 240명이 자살을 한다고 하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인구 10만 명 당 자살률 24명으로 1위, 10대와 20대의 자살률 또한 OECD 1위. 40분 마다 한 명씩 자살을 한다는 통계를 봤을 때는 말을 잃었다. 행복하지 않은 대학생들이 가꿔가는 사회에는 희망이 있기는 한 걸까. 모리 교수가 말한다.
“어떤 사회든 나름대로 문제는 있지. 달아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네. 자기가 사는 곳에서의 자기의 문화를 창조하려고 노력해야지. 어디 살든지 우리 인간의 최고 단점은 근시안이라는 점이야. 우리의 잠재력을 보고 우리를 넓힐 수 있는 데까지 쭉쭉 넓혀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지.”
어쩌면 삶의 어려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버린 학생들에게는 모리 교수의 위로도 산 사람들의 동정도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그 자신들의 죽음을 택함으로써 한국 사회를 바꾸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우리 젊은이들은 이반 일리치가 살았던 삶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니, 이반 일리치는 젊은이들뿐만이 아니라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과 다름없다. 직장에서는 더 좋은 위치에 올라가기 위해 수단을 쓰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더 넓은 집을 보여주고 좋은 접시를 보여주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조금만 더 힘내서 같이 살아남은 다음,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같이 노력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은 삶이라는 어려운 길이 아닌 삶보다는 쉬운 죽음이라는 길을 택했다. 어쩌면 삶이란 게 어려운 길임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 우리가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건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삶의 순간이 그러했듯, 그 옛날 중학교 수업시간에 유서를 낭독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나와 내 친구들이 그러했듯, 모리 교수가 미치에게 말했듯…
우리에겐 사랑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은 이기지. 언제나 사랑이 이긴다네.’

‘인생을 의미 있게 살려면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바쳐야 하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헌신하고, 자신에게 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는 일을 창조하는 데 헌신해야 하네.’
‘사랑을 나눠주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

공수래 공수거 (空手來 空手去) ,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간다고 하지만, 우리는 결코 빈손으로 오가는 게 아니다. 아기로서 세상에 태어났을 때도 사람의 보살핌이 있었고, 삶을 끝맺는 순간에도 누군가의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삶이 시작한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사랑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다.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의미 있는 삶에 대해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었다. 이반 일리치와 모리 교수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나 역시 간접적이었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 중학교 수업시간의 기억을 끄집어 낼 수 있었다. 친구들 앞에서 유서를 낭독하는 동안 얼굴에 타고 흘렀던 뜨거운 눈물의 의미를 이제서야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어렸던 중학생 그 때는 단지 내가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까 슬퍼서 눈물이 나는 거라고 생각했다.특히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읽으면서 나는 과연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나 또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거기에 진심이 담겨있었는가를 의심도 해 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지금보다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느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을 했다. 나의 이러한 고민은 실천이 되었을 때 힘을 가진다는 것 또한 느꼈다. 다행히도 예전이라면 어려운 고민거리였겠지만 지금은 커다란 답이 그려진다. 우리는 태어나는 동시에 죽음에 내던져진다. 즉, 살아가는 과정은 죽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사랑’이 있는 한 삶과 죽음은 의미를 더해간다.

2011년 4월 11일 도서관에서

*인용 및 발췌: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앨봄 , 이반 일리치의 죽음/톨스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