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철학> 에세이
존엄사 논쟁을 통해 본 인간의 생명
경영학과 06 김선일
2009년 5월 21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존엄사를 인정하는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대법원은 말기 암 환자인 김 모씨 측이 병원을 상대로 낸 무의미한 연명 치료장치 제거 등, ‘존엄사 허용’ 청구 소송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원고 측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법원은 ‘짧은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이 명백할 때는 연명치료를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 존엄을 해치므로 환자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 인간 존엄과 행복추구권을 보호하는 것’ 이라고 판시했다. 이어서 ‘환자는 사전의료지시 등의 방법으로 미리 의사를 밝힐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평소 가치관, 신념 등에 비춰 객관적으로 환자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인정되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 했다. 그러한 판결이 있은 후 병원은 식물인간인 김 모씨의 산소호흡기를 제거했고, 그 후 수 일 내에 사망할 것으로 여겨졌지만 201일 동안 생존을 하면서 존엄사의 법제화에 대한 논란이 꺼지지 않고 있다. 인위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은 윤리에 어긋난다는 종교적 문제와 환자의 상태를 얼마나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느냐의 기술적인 문제들이 논란의 중심에 있다.[1]
존엄사란 인간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와 가치를 지키면서 존엄하게 죽을 수 있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즉 말 그대로 품위 있는 죽음을 말한다. 인간적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의 의학적인 치료를 다했음에도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임박할 때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질병에 의한 자연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2] 그런 점에서 단순히 편안하게 죽도록 하는 안락사와는 구분을 지으며 사용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존엄사를 안락사 중에서도 소극적 안락사[3]의 범위로 보기도 한다.
우리는 언제나 주위에서 죽음을 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한국에서는 매년 암을 비롯해 각종 질병 등으로 사망하는 환자가 26만 명이라고 한다. 또 해마다 새로 발생하는 암 환자 12만여 명을 합쳐 모두 36만 명의 환자가 지금 안과 싸우고 있다. 그리고 통계수치에 포함되지 않은 적지 않은 식물인간도 많고, 치매환자(21만 명)와 파킨슨병 환자(7만 명)를 비롯하여 노인성 질환을 앓고 있는 인구는 102만 명이라고 한다.[4] 이들 환자의 가족들까지 합친다면 해마다 500~600만 명의 사람들이 죽음을 겪거나 옆에서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셈이다.[5]
나는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임종을 집에서 지켜보았다. 외할머니께서는 심장병 질환을 앓으시다가 돌아가셨고, 친할머니께서는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외할머니께서는 임종하실 때 우리 집에 머물고 계셨는데 임종하시기 전에 아버지에게 부탁하여 자신이 사셨던 집과 마을을 돌아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외할머니를 차에 태우고 외할머니께서 평생 동안 사셨던 마을을 돌아보고 오셨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숨을 거두셨다. 외할머니께서는 자신의 임종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생을 마감하시기 전에 자신이 평생 동안 지냈던 곳을 둘러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비록 심장병 질환으로 고통스러운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긴 했지만 죽음을 맞이하시던 그 순간은 편안했을 것이다. 외할머니께서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평생을 살아온 마을과 하나하나 손때가 묻어있는 집을 돌아보시면서 무슨 회상을 하셨을까. 아마도 이제는 더 이상 만질 수 없게 되는 집의 구석구석과 더 이상 맡을 수 없는 고향의 냄새를 기억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리고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를 먼저 여의신 후로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셨는데, 병으로 고생을 하시다가 어느 날 밤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생을 마감하셨던 그 날 아침 할머니의 표정은 무척 평안해 보이셨다.
나의 외할머니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임종 때가 오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모두가 자신의 임종 때를 알고서 죽음을 받아들 일 수 있다고 한다면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과 죽음을 지켜보는 가족들 모두 좀 더 평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렇게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란 쉽지 않다. 말기 환자의 극심한 고통을 지켜보면서 함께 고통에 괴로워하는 가족들도 있고, 깨어나지 않는 환자의 곁에서 말없이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도 있다. 하지만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우리는 조금 더 이 세상에서 남아보고자, 사랑하는 가족을 조금 더 우리 곁에 남겨두고자 노력을 한다. 같이 살아 숨쉬는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한 차례 존엄사 허용 판결 후, 존엄사 논쟁이 있고 나서 한 리서치회사에서 한국인들의 존엄사에 대한 인식을 묻는 설문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한국인의 84.5%가 존엄사 허용을 찬성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유난히 종교적 이유로 반대가 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독교인들의 여론에서도 80%에 가까운 찬성률을 보였다. 이미 한국 사회도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 퍼진 것이다. 하지만 그 리서치 결과를 보고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 결과가 나와는 관계가 먼 미디어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나의 가족들과 관련된 문제였다고 한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했을까. 나의 가족 중 한 사람이 치료법이 없고 회복이 불가능한 병에 걸린 뒤 의료장비를 통해 간신히 생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을 경우 나는 그때 존엄사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질 수 있을까. 아마 나는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조금 더 함께하고 싶어서 어떻게 해서든 치료를 해서 회복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고통의 시간을 함께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에 힘겨워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건 정말 큰 고통일 것이다. 만약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가족이 그만 고통을 겪고 싶다는 말을 전해온다고 할 경우 나는 또 어떻게 해야만 할까. 그 순간 생명의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고통을 끝내고 싶다고 하는 가족에게 있는 것일까, 고통스럽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가족을 곁에 두고 싶은 나에게 있는 것일까. 이번에는 그와는 반대로 내가 환자의 입장에 있을 때를 생각해보자. 나는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기 힘든 상황이다. 그래서 차라리 고통보다는 죽음을 택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과 가족들은 어떻게 해서든 나를 살리고 싶어한다. 그 순간 죽음을 판단할 권리는 과연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나에게 있는 것일까, 부모님께 있는 것일까. 나에게 생명을 준 것은 비록 부모님이라고는 해도 나에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생명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죽는 것만큼이나 복잡하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의지대로 삶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온 우주의 힘이 미묘하게 작용하여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게 됐고 그 뒤로는 온갖 문제들에 얽히고 얽히면서 살아간다. 시간 흐름 속에서 조금씩 삶을 살아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의미를 거미줄처럼 좀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엮어 나간다. 누구는 너무도 복잡하게 얽혀버린 실타래 같은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실을 끊어 버리기도 하고, 또 누구는 조금씩 조금씩 엉킨 실을 풀어나가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만은 피하기 위해 실같이 엉켜져 있는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살아간다. 어느 날은 모든 일이 잘 풀려서 행복한 시간으로 보내기도 하는 반면 어느 날은 더 복잡하게 엉켜버리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이란 또 인간의 삶이란 힘든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풀어나가야 하는 이유는 곧 그러한 과정이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은 고난의 여정이고 고통의 연속이라는 말에서의 고통은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미세한 신경세포를 통해 아주 작은 고통에도 반응하는 감각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동물은 먹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고, 큰 상처를 입어 죽을 수도 있고, 물에 떠내려가거나 바다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고통보다는 손바닥에 박힌 작은 가시가 주는 육체적 고통에 더 신경을 써야 하고, 오히려 우리에겐 그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유엔에 들어가 지구의 병들어 있는 환경을 살리고자 운동을 하는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찾아온 지독한 치통에 고통스러워 하며 눈물을 흘리는 법이다. 병들어 있는 환자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마음이 환자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하지만, 애초에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의 크기는 같은 잣대로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육체적 고통을 직접 몸으로 겪고 있는 당사자의 그 고통은 오로지 당사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본다면 침대 위에 누워있는 가족의 육체적 고통을 내가 감당하거나 나눠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는 침대 위의 환자의 의견을 존중해야 되지 않을까. 결국 가족들이 가졌던 정신적 고통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아물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존엄사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만약 존엄사를 허용하면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생길 수 있고 존엄사를 악용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말한다. 찬성 쪽에서는 존엄사는 환자의 교통을 경감시켜주고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존엄사의 찬반 양론, 서로 입장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모두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다는 것에 전제를 두고 있다. 다만 시대의 흐름은 점점 더 존엄사를 허용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아직 한국은 최초의 존엄사 허용 판결 이후 논쟁으로 인해 법제화 단계가 더디게 진행 중이지만, 스위스, 벨기에, 독일. 일본 등의 국가에서는 이미 법제화가 되었거나 존엄사에 대한 사회의 긍정적 시선이 자리를 잡았다. 물론 나라마다 죽음에 대한 사회문화적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좀 더 죽어가는 사람을 위하는 길인가에 대해서는 고민이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이를 지켜보는 산 사람들의 고통도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 나를 비롯해 한국 사람들이 아직은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것에 대해 인식이 부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인들의 존엄사에 관한 문제와 관련하여 한 저자가 말한다.[6]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가족주의 성격이 강하다. 합리성과 자율성이 지배하고 개체성이 강조되는 서구 사회와는 달리 우리는 죽음을 가족의 틀 안에서 처리하려고 한다. 그래서 존엄사를 요구한 죽어가는 자의 뜻이 존중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서구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죽음의 개념에 관심을 보이는 젊은 세대들이 이런 점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 말기환자나 치매환자 등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우리들이 불효와 효도의 경계선에 방황하는 것도 이런 현상의 하나이다. 언뜻 품위 있는 죽음을 머리에 떠올리다가도 따지고 보면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원점에서 헤맨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웰다잉이라는 문제가 결국 웰빙의 틀 안에 있다는 것을 감지하면서도 품위 있는 죽음에 무감각한 것처럼 행동한다.”
“경제력이 커짐에 따라 국가의 품격을 따지는 시대일수록 웰빙 속에 웰다잉을 생각하는 사회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웰빙과 웰다잉에도 똑같이 품위와 품격이 있다. 그것이 삶의 보람이요, 의미 있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이라는 말에는 삶과 죽음이 함께 들어있다. 즉, 삶과 죽음은 어떠한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길 위에 놓아져 있는 흐름인 것이다. 존엄사의 논쟁의 본질도 결국은 그 흐름,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인식을 받아들이고 배워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논쟁 가운데서도 본질을 잃으면 안 될 것이다.
[1] 존엄사 논란 김옥경 할머니 201일 만에 사망(폴리뉴스, 신영호)
[2] 위키피디아 ‘안락사’ 참조
[3] 환자가 겪고 있던 질병 등의 원인으로 인해, 회복이 불가능한 과정에 들어섰을 때 안락사를 수행하는 사람이 죽음의 진행과정을 일시적으로 저지하거나, 연명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이를 방치함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이다.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 사이의 차이점은 어떤 적극적인 행위에 의해서 생명을 끝내는 것과 연명치료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생명을 끝내는 것의 구분이다.
[4]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정책연구원 2009년 노인성 질환 진료추이 분석
[5] 해피엔딩, 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최철주)
[6] 인용 <해피 엔딩, 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최철주, 궁리)
여전히 읽어봐도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 글쓰기 연습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