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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쓴다는 것

인터넷에 공개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가 글을 읽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100% 열어두는 것이다. 그래서 나 말고는 열어보지 않을 일기장에 쓰는 것과 인터넷에 글을 쓰는 것은 다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글이며, 한번 표현된 이상 책임까지 따르게 된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은 확실히 글을 쓰기 어렵게 만든다. 처음부터 지금쓰고 있는 글을 공개할지 공개하지 않을지를 정하고 글을 쓰지는 않는다. 글을 쓰다가 글이 너무 엉망이 되거나, 누군가가 읽어서는 안되는 글이 된다면 글은 당연히 비공개로 설정한다. 아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그건 내가 이 글은 공개해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오로지 나만 읽는 나의 글은 나에게 무엇일까. 마치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도. 우린 계속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타인이 바라보는 날 의식해서 더 꾸미지만, 정작 타인은 서로에게 많은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아예 없지도 않다. 그래서 그게 어렵다. 공개는 하고 싶지만, 차마 공개하기엔 부끄러운 글들이 어렵다.

우린 웃고, 우린 울며 살아가야지

폴 오스터 <선셋파크 >를 읽었으니 쓰는 글

소설이건 영화건 처음 접하면 그 작품을 받아들이는 동안 '이 사람과 함께 여정을 해야겠다'라고 받아들여지는 인물들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 여정동안 나와 그 인물의 짝사랑이 시작되는것이다. 그 인물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지만, 나는 작가의 글을 통해 그인물을 지켜보며 나만의 짝사랑을 키워 나간다. 흥미롭게도 이번 소설에서는 그런 인물이 한 둘이 아니었다. 주인공 마일스는 물론, 필라, 빙, 앨런, 앨리스, 마일스의 아버지 모리스,  엄마 메리-리까지 모두 내가 아끼고 끌어안고 싶어 마다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뉴욕 선셋파크 근처의 비어있는 집을 무단점유 하여 살아가는 네 명의 젊은이를 비춘다. 그들 모두는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마냥 자유롭게 살아간다. 때로는 본인의 의지대로, 때로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들과 함께 바람에 맞춰 흔들리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드 프렌즈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뮤지컬 렌트 때문이었는지 늘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한 집에서 살아가는 것을 꿈꿔 왔다. 도쿄의 게스트하우스 시절은 내가 바라오던 모습이 가장 가깝게 이뤄졌던 시기다. 함께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가족처럼 마음이 잘 맞았으며, 다들 제 각기 인생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안고 있었다.

주인공 마일스 혼자만의 얘기만 존재했더라면, 그가 선셋파크의 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선셋파크라는 하나의 소설은 완성되지 않았다. 나의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와, 그리고 제 3자의 이야기는 쌓이고 쌓여 하나의 소설과 영화가 되어간다. 완성되어진 그 작품은 희극이기도 하면서 비극이기도 하고, 늘 그 중간을 오가는 느낌을 줄 것이다.  바람에 날리고, 비에 젖고, 뜨거운 햇살을 쬐고, 너를 안고, 너와 키스하고, 우린 웃고, 우린 울며 살아가야지. 살아가야지.

"이 모든 사실의 요점은 삶에서 상처는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입어 보아야만 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를 안는 기쁨, 다시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는 기쁨, 다시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기쁨, 다시 그녀가 먹는 모습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의 손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의 벗은 몸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의 벗은 몸을 만지는 기쁨, 다시 그녀의 벗은 몸에 키스하는 기쁨, 다시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가 머리 빗는 모습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가 손톱에 매니큐어 바르는 모습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와 함께 샤워를 하는 기쁨, 다시 책을 놓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기쁨, 다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모습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가 안젤라에게 퍼붓는 욕설을 듣는 기쁨, 다시 그녀에게 큰 소리로 책을 읽어 주는 기쁨, 다시 그녀의 트림 소리를 듣는 기쁨, 다시 그녀가 이 닦는 모습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의 옷을 벗기는 기쁨,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포개는 기쁨, 다시 그녀의 목을 보는 기쁨, 다시 그녀와 함께 거리를 걷는 기쁨, 다시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기쁨, 다시 그녀의 가슴을 핥는 기쁨, 다시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기쁨, 다시 그녀 옆에서 잠을 깨는 기쁨, 다시 그녀와 함께 수학 문제를 토론하는 기쁨, 다시 그녀에게 옷을 사주는 기쁨, 다시 그녀의 몸을 닦아 주고 그녀가 자기 몸을 닦아 주는 기쁨, 다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쁨, 다시 그녀와 함께 현재를 살아가는 기쁨, 다시 그녀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기쁨, 다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기쁨, 다시 그녀의 열렬한 검은 눈빛을 받으며 살아가는 기쁨, 그러고 난 뒤 지금부터 석 달 이상, 4월까지는 다시 그녀와 함께 있을 기회가 없으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 그녀가 1월 3일 오후 포트 오소리티 터미널에서 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 "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게 다예요. 더 나은 사람,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거요. 아주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좀 공허하기도 하지요.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4년 동안 대학에 가서 전 과정을 이수했다고 증명해 주는 학위증을 받는 식이 아니잖아요.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길이 없어요. 그래서 더 나아졌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더 강해졌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로 그냥 계속 밀고 나갔어요. 한참 지나니까 목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노력 자체에만 집중하게 되었어요. (사이. 또 와인 한 모금을 마신다)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저는 투쟁에 중독되어 버렸어요. 저 자신을 놓쳐 버리고 만 거죠. 계속 죽 해나갔지만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도 더는 모르게 되었어요."

"그는 아버지를 실망시켰고, 필라를 실망시켰고, 모든 사람을 실망시켰다. 차가 브루클린 다리를 건널 때 그는 이스트 강 건너편의 거대한 건물들을 바라보며 사라진 건물들, 무너지고 불타 더는 존재하지 않는 건물들, 사라져 가는 건물들과 사라지는 손에 대해 생각했다. 미래가 없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 가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부터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삶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자신의 몫이다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하기 시작하면 '술에 취한 것' 이라고들 많이 말한다. 비슷하게 같은 내용의 글을 반복해서 쓰기 시작하면 술에 취한 걸까. 지금 내가 쓰고 싶은 글은 내가 몇 년 전에 썼던 글과 정확히 같은 글이 될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같은 글을 다시 한 번 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그 내용에 대해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2009년 4월 11일  http://seonil.blogspot.com/2013/09/blog-post_8478.html 기뻤다. 내가 썼던 글들을 보면서 당시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를 알수있는데 그 생각들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내 글들이 예전의 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때 당시 그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에 놀라버린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글쓰기에 집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글쓰기는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내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것은 한 나라의 일들을 기록하는 역사와도 같다. 이번처럼 예전에 썼던 글들에서 지금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2012년 2월 15일 http://seonil.blogspot.com/2013/09/blog-post_5001.html몇 개의 일기를 읽어내려가면서 난 '삶의 이어져 있음' (이 글의 주제)을 느끼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일기를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면 갈수록 그러한 글들이 나의 지금 모습에 반영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그리고 아래의 일기가 3년 전 딱 이 맘 때 내가 쓴 글이다.난 어젯밤 이 글을 읽고서 내 스스로 갇혀있던 고민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된다.이것이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삶'이 순간순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우주다.  

2013년 4월 17일 봄날  http://seonil.blogspot.com/2013/10/blog-post_9417.html
하나의 생각은 한 사람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글을 통해 공유되게 된다. 말그대로 시공간을 아우르며 우리는 모두 연결된다. 과거의 너와 미래의 나, 과거의 나와 미래의 너는 서로의 글을 읽으며 서로의 삶에 영감을 주며 공존한다. 그러니까 좋은 생각을 많이 하련다. 이글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내가 됐든, 타자가 됐든 결국엔 어느 누군가와 연결된다는 생각을 한다면 좋은 생각만을 담지 않을 수가 없다.
2년 전, 4년 전 이맘때의 글에서도 '연결'과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니, 얼마나 재밌나.지금으로부터 2년 후의 4월에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위와 같은 이야기를 또 한번 하지 않을까.

위의 글들, 그러니까 6년전, 3년전, 2년 전의 글들은 사실 내용이 조금 다르게 표현되었을 뿐 모두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서 2015년 4월 난 또 다시 한 번 이에 대해 글을 쓰려 한다. 왜 같은 얘기를 누차하려고 하는 걸까. 상황이 다르다. 2009년, 2012년, 2013년 각각 내가 둘러쌓여져 있던 환경과 사오항이 모두 달랐다. 2015년 지금도 매우 다르다. 2009년은 해군 상병 때였고, 2012년은 취업에 대해 고민을 하던 대학교 4학년 이었고, 2013년은 갓 졸업을 하고서 코트라에서 인턴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지금은 하던 일을 그만 두고서 새로운 도전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새로운 도전'이라고 표현을 해야만 내가 처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 같다.)

헤쳐나가고 있는 인생의 상황이 모두 다름에도 '나'라는 사람은 나의 '글'을 통해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금 발견한다. 발견하는 모습 - 과거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고, 생각에 성장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모습 - 은 나에게 실망을 안겨줄 수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건 안도감과 비슷한데, 어떤 안도감이냐면, 내가 과거의 '나'의 모습을 가끔씩 되돌아 보고서, 때로는 '지금보다 과거의 가졌던 생각이 더 좋았구나' , '과거를 보고서 지금을 좀 더 반성해야지'라는 느낌들에서 오는 안도감이다. 과거에 순간순간 품었던 생각들은 어김없이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왔다. 

정말 감사하게도 내 주변엔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가족들, 친구들. 어떠한 삶을 살아내든 나를 믿고서 끝까지 응원하겠노라고 말해준다. 심지어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고 '너는 옳은 선택을 할거니까'라고 말하며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주는 사람들도 많다. 누군가의 인생에 대해 무한한 지지를 보내주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러한 수많은 위로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적절한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건 과거에 내가 품었던 생각들이다. 무조건적인 지지와 위로는 당연히 아닐뿐더러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해주고, 언제나 현재의 모습을 반성하게 만들어 준다.

언젠가 이런 문장을 썼다. 
우리는 현재의 시간만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여러 시간들 속에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여러시간들 속에 존재하는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 지지 않기 위해 현재의 시간에 충실해야 한다.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서, 그때 그시절 열심히 살아줘서 고마워란 메세지를 전하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우리는 (모든게 연결되어 있는) 이 우주 속에서의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 과거의 노력들이 지금 하나도 헛되이 쓰이지 않는 것처럼, 지금의 노력 또한 미래에는 더욱 귀중하게 쓰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생각이 가는대로, 나를 둘러싼 우주가 미소지을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가기로 한다.

지금 여기의 나의 '삶'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학시절 가장 좋아했던 강의에서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처럼 말이다.
“우리의 현재 모습엔 과거와 미래가 함께 있다.”
과거에 서있던, 미래에 서있을, 그리고 지금 서있는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삶이다. 살아온 삶을 후회하는 건 과거의 나에게 떳떳하지 못한 모습이고, 지금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미래의 나에게 미안한 모습이다.

나는 글을 쓰며, '우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무척이나 좋아한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나의 우주'가 펼쳐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작은 우주일 수도 있고, 상상도 못하리만큼 큰 우주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난 살아가며 내 우주를 만들어간다. 내 '우주'안의 수없이 많이 펼쳐진 시공간 속에서 무수한 생각들을 헤집으며 살아가다보면, 지금 이 순간 품었던 생각을 한 동안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나는 언젠가 다시 한번 이 글로 들어올 걸 알고 있다. (이미 수차례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 다음은 몇 년 후일지, 그 때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바다. 지금 쓴 글을 까맣게 잊어버릴 10년 후일 수도 있는 것이다.(그리 멀진 않을 거지만) 몇 년 후의 '나'는  지금 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우주가 펼쳐져 있을까. 이번에 글을 쓰게 된 계기는, 강상중 교수의 '마음의 힘'이라는 책을 읽은 덕분이다. 아마 몇 년 후에도 어떤 계기로 다시 이곳을 들어오겠지.

2015년 4월 30일, 이 글의 마무리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바로 옆에 꽂혀있는 책, 군시절에 읽었던<마지막 강의>의 맨 마지막장에 썼던 후기로 마무리 해야겠다.

"삶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자신의 몫이다. 나도 내 인생을 한 편의 영화로 만들 것이다. 내가 확신힌다. 모든 건 나에게 달려있다. 2008년 8월 21일"

모든 창작은 빚짐이다

(남들에게는)보잘 것 없는 에세이겠지만, 뜨거운 햇볕 아래 서있다가 문득 글을 시리즈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시리즈 제목을 정했다.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다. 써보다가 글이 잘 써지면 끈기를 가지고 써보고, 그렇지 않고 '글을 이어나가는' 흥미를 찾지 못하면 조용히 접을 생각이다.

최근 내가 글을 잘 못쓰는 명백한 이유를 한 가지 찾았다. 책을 안읽는다. 문장의 흡수가 적으면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글을 많이 읽어야만 글도 써지고 싶은 법이다.모든 창작이 그러함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무는 유를 창조하지 못한다. 모든 창작은 빚짐이다. 그러니 빚지자. 주위의 모든 존재에 빚을 지자. 영화-음악-책-그림-사진-사람을 관통하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빚을 지고서, 거기에 나만의 숨을 넣어 창작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