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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를 진실로 충만하게 사는 행위, 그것이 최고의 예술이다.


헨리데이비드소로, Walden


"광활한 우주에 널리 흩어져 있는 서로 다른 수많은 다양한 존재들이 동시에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자연과 인간의 삶은 우리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하다.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누가 감히 장담하겠는가? 우리가 잠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가능하겠는가? 우리는 덧없이 짧은 시간 동안 이 세상에 존재했던 시대들을 모두 체험해야 한다. 또한 각 시대에 존재했던 서로 다른 세상들을 모두 체험해야 한다. 역사, 시, 신화를 보라! 다른 이들의 경험을 적은 글 중에 이보다 더 경이롭고 유익한 글은 없다."

"나의 여생은 내가 지금까지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실험이다. 그들이 그들의 삶을 살아보았다는 사실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묵묵히 절망적인 삶을 꾸려 나간다. 체념은 절망으로 굳어버린다. 절망의 도시를 뒤로하고 절망의 시골로 낙향한 사람들은 족제비와 사향뒤쥐를 벗 삼아 자기 자신을 위로한다. 흥미와 오락이라고 불리는 것조차도 그 저변에는 절망이 숨어 있다. 사람들은 일을 먼저 하느라 즐길 여유도 없다. 지혜로운 이는 삶을 절박하게 만드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과 삶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교리문답식으로 따진다면, 사람들은 마치 통상적인 삶의 방식을 선호했기에 그것을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깨어 있는 건전한 본성은 해가 분명히 솟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인간의 삶의 여건이 개선된 상태를 문명이라 말한다면(현명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긴 하나, 나는 문명이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의 여건을 개선한다고 생각한다.) 문명은 비용을 증가시키지 않고도 인간에게 보다 나은 주거 여건을 제공해야 한다고 본다"

"비싼 비용을 들여 공부를 하는데 인생을 놀이 삼아 살거나 단순히 연구 대상으로 보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으로 살아보라는 말이다. 젊은이들이 인생을 사는 법을 배우는 데 있어서 직접 삶을 살아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삶을 경험하는 것은 수학 문제를 푸는 것만큼 정신운동이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보통 성공적이라고 여기고 칭송해 마지않는 삶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 왜 우리는 수없이 다양한 삶의 방식들 가운데 오직 한 가지만 과대평가하는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람결에 실려오는 그 소리를 듣는 데 쏟아부었고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우리가 소박하고 현명하게 산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고된 시련이 아니라 즐거운 유희라는 것을 나의 신념과 경험을 통해 확신한다. 소박한 삶을 영위하는 나라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삶에서 보다 인위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나라들에게는 즐거운 오락처럼 보인다. 사람은 눈썹에 땀이 뚝뚝 흘러내릴 정도로 고되게 밥벌이를 할 필요가 없다. 물론 그 사람이 나보다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두 젊은이가 함께 세계 여행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돈이 없는 젊은이는 여행하는 동안 선원 일도 하고 농사일도 거들어서 여비를 마련했고 다른 한 명은 주머니에 환어음을 갖고 있었다. 둘 중 하나는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이 두 젊은이가 ‘서로 돕는’ 여행의 동반자로 오래가지 못했으리라는 점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들은 여행에서 첫 번째 시련이 닥치자마자 헤어졌으리라. 앞서 말한 대로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오늘 당장 길을 떠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이와 함께 여행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떠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므로 한참 뒤에야 출발하게 된다."

"인간의 발명품들은 그저 겉모양만 번지르르한 장난감이기 마련이고 인간이 진지한 일에 관심을 쏟는 데 방해가 된다"

"이렇게 인생에서 가장 가치 없는 노년기에 자유를 누리기 위해 인생 최고의 순간인 젊음을 돈 버는 데 허비하는 모습을 보면, 노후에 영국으로 돌아와 시인으로 여생을 보내기 위해 돈을 벌러 인도로 건너간 영국인이 생각난다. 그 영국인은 인도로 갈 것이 아니라 즉시 자기 집에 있는 다락방에 올라가 시를 써야 했다. "

"우리의 정신이 깨어나는 아침은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아침이면 우리 안의 몽롱함이 사라지고 낮과 밤에는 잠들어 있던 우리 자신의 일부분이 깨어난다. 우리의 이성이 아닌 하인의 기계적인 손길로 깨어나는 하루로부터 기대할 것은 없다. 우리 내면으로부터 새롭게 얻은 힘과 열망이 우리를 깨우면 공장의 종소리가 아니라 천상의 음악이 파도치고 향기가 대기에 충만하며 오늘의 삶은 어제보다 한 차원 높아진다. 그리하여 어둠은 결실을 맺고 빛만큼 이로움을 증명한다. 오늘이 어제보다 순수하고 성스러운 시간으로 충만하다고 믿지 않는 사람은 삶에 절망해 어둠 속으로 쇠락해 간다. 감각적인 삶의 일시적인 휴지기를 가진 후 인간의 영혼, 아니 인간의 장기(臟器)는 매일 활력을 되찾고 그의 진수(眞髓)는 다시 숭고한 삶을 시도한다. 기억에 남는 일들은 모두 아침 시간이나 아침과 같은 분위기에서 일어난다. 베다는 “모든 지성은 아침에 깨어난다.”라고 한다. 시와 예술, 인간의 업적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하고 훌륭한 업적들은 모두 아침에 행해진다. "

"아침은 우리가 단잠을 자는 사이 우리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믿음과 함께 아침에 대한 무한한 기대감을 갖고 깨어나야 한다. 인간이 의식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고양시킬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그 무엇보다도 나를 고무한다. 훌륭한 그림을 그리거나 상을 조각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행위는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행위는 그러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올바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며 이는 우리의 도덕적 능력으로 가능하다. 하루하루를 진실로 충만하게 사는 행위, 그것이 최고의 예술이다. 누구든 자기 삶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도 그의 정신이 가장 고양되고 명징(明澄)한 시간에 관조할 가치가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얻는 무의미한 정보를 거부하면, 아니 모두 소진해 버리면 관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신탁이 알려 주리라."

"여명이 밝아올 때 문과 창문을 모두 열어놓은 채 앉아 있노라면 눈에 띄지 않고 집 안을 날아다니는 모기의 희미한 소리가 명성을 찬양하는 여느 나팔 소리만큼이나 나를 감동시켰다."

"깨어 있음은 살아 있음이다. 나는 아직 진정으로 깨어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따라서 제대로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 깨어 있지 않은 이의 얼굴을 응시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영원에는 진실되고 숭고한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과 공간과 사건들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글을 깨우친 이상 평생을 맨 앞줄의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 단음절 단어만 반복하지 말고 최고의 문학작품을 읽어야 한다."

"나의 경험이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나는 나의 어떤 일부가 존재하고 비판한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이 비판하는 존재는 더 이상 나의 일부가 아니라 관객이며, 나와 함께 경험하지 않고 나의 경험을 예의 주시한다. 그 존재는 타인이 내가 아닌 만큼이나 내가 아니다. 비극일지 모르는 인생의 극이 막을 내리면 관객은 제 갈 길을 간다. 그 인생극은 관객에게는 가공의 이야기, 상상 속에서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다. 이러한 이원성으로 인해 때때로 우리는 그리 좋은 이웃이나 친구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조각가이자 화가이고, 우리가 작품을 만드는 데 쓰는 재료는 자신의 살과 피와 뼈이다. 고결함을 통해 잘 다듬어지고 채색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며, 비천함과 관능적 욕망은 인간을 야수처럼 만든다."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쉽게 아무 생각 없이 특정한 길을 선택하고 갔던 길을 반복해서 밟는다. 나는 숲 속에 기거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이미 집 문 앞에서 호숫가까지의 길을 닳도록 오갔다."

"우리는 왜 가망도 없는 일에 그리도 서둘러 성공하려고 기를 쓰는가? 어떤 이가 자기 벗들과 보조를 맞추어 걷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에게 들리는 북소리 장단이 그의 동료들에게 들리는 북소리와 다르기 때문이리라. 운율이 고르든 멀리서 어렴풋이 들리든 각자 자신에게 들리는 음악 소리에 맞춰 걸음을 내딛자. 인간에게 있어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처럼 빨리 성숙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봄을 서둘러 여름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재능을 발휘할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대체할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자포자기하고 보잘것없는 현실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갖은 고생 끝에 우리 주위에 푸른 유리로 하늘을 만든다고 해도, 그것을 완성하고 나면 유리로 된 하늘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너머에 있는 드높은 창공을 염원하게 되리라. 그래도 유리로 하늘을 만드는 헛수고를 하겠는가?"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겹고 척박하다고 해도 회피하지 말고 삶을 직면하고 살아내자. 삶을 회피하거나 욕설을 퍼붓지 말자. 삶보다 더 보잘것없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가장 부자일 때 삶은 가장 가난해 보인다. 트집을 잡으려 드는 사람은 천국에 대해서도 흠을 잡는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우리의 삶을 사랑하자. 가난한 집에서조차 즐겁고 흥겹고 거룩한 시간들은 있다. 저무는 해는 부자의 저택이나 빈민 구제소의 창문이나 똑같이 밝게 비춘다. 가난한 집의 문 앞에 쌓인 눈도 이른 봄에는 녹기 마련이다."

"자신이 품은 꿈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가고 자기가 꿈꾼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꿈을 달성하게 된다. 꿈을 추구하자면 포기해야 할 것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한계도 극복해야 하리라. 꿈을 추구하면 새롭고 보편적이고 보다 진보적인 법칙이 자신의 주위와 내면에 형성되기 시작한다. 혹은 기존의 법칙이 더 진보적인 의미에서 자신에게 적합하게 확장되고 해석된다. 그리하여 그는 한층 더 숭고한 존재의 법칙을 따를 권리를 지니고 살게 된다. 그러한 법칙에 맞추어 그가 자신의 삶을 담백하게 만들면 우주를 관장하는 법칙도 그리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고 고독은 고독으로 느껴지지 않으며, 빈곤과 약점도 더 이상 빈곤과 약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공중에 성채를 짓는다고 해도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다. 그곳이 바로 성채가 있어야 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성채들 아래로 기초를 단단히 올리면 된다."

"인간 사회에 도사리고 있는 늪과 유사(流砂)도 이와 같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진실인 경우는 아주 드물고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해도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나는 욋가지와 회반죽에 못을 박아 넣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리라. 그런 행동을 하고 어찌 밤에 잠을 이룰 수 있겠는가. 망치를 들고 못을 박아 넣어야 할 홈을 스스로 잘 찾자. 다른 사람의 말에 의존하지 말자. 못을 단단히 잡고 제자리에 정확하게 박아 넣자. 그리하여 밤중에 깨어나 흡족한 눈으로 우리의 작업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자. 시상이 떠오르게 할 정도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자. 그렇게 해야, 오직 그렇게 할 때만 신이 우리를 도우리라. 우리가 박아 넣은 못은 하나하나가 이 우주라는 거대한 기계가 작동하는 데 꼭 필요한 부품이어야 한다. 그러니 작업을 중단하지 말자."

"그러나 바로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이고 그런 내일은 단순히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저절로 오지 않는다. 우리 눈을 멀게 하는 빛은 우리에게 어둠이다. 깨어 있는 자만이 동트는 장관을 목격할 수 있다. 앞으로도 수많은 날들이 밝아오리라. 태양은 한낱 샛별에 불과하다."



우리의 인생은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잃을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뭔가 잘못돼도 아주 크게 잘못 됐다. 늘 의지를 가지고 시작되는 사유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이내 힘을 잃고 그 자리에서 멈춰 버리며, 몸은 눈을 뜨면 움직이고 눈을 감으면 단절된 세계로 다시 들어가버리는 그 이상의 그 이하도 아닌 패턴만을 반복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내가 공부를 하고 싶은건지,  멋진 커리어를 만들어가고 싶은건지, 꿈? 꿈을 이루고 싶은건지, 아니면 영화를 보며 책을 읽으며 조용히 유유자적한 삶을 누리고 싶은건지. 명확한 구석이라곤 어느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눈물이 많아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책을 읽어도, 영화를 봐도 울컥하는 순간들이 너무 많다.  좋게 보자면 감성이 풍부해진거고, 안좋게 보자면 마음이 유약해진거다. 군대에 있을 때, 고민을 했던 것 한 가지가 눈물이 말라버렸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이 나오질 않아서 고민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의 고민을 하고 있는 상황이 재밌다.

예전에는 어떤 생각이 시작을 하게 되서 글을 쓰게 되면 최대한 내가 도출할 수 있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래야만 모든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긍정적인 결론을 만들어내는 것도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복잡한 상황을 긍정적인 문장으로 정리해낼만한 최소한의 마음의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 마저도 잃게 된다면 우리의 인생은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허지웅 작가는 '버티는' 삶이란 걸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삶은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심하게 공감되는 단어다. '버티다' 책을 좀 더 읽고서 어떻게하면 잘 버틸 수 있는지 배워야겠다. 책에서 그걸 알려줄지는 잘 모르겠다.

잦은 실패야말로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You Are Not So Smart

당신의 진정한 자아는 당신이 여태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복잡한 구조물이다. 당신의 행위가 점화 효과의 결과일 때, 그러니까 적응무의식에서 어떻게 행동하라고 보낸 암시의 결과인 경우, 당신은 자신의 기분과 결정과 사고를 해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한다. 머릿속 장막에 가려진 정신이 조언을 건넸음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인간 행동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의식의 통제 아래 이뤄지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개인의 공간을 철저하게 관리하지 않아 혼란과 혼돈이 발을 들이게 놔둔다면 그것들은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당신이 당신의 공간을 더더욱 방치하도록 만들지 모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긍정적인 작용이 삶의 질을 높이도록 해야지, 삶에서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직접 점화 효과를 일으킬 수는 없지만 그래도 스스로 바라는 정신 상태를 만들기 위해 주변 공간을 조성할 수는 있다.
 
이 머릿속에서 정보를 꺼내 저 머릿속으로 넣으려면 의사소통 같은 것을 통해 전달되어야 한다. 표정, 목소리, 몸짓, 지금 읽고 있는 단어들. 이런 투박한 도구들에 의존해야 한다. 감정이 아무리 강하고 생각이 아무리 강력해도 당신의 마음 밖 세상에게는 마음 속 세상만큼 극심하고 강렬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투명성에 대한 환상이다.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 알고, 그러한 생각과 감정이 구멍들을 통해 새어나가 세상에 드러나고 외부에 인식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당신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가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과대평가하며 다른 사람 역시 그들만의 작은 비눗방울 안에 갇혀 자신들의 내부 세계에 대해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현상학은 너무나 강렬해서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는 그 너머를 보기가 쉽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가설은, 당신은 모두가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의 행동과 외모를 평가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 당신은 대부분 배경의 일부로 사라진다는 스포트라이트 효과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효과는 너무 강력해서 마치 상상 속 스포트라이트가 당신의 몸짓, 언어, 표정까지 모두 꿰뚫고 심지어 당신만의 은밀한 세상까지 낱낱이 까발리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사람들 앞에 설 때,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를 할 때, 뇌 안에는 불안이 가득해도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당신의 생각보다는 훨씬 침착해 보일 것이다. 그러니 긴장을 풀고 웃어라. 초대받은 집 식탁에 차려진 음식이 개밥으로밖에 쓸 수 없을 것 같아도 제발 먹지 말라는 당신 뇌의 간절한 경고는 음식을 차려 내온 집주인에게 들리지 않는다.
설명하는 과정이 까다로울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화는 내지마라. 그 사람이 당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이 당신만큼 영리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그러니 긴장을 풀고 차분하게 계속 가라.

지난 30년에 걸친 연구에 따르면,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이 직장 동료보다 능력 있고, 친구보다 도덕적이며, 일반 대중보다 친절하고, 동년배보다 지적이며, 평균적인 사람보다 매력 있고, 지역 사회 사람들보다 편견이 덜하며, 또래보다 젊어 보이고, 자신이 아는 대부분의 사람보다 운전을 더 잘하며, 다른 형제자매들보다 낫고, 평균 수명보다 더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방금 이 문장을 읽으면서 당신은 "아닌데, 난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데"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이 평균적인 사람보다 스스로에게 더 정직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그렇게 영리하지 않다.)
어느 누구도,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이 통계를 구성하는 인구의 일부로서 평균을 산출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당신은 자신이 평균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은 그렇다고 믿는다. 자기 위주 편향 self-serving bias 에서 비롯된 이러한 경향을 기만적 우월감 효과 illusory superiority effect 라고 부른다. 당신은 주변의 모든 이들만큼이나 굉장히 자기중심적이다. 당신의 세상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이기 때문에 당신의 생각과 행동의 대부분은 당신의 개인적 세상을 주관적으로 분석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당신의 하루하루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은 저 멀리서, 혹은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보다 항상 더 의미가 있다. 당신의 능력이나 지위를 평가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게 되면 이러한 자기 본위가 당신을 하나의 숫자, 하나의 평균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당신은 이런 생각을 기분 나쁘게 보고 스스로를 고유한 존재로 바라볼 방법을 찾는다.

실제 난이도와 관계없이 그저 사람들에게 과제가 얼마나 어려울지 미리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자신을 상상 속 평균과 비교해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다.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쳐내기 위해 당신은 먼저 과제가 쉽고 간단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다면 기만적 우월감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대인관계와 사회적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인식할 때, 자기 위주 편향과 기만적 우월감이라는 심리적 장치를 사용한다. 당신은 낯선 사람보다 가까운 친구의 성공과 실패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당신은 버락 오바마나 조니 뎁이 성공한 사람들이란 걸 알지만 그보다는 직장 동료나 동창생,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아 온 친구들을 삶의 표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당신이 아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당신보다 더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고, 당신은 당신이 그들보다 더 인기 있다고 생각한다.

 통제력 착각에 대해 알았다고 해서 삶을 힘들게 만드는 상황을 극복해 나가기 위한 노력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어쨌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아무 결과도 보장받지 못하니까. 다만 어떤 노력을 하든 미래는 대부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혼돈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라. 혼돈을 계획에 끼워 넣어라,. 어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실패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사전에 실패는 없다고 믿는 사람은 절대 실패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예측 가능하고 대처 가능한 일도 있지만 사건이 일어나는 시기가 미래일수록 당신이 사건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은 줄어든다. 당신의 몸에서 멀어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관여할수록 행사 할 수 있는 권력은 줄어든다. 1조 개의 주사위를 10억 번 굴리는 것처럼 게임에 작용하는 요인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무작위적이어서 진정으로 대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름의 모양을 예측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과정 또한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 작은 것들, 중요한 것들을 통제하는 방법을 찾으려 애쓰고 그것들이 쌓여 행복이 되게 하라. 그러나 어쨌든 더 큰 그림에서 보면 당신이 상황을 통제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심리학에선느 진정한 객관성이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기억, 감정, 조건부여를 비롯한 기타 모든 종류의 정신적 표류가 새로운 경험을 얻는 족족 오염시킨다.

자성예언은 현실에 대한 사회적 정의에서 그 힘을 얻는다. 당신의 인생은 대부분 논리적으로 정의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정의된다. 다른 사람들의 인식이 행동으로, 정책으로, 믿음으로 전환되면 인식은 현실이 된다. 인생의 너무나 많은 부분이 행동의 지배를 받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전문가의 경우처럼 사람들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증을 얻기 위해 책을 구매하고 있었다. 크레브스는 수년간 아마존의 구매 성향과 사람들이 소셜네트워크에 모이는 경향을 조사했는데, 그의 조사는 확증 편향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가 예측하는 바를 잘 보여 준다. 당신은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옳다고 믿고 싶기 때문에 그런 믿음을 확증해 주는 정보를 찾고, 그와 반대되는 증거나 의견은 경시한다는 것이다. 반세기에 걸쳐 진행된 연구로 확증 편향은 정신적 장애 가운데 가장 믿을 만한 것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기자는 그 이야기와 반대되는 증거를 무시하는 경향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설을 증명하려는 과학작는 가설과 반대되는 결과가 나올 여지가 거의 없는 실험 환경을 조성하지 않아야 한다. 확증 편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음모론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인류는 정말로 달에 인간을 보냈을까?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2009년 오하이오 신문에서 실시한 한 연구에서는 사람들이 자신과 의견과 일치하는 논문을 읽을 때 36%나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신은 잡지 구독을 늘리고, 책을 읽고, 텔레비전을 몇 시간씩 보면서도 자신의 세계관과 반대되는 것은 절대로 찾아보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세계관에 대해 더욱 확신하게 되고, 그 누구도 당신을 설득할 수 없게 된다. 기억하라. 저 바깥에는 확증 편향에 길든 사람들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광고주에게 시청자를 팔아넘기려는 누군가가 늘 활보하고 있다는 것을.

기업의 홍보대사를 자처하지 말자. 당신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는데 잘못 결정했다고 여기게 되는 결정 후 부조화를 물리쳐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정당한 선택을 했다고 느낌으로써 스스로에게 드는 의문과 불안감을 줄여야 한다. 거기에 유대감, 세부적인 자아상, 그리고 각종 편향. 이 모두가 첨가되어 비로소 거대한 신경 집합체가 만들어진다. 그러니 다음에 당신이 가진 휴대전화나 자동차나 TV가 다른 제품보다 나은 점을 100가지는 말할 태세가 갖춰지더라도 그만 두라. 당신은 지금 타인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칭찬하려는 것뿐이니까.

체화된 인지 오류, 2008년, Lawrence williams와 John Bargh의 실험, 따뜻한 커피 혹은 아이스 커피르 들고 낯선 사람을 만나게 하는 실험. 당신은 밝은 색깔의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 친절하고 호의적인 사람으로, 즉 성격이 '밝은'사람으로 본다. 또 말하는 속도가 느린 사람을 덜 똑똑한 사람으로, 즉 이해가 '느린'사람으로 본다. 당신이 속한 문화권에서 어떤 비유를 사용하든, 일치하는 언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주변 세상에서 받는 느낌을 변화시키게 된다. 촉감 또한 이러한 현상의 강력한 형태로, 사물이 피부에 닿는 느낌은 사물이 마음에 닿는 느낌으로 바뀔 수 있다. 이와 같은 형상을 체화된 인지 Embodied cognition 라고 한다.

어떤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 그러니까 그 사람에 대해 알 만한 기회를 갖지 못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어떤 인물로 탈바꿈시키는 경향이 있다. 턱없이 부족한 경험과 잔뜩 과장된 공상으로부터 추려 낸 원형과 전형에 기대는 것이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늘 사회적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한다. 그리고 상사와 함께 있을 대의 당신은 각기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당신은 친구와 가족, 심지어 상사도 당신처럼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심리학자들은 대부분의 행동이 외부의 힘과 내부의 힘 사이에서 벌어지는 줄다리기의 결과임을 안다. 사람은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고유한 존재이므로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직장에 있을 때의 당신과 집에 있을 때 드러나는 성격이 다르다. 글로 적어놓고 보면 뻔한 소리 같지만 다른 사람을 평가할 대는 주변 상황의 힘을 곧잘 잊어버린다. 그래서 “잭은 모르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걸 불편해 해서 공공장소에서 만날 때는 한적한 곳을 찾는 경향이 있어.” 라고 말하는 대신 “잭은 수줍음이 많아”라고 말한다. 사회라는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는 그게 지름길이다. 당신의 뇌는 지름길을 아주 좋아한다. 주변 상황의 힘을 무시하기란 쉽다. 상황이라는 렌즈를 통해 사람을 보는 것은 사회심리학의 기초 중 하나로,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귀인이론 attribution theory 이라 부른다.

심리학자 해럴드 켈리에 따르면, 당신은 다른 누군가의 행동에 대한 원인을 찾을 때 일관성을 고려한다. 친구 하나가 당신이 아는 사람과 싸움을 벌였다면 먼저 이들의 행동이 과거의 행동과 일관됐는지 따져 본다. 그들이 사소한 의견 차이로 곧잘 싸움을 벌이곤 했다면 성격을 탓하지만, 대체로 차분한 사람들이었다면 싸움의 원인을 상황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이런 편법은 대체로 잘 들어맞는다. 세계가 지금과 같이 발전하기 전에는 매일 만나는 사람들의 일관성을 파악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현대사회에서는 종업원이나 지하철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일관성을 확인할 수 없다. 총기를 난사하는 사람이 과거에도 그런 행동을 했는지, 혹은 도로에서 끼어드는 사람이 항상 그렇게 욕먹을 짓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일관성을 확인할 수 없을 때 당신은 사람들의 행동을 성격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긍정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말하자 남자들은 여배우가 단순히 시키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안면서도 여배우가 자신들에게 정말로 호감을 가진 것처럼 느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그들이 실제로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냐에서 비롯될 뿐 배경과는 상관이 없다고 믿음으로써 근본적 귀인 오류를 범한다. 한 남자가 스트립 쇼를 하는 여자가 정말로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는 것이나 상사가 모든 부하 직원이 자신이 코스타리카에서 낚시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근본적 귀인 오류다.

잔혹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다.

사랑하는 이의 냉담한 태도가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나 극심한 심적 동요를 일으키는 문제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바에 무관심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당신은 근본적 귀인 오류를 범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표를 던질 때 그 사람이 표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회적 가면을 꾸며 냈는지는 무시한 채 그저 호감이 가고 친근해 보인다는 이유만을 내세운다면 역시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표를 던질 때 그 사람이 표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회적 가면을 꾸며 냈는지는 무시한 채 그저 호감이 가고 친근해 보인다는 이유만을 내세운다면 역시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호의를 성적 관심으로 평가한다거나 가난을 게으름의 결과로 평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한 원인을 찾으려고 하면 그 원인은 쉽게 찾아진다. 하지만 상황이 얼마나 강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먼저 고려하는 일은 거의 없다. 당신은 그 사람을 비난하면서, 그 사람의 환경이나 그의 동료들이 미친 영향은 비난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행동이 철저히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허수아비 오류
논쟁에서 지고 있을 때 당신은 종종 이런저런 비겁한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려고 한다. 치사하게 굴려는 건 아니었다 해도 화가 나서 말싸움을 하게 되면 사람 마음이란 것이, 대개 그런식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법이다. 이럴 때 가장 쉽게 사용하게 되는 논리적 오류로 허수아비 오류가 있다. 이 오류를 저지를 확률은 꽤 높은데도 우리가 이 오류를 사용하거나 자신도 모르게 이 오류를 범할 때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일이 자주 있다.
개인적인 문제든 추상적인 문제든, 어떤 논쟁을 시작할 때면 당신은 반박하고 논박하고 부인하기 쉬운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낸다. 혹은 상대가 주장하거나 변호하지도 않은 입장을 혼자 만들어서는 공격한다. 이것이 허수아비 오류다. 당신의 다른 사람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찰나, 그의 주장대로라면 세계가 미쳐 돌아갈 거라는 공상의 시나리오를 쓸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멋지게 허수아비를 세운 것이다. 주장의 부정적인 결과를 찾기는 쉽고, 이를 극복할 방안을 찾기는 어렵다. 한번 돌아보라. 애초에 상대방은 그런 주장은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는 자신의 제안 때문에 수많은 식당들이 줄줄이 폐업하는 일을 바라지 않는다는 입장을 모두에게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정 내에서 쉽게 닭을 키우는 조그만 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방안을 내놓는 대신, 당신이 만들어 낸, 깃털 날리는 최후의 날에 대해 반박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음에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을 때, 자신이나 상대방이 허수아비를 만들지는 않는지 주의하라. 누가 됐든 그 사람은 논리적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며, 설사 논쟁에서 그가 이기더라도 정말로 이긴 것은 아니다.

논쟁이 과열되면 상대방의 이름을 막 부르게 되기도 한다. 그럴 땐 상대방이 대변하는 입장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을 공격하게 된다. 저열하고 무지하다고 평가된 사람의 의견이라면 더 무시하기 쉽다. 그를 향해 편협한 인간이라고, 바보이거나 거지 같은 놈이라고 부르면 속이 시원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옳고 그 사람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당신은 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실수를 저지른다. 말하는 이가 누구인가, 또는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면 바로 인신공격의 오류 ad hominem fallacy를 저지르는 것이다.
흡연자가 식당 내 흡연이 합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이해가 관계된 일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손을 내저으며 의견을 무시해선 안 될 일이다. 그의 말이 타당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가 흡연자라는 사실이 당신의 판단을 뒤흔들도록 놔둬선 안 되는 것이다.

당신은 사람들을 인물됨에 따라 파악하고 그들의 행동에서 일관성을 찾는 경향이 있다. 이는 누구를 믿어도 좋은지 구분하는 데 대체로 유용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누구를 믿어도 좋은지 따지는 일과 그 사람이 말이 진실인지 따져 보는 일은 서로 다른 문제다.
사람을 판단하는 당신의 눈이 아무리 뛰어나도 기억해야 한다. 사실 판단 능력 또한 뛰어나지 않다면 당신의 생각은 망상에 그치고 만다는 것을.

대부분 비정상적인 행동이 그렇듯이 심기증도 모두가 평범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일 뿐이다. 누구나 우울할 때가 있다. 누구나 이따금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울증, 망상증, 강박증 같은 장애는 이처럼 정상적인 성향들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변형된 형태로 과장하고 확대한다. 당신에게도 이러한 심기증 환자처럼 사전에 무의식적으로 변명할 거리를 궁리하는 경향이 있다.
맡은 프로젝트가 너무 방대하고 까다로워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할 때가 있다. 책을 쓰거나 영화를 감독하는 일처럼 전문성을 요하는 일일 수도 있고, 기말고사에서 낙제점을 면해야 한다거나 회사 상사에게 중요한 보고서를 발표해야 하는 등 보다 일상적인 일일 수도 있다. 당연히, 실패할 가능성이 보일 때마다 마음속에는 의심들이 떠다니게 된다. 그러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강해지면 자기불구화self-hanicapping를 통해 감정상태의 진행 방향을 바꾸려 한다. 자기 불구화는 현실과의 타협이라 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해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인식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식까지도 무의식적으로 조작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싶지 않은 척 짐짓 연기를 한다거나 뭔가 불쾌한 것이 사실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이라며 스스로를 설득하는 등의 행위를 선행적 합리화 anticipatory rationalization 라 부른다. 자기 불구화 행동은 실패의 원인을 자신의 능력이 아닌 다른 요인으로 돌리는, 말하자면 미래 현실에 대한 투자다. 이 행동 역시 당신의 자존감을 확고하게 세우기 위한 것이다. 실패의 원인을 늘 내부의 힘이 아닌 외부의 힘 탓으로 돌린다면 과연 누가 당신이 실패했다고 말하겠는가?

인간에게는 미루는 습관이 있다는 점을 믿지 않거나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달리 열심히 일하고 철저하게 시간을 관리할 수 있다는 이상적인 생각을 갖는다면 약점을 극복할 전략을 절대 세우지 못할 것이다. 미루는 습관은 일종의 충동이다. 또한 미루는 습관은 과도한 가치폄하로, 지금의 확실한 것을 저 멀리 언젠가 있을 분명치 않은 것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미루는 습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고에 대한 사고에 능숙해야 한다. 소파에 앉아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있는가 하면 언젠가 다른 생각과 열망의 영향을 받게 될 당신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의 뇌 속에 ‘현재’라는 색깔과 ‘미래’라는 색깔을 모두 가진 팔레트가 있다면 ‘현실’이라는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의 작동은 대부분 무의식의 잠긴 문 너머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이 생각들은 무의식과 의식이 상호작용한 결과물의 일부다. 때때로 심리학자들은 의식을 두뇌와 진화에 맞춰 몇 가지 부분으로 나눈다. 이는 의식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지만 벌레와 물고기 수준의 단순한 뇌에서 지금의 뇌로 진화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여러 부분으로 나눠 바라보는 것은 꽤 유용한 방법이다. 두뇌를 고고학 발굴처럼 최근의 지층 밑에 고대의 유물들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면,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두뇌의 오래된 부분은 주로 두뇌의 아래쪽에 자리한다. 이 부분은 생존과 관련된 부분을 다루거나 숨쉬기나 두 발로 서기처럼 굳이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부분을 조절하는 데 쓰인다. 중뇌는 원시인 시절에 형성되어 감정이나 사회적인 의식을 관장한다. 가장 최근에 진화한 뇌의 상층부는 이성과 계산을 다룬다. 전두엽과 신피질은 의식의 본부라고 해도 좋다. 두뇌의 다른 구조에서 온 제안들을 받아들이고 행동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이성적, 수학적, 합리적 체계적 의식은 느리고 둔하다. 이 부분은 기록하고 도구를 사용한다.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고 본능적인 의식은 빛처럼 빠르다. 사용하던 자동차 기름을 바꿀 대나 새로운 식기세척기를 구입할 때 당신은 작동 원리나 설명서, 용량 등을 결정하지 감정에 기대지 않는다. 반면, 점심을 어디서 먹을지, 어떤 영화를 빌려 볼지를 결정할 때는 순간적인 판단과 수치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에 따른다. 최종 결정은 여전히 의식이 내리지만 의식에 느낌을 전달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의식이다. 삶의 대부분의 일들은 감정적 두뇌가 맡아 고려한다. 이는 사회적인 상황이나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당신의 사고와 행동이 대개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계기에 영향을 받으며, 접근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장소에서 전해지는 의견에 따라 움직인다는 말이다. 우선 의식이 자동적인 부분, 감정적인 부분 그리고 생각을 하는 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고 봐도 좋다. 이를 둘로 줄여 ‘의식적인 당신’과 ‘무의식적인 당신’이 있다고 해보자.

앙투안 베카라와 한나 다마지오 Antoine Bechara and Hanna Damsio가 <사이언스>지에 게재한 연구는 무의식적인 당신을 훌륭하게 드러낸 사례로 종종 거론된다. 당신의 추론 능력은 “서술적 지식보다는 신경계를 이용하는 의식 없는 편향의 움직임을 따른다.”것이 그들의 가설이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문제 해결 과정에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위험과 보상에 대한 판단은 무의식적인 당신이 시작한다. 무의식적인 당신은 대상이 좋은지 나쁜지, 위험한지 안전한지, 의식적인 당신이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기 이전에 알아차린다. 좋은 것은 이득을 주고 나쁜 것을 해를 끼친다. 당신이 무언가 좋다고 판단한다면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는 말이 된다. 비행기를 타고 라스베이거스로 휴가를 떠나겠는가? 펜과 텔러의 마술을 보고 사막에서 도박을 해 볼 수 있다면 비행기 사고로 죽을 가능성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만하기 때문에 당신은 티켓을 끊고 난기류와 부딪쳐 보기로 할 것이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의식 속 칠판에다 적어 가며 계산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물 위로 튀어나온 빙산처럼 칠흑같이 어두운 무의식에서 솟아나온, 감정의 순간적인 떨림과 직감을 통해 도출되는 것이다. 당신네 종족은,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심사숙고보다는 직감으로 결정을 내린 역사가 훨씬 길다. 그러니 이러한 정신적 술수의 영향력이 그렇게나 큰 것이다.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기분이 좋아진다는 점 말고는 별 소득이 없다. 사실 그것은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마음을 흐리게 만들어 앞으로의 행동을 점화시킨다.
프로이트는 건강한 정신은 심리치료사라는 거름 종이를 통해 마음속 불순물을 걸러냄으로써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억압된 두려움과 욕망, 결론 나지 않은 논쟁, 치료받지 못한 상처로 감염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신은 이러한 정신적 파편을 중심으로 병적 공포와 망상을 낳았다. 따라서 정신이라는 곳을 샅샅이 뒤져 창을 열고 신선한 공기와 밝은 빛이 들어가게 만들어야 했다.

화를 운동이나 다른 유사한 활동으로 전환하는 방법은 화가 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거나 흥분 수위를 높일 뿐이므로 화를 식히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훨씬 더 공격적인 행동이 나올 수 있다. 화를 식힌다는 것이 화를 전혀 다스리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시먼은 반응을 잠시 미루어 두거나 편하게 쉬거나 공격성을 가지고는 전혀 할 수 없는 활동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제안한다.
카타르시스는 기분을 좋게 만들지만 그것은 감정적 쳇바퀴에 지나지 않는다.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드는 감정은 그 뒤에도 그 자리에 계속 남는다. 카타르시스로 기분이 좋아진다면 미래에 또다시 카타르시스를 찾게 된다.

당신이 속한 문화의 규범과 당신이 살고 있는 대륙의 법에 진심으로 동조하길 거부하려는 것은 벅찰 뿐만 아니라 실로 헛된 노력일 것이다. 당신은 시대정신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동조가 인생이라는 게임의 한 부분임을 알고 있다. 다른 나라를 여행하며 그 나라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판단한다.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면 그 사람이 하는 대로 행동한다. 대학 강의실에서는 조용히 앉아 필기를 한다. 운동을 하러 가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주변을 둘러보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당신은 다리의 털을 밀고 얼굴의 수염을 깎는다. 냄새를 없애는 스프레이를 뿌린다. 이 모두가 동조하는 행동이다.
심리학자 Noam Shpancer가 자신이 블로그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우리는 언제 동조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가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홈베이스이자 우리의 기본 모드이기 때문이다.” 슈팬서는 당신이 동조하는 이유가 뇌 속에 사회적 수용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동맹이 필요하다는 걸 아는 것이다. 당신은 다양한 출처에서 정보를 받을 수 있을 때 세상을 더 정확하게 그린다. 당신에게 친구가 필요한 이유는 버림받은 사람에게는 값진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되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스마트폰에 설치해야 할 멋진 앱이나 꼭 읽어야 할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 당신은 흔들린다. 동조는 생존매커니즘이다.
당신의 행동이 자기 자신이나 다른 이들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될 때는 주저 말고 기존 질서에 의문을 던져라.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상황에서라도 말이다.

당신은 투표를 하는가?
만약 투표를 하지 않는 다면 그 이유가 어차피 바뀌는 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치인들은 다 똑같이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수백만 표 중에서 나의 한 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그렇다. 이것이 바로 학습된 무기력이다. 매 맞는 여성, 인질, 학대받는 아이, 장기 복역수가 탈출을 거부한다면 이는 노력해도 소용없다고 이미 체념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냐, 하는 마음인 것이다. 나쁜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사람이라 해도 실패할지 모르는 일에 전념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느낀다.
상황이 절대 바뀌지 않으리라 믿는 경우에는 내일이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경우보다 더 강하게 슬픔을 느낀다. 당신에게 닥친 문제가 삶의 특정 요소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당신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면 이번에는 한층 더 우울한 기분에 빠지게 된다.

하루하루를 지날 때마다 운명을 바꾸는 힘들 – 직장, 정부, 중독, 우울함, 돈 – 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당신은 소극적인 저항들로 여기에 맞선다. 전화벨 소리를 바꾸기도 하고 벽지를 새로 바르기도 하고 우표를 수집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당신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으니까. 선택이라는 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무기력의 무게에 짓눌려 쓰러지지 않게 당신을 잡아 준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지난 행동에 연연하지 않고, 실패하더라도 당당할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잦은 실패야말로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죽음이 아니고서야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없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라. 

상생의 길을 열다

<리더십과 동양고전 >에세이

상생의 길을 열다
우린 모두 하나로서 함께 살아간다

김선일

경영학과에서는 팀프로젝트를 자주 수행한다. 예전엔 팀프로젝트를 하면 능력 있는 조원들 속에서 묻어가곤 했지만 어느덧 나도 고학년이 되고서 조장을 맡게 되는 일이 잦아졌고 그러다 보니 리더십을 발휘해서 팀을 이끌지 않으면 안 된다. 팀프로젝트에서 중요한 것은 조원들 모두가 좋은 성과를 얻어내는 것이고, 그 성과라는 것은 좋은 학점이다. 같은 팀이 되었으므로 팀 모두가 힘을 합쳐서 한 사람이 했을 때보다 더 좋은 결과물을 나오도록 시너지를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경영학과에서 수많은 팀프로젝트를 수행해오면서 언제나 100%의 시너지를 발휘한 적은 거의 없었다. 팀원 개개인의 능력은 모두 제각각 이었고, 팀프로젝트에 대한 관여도 또한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누구는 반드시 좋은 학점을 받아야 하는 반면, 누군가는 굳이 좋은 학점을 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서 팀원들간에는 보이지는 않는 벽이 만들어지고 결국 소수의 사람이 팀프로젝트를 이끌어나가는 구조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대개 팀프로젝트의 결과에 대한 평가는 팀원 모두가 비슷한 수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열심히 참여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 같은 점수를 공유하게 된다. 만약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했을 때, 과정에 있어서 불공평함은 있었지만 마지막에 좋은 결과를 얻었으므로 이것은 상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해오는 과정에서 편법과 반칙이 있더라도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결과지상주의가 커다란 사회 문제로 작용해왔다.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편법과 반칙이 용인되다 보니 그로 인해 균등한 기회를 가지지 못했고,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정당한 몫을 돌려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의 욕구를 채우는 소비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전체적으로 국민의 생활 수준도 향상되었다. 그럼 과연 우린 상생의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을까.

상생이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상생의 길이란 함께 살아가는 길을 말한다. 여기서 ‘길’이라는 것은 과정을 말한다. 우리가 밟고 지나감에 따라 우리의 발자취가 그려지는 곳이며, 그것은 우리가 걸어 온 과거이자 앞으로 걸어나가야 할 미래이다. 그 길을 함께 걸어가자는 것이다. 길을 함께 걸어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누구의 발걸음은 빠르고 누구의 발걸음은 느리기 때문이다. 팀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어느 한 사람의 능력은 뛰어난 반면, 다른 한 사람의 능력은 뒤쳐지기 마련인 것과 같다. 태어날 때부터 좋은 환경을 가진 아이가 있는 반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아이가 있는 것과 같다. 대기업은 좋은 물건을 개발해서 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물건을 팔 수 있지만, 중소기업은 부족한 물적, 인적 자원으로 인해 시장에서 경쟁을 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을 비롯하여 이 세상의 모든 조직은 다르기 때문에 함께 걸어나간다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려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정말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이 존재한다. 누군가가 앞에서 끌어주거나 뒤에서 밀어주지 않으면 모두가 내일을 향해 걸어갈 때 항상 같은 곳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초등학교 때 나는 꽤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공부를 잘한다기 보다는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항상 잘 따라갔다. 초등학교 2학년, 구구단을 외울 때도 나는 반에서 다른 친구들보다 잘 외웠다. 하지만 몇몇 친구들은 구구단을 쉽게 외우지 못해서 쩔쩔맸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구구단을 외웠던 나로서는 그 친구들이 구구단을 왜 외우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우리반의 담임선생님께서는 반에서 구구단을 잘 외우는 친구들과 외우지 못하는 친구들로 나눠 서로 짝을 만들어주셨다. 잘 외우는 친구들이 한 사람씩 맡아서 친구들이 구구단을 외울 수 있도록 도와주도록 한 것이다. 나는 그때 ‘내가 선생님도 아닌데 이 친구들을 알려줄 수 있을까?’ 라고 의문이 들었다. 나도 특별한 요령 없이 반복을 통해 외우기만 한 것뿐이었으므로 그걸 내 짝에게 어떻게 알려줄지 정말 난감했다. 실제로 나는 가르치는 걸 무척 어려워했고 결국 내 짝이 내 생각대로 쉽게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자 난 어린 나이에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때 정말 내 짝에게 구구단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와 내 짝은 힘을 합쳐 열심히 외웠다. 결국 내 짝은 구구단을 모두 외우게 되었고, 우리 반 모든 친구들이 구구단을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어린 나이의 우리들은 그렇게 상생의 길을 걸었다.

상생의 길을 걷는 것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내가 발걸음이 느린 친구를 위해서 보폭을 좁히는 방법이 있다. 두 번째는 그 친구가 쉽게 따라올 수 있도록 손을 내밀거나 등을 밀어주는 방법이다. 보폭을 좁혀서 걷는 것은 발걸음이 느린 친구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고, 친구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함께 동반자가 되어 걸어가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린 세상을 더 따뜻한 세상으로 만들어간다. 따뜻한 세상이란 사랑이 있는 세상이다. 서양에서는 예수가 사랑을 말했고, 동양에서는 공자가 ‘인仁’으로서 사랑을 말했다.

공자는 인仁이란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원칙이고 구체적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자는 공손함, 관용, 신뢰, 영민, 은혜, 존경, 충성 등의 덕목을 실천하는 것으써 인간관계를 잘 맺는 것이 인이라고 하였으며, 이것은 “인으로써 정치를 하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라는 맹자의 인정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유학에서는 상생의 길을 걸어가는 방법으로서 수신을 강조한다.

인생은 무대와도 같다. 사람은 무대 위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많은 관계들을 형성한다. 사람이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지 않으면 관계들이 삐거덕거릴 것이다. 특히 천인관계라고 할 수 있는 자신과 자연의 관계, 혹은 인간과 사회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 자신과 사람들의 관계, 심신의 관계라고 할 수 잇는 자신의 생각과 행위 간의 관계 등을 잘 맺어야 한다. 수신을 통해 이 세가지 관계가 바르게 서면 사회에서 존경받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공자왈 VS 예수가라사대)

유교에서는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관계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갈고 닦는 것(修身養性)이야 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며, 그렇게 해야만 지도자와 기업가도 사회와 기업에서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해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사회의 관계는 서로 더불어 잘살 수 있을 때에만 사회의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점이다.

나아가 서로 더불어 잘 살기 위한 방법으로서, 공자는 己所不欲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을 말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이러한 황금률은 유교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중요한 교리로서 존재한다.

스스로 즐겁고 기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기쁘고 즐겁지 아니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불교)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 당하기를 원치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도 행하지 마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기독교)

위의 교리들은 우리가 상생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동서양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진리로서 자리잡고 있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간관계의 황금률을 수시로 잊어버리곤 하는 것 같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 혹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만 생각하는 이기주의로 곧잘 드러난다. 아직까지도 우리들은 길거리에 쓰레기를 너무 쉽게 던져버리지만 쓰레기를 줍는 것은 어려워한다. 자신이 좋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남을 경쟁에서 밀어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자신이 만든 창작물의 권리는 존중 받기 원하지만 다른 사람이 만든 창작물의 권리는 너무도 쉽게 무시해버린다.

팀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황금률 깨트리기 행동은 늘 미묘하게 작용한다. 어려운 역할은 조심이 피해가서 자신은 좀 더 비교적 쉬운 역할을 맡길 원한다. 그렇게 모두가 최소한의 노력을 들여서 공동 결과물의 좋은 성과를 원하다 보니 기대보다 낮은 결과를 접하기도 한다. 인간관계의 황금률이 쉽게 깨어지고 있고, 결과지상주의가 만연해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상생을 얘기할 수 있을까.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노여워하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공자는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을 이야기 하였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 것이 군자라고 하였다. 인간관계에서의 황금률이라는 것은 상호간에 지켜졌을 때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상대방이 그러한 나의 모습을 알아주지 못해도 노여워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모습이다. 팀프로젝트에서 남이 맡기 꺼려하는 것을 솔선수범으로 맡아서 하려 한다면, 모두가 자신이 그런 모습을 알아주지는 못하더라도, 스스로 더 나은 미래와 화합을 위해서 즐겁게 일을 해나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리더가 아닐까.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상생의 길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에겐 희망은 남아있다. 길이라는 것은 과거를 통해서 미래로 이어져있기 때문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갈등, 남자와 여자의 갈등, 진보와 보수의 갈등, 1%와 99%의 갈등, 사회 양극화, 등 소통 부재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지금 이 시기야말로 상생의 길을 열어나갈 때다. 또 상생의 길을 앞장서서 열어나갈 지도자가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백성이 즐거워하는 것은 즐거워하면 백성들 또한 윗사람의 즐거워함을 함께 즐거워하고, 백성의 근심을 걱정하면 백성들 또한 그 윗사람의 근심을 함께 걱정한다. 천하가 다같이 즐거워하는 것을 함께 즐거워하고, 천하가 다같이 근심하는 것을 함께 걱정한다. 그렇게 하고서도 왕 노릇을 하지 못할 사람이란 없다. (맹자, 양혜왕하)

우린 또한 우리가 속한 집단으로부터 상생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 스스로에게 공정의 잣대를 먼저 갖다 대고, 주위의 약자를 위해 손을 내밀어 주고, 타인을 존중하고, 자연을 소중히 하면서 우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함께 살아갈 때 세상은 더욱 따뜻해진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 가정, 학교, 국가, 전세계, 모든 자연과 우주 만물이 조화를 이루며 상생의 길을 걸어나갈 때 우린 더욱 따뜻해진다. 강과 바다가 둘이 아니고, 산과 들이 둘이 아니듯, 인간과 세계가 둘이 아니며 너와 나도 둘이 아니다. 우린 모두 하나로서 함께 살아간다.

「공자왈 VS 예수 가라사대」 차이더구이 지음, 知와사랑

2012년 6월 4일

나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창조하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수강 후기 삶과 죽음의 철학
2011년 봄학기 / 전병술 교수님(http://cafe.daum.net/jbsul)

이번 학기에는 총 3가지의 교양과목을 들었다. 논리와 사고, 육상(마라톤), 삶과 죽음의 철학
3가지의 교양 수업 모두 다 좋았지만 ‘삶과 죽음의 철학’ 수업은 나에게 특별히 많은 도움이 되었다.

첫 강의에서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이다.
우리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를 인식할 때 삶의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모두가 삶을 창조적이고 자율적으로 살아간다.

대학 4년의 시간은 매우 짧은 시간이다. 금새 흘러버린다.
대학생인 우리들은 아직 죽음과 먼 나이인데 이런 얘기를 굳이 해야 할까?
인생은 고해다. 평생을 고3처럼 살아간다면 어떨까. 평생을 대학교1학년처럼 살아간다면 어떨까

우리는 뭔가를 하나 버릴 때 더 자유로워진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버리는가에 대한 문제다.

죽음에 논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수업은 내 삶을 주체적으로 끌고 가면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한 수업이다.
죽음을 직접 체험할 수는 없지만 종교,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속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것이다.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더 윤택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

강의에서는 죽음에 대해 폭넓은 방식을 통해 접근하였다.
<이키루生きる> 와 <영매>라는 영화를 보았고, 수많은 미술 작품 속에 그려진 죽음을 감상하고 후반부에 가서는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과 관련된 죽음에 대해 공부했다.
과제는 정해진 책을 읽은 뒤 감상문을 써서 제출하는 형식이 2회 있었다.
레포트의 공통 주제는 ‘존엄사 논쟁’이었다.
수업시간에 활용 된 책은 아래와 같다.
부위훈 지음, 전병술 옮김, 『죽음 그 마지막 성장』청계출판사, 2001
레오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작가정신, 2005
미치 앨봄,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세종서적, 1998
빅토르 프랑클, 『삶의 의미를 찾아서』, 아이서브, 2003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보리, 1997

살아오면서 내가 진지하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싶다.
한 학기 동안 이 강의를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은 혹은 그 이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해보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죽음을 통해 삶을 보는 게 이 강의의 목적이었고, 그것은 현재 내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고민도 많이 해보면서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노력을 했다.

아마 이 강의를 수강하지 않았다면 나의 이번 학기는 크게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로를 비롯한 여러 가지 고민들을 안고 있다가도 이 강의에 들어가서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앉아있으면 많은 부분이 해결되었다.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에 가장 필요한 강의였던 것 같다.

이 강의의 기말고사 시험을 치르기 약 1시간 전이었다.
기말고사에 나올만한 내용들을 머릿속에 집어 넣기 위해 끙끙대고 있었는데, 순간 그러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도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다. 다른 강의는 몰라도 이 강의만큼은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수강한 게 아니었는데. 그러고서 지난 시간에 배운 도가의 장자 사상에 대해 떠올리고는 더 이상 암기하기를 그만뒀다. 그랬더니 마음이 정말 편해지더라. 시험에 들어가서는 주어진 주제를 가지고 서술하는 문제가 나왔는데 최선을 다해서 적어냈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 죽음을 알면 삶을 알게 된다고.
그리고 삶은 정말 아름답다고.

강의의 주교재 중 하나였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통해 강의 수기를 마무리한다. 제출했던 감상문에도 인용했던 구절이다.

  스콧은 삶의 마지막 날을 지내면서 이러한 글을 썼다. “인류가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지구는 어마어마한 생명체를 안고 있는 먼지 알갱이이자, 전체로 하나인 의식체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인류의 역할은 많든 적든 완전히 그르쳐졌습니다. 우리는 공을 놓치고 있어요. 시간을 찔끔찔끔 낭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뭔가 더 가치 있는 일을 다시 만들고 건설할 수 있을까요? 나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창조하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서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것이 삶의 마지막 날에 이르러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입니다. 당신이 믿는 대로 행동하시오. 당신이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친절하도록 해요. 나는 사람들이 몸으로나 정신으로나 그렇게 살도록 돕고 싶은데, 그렇게만 되면 지구는 지난 날보다 더 살기에 좋은 곳이 될 거요”

우리의 현재 모습엔 과거와 미래가 함께 있다

삶과 죽음의 철학 강의록 – 마지막 강의 2011년 6월 8일
 전병술 교수님


대만에 학술회가 있어서 다녀왔다
500~2,000년을 살아온 나무로 우거진 숲을 갔었는데,
그 나무들은 과거에 쓸모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서 베지 않고 그대로 놓아 둔 나무들이다
장자의 무용지대용(無用之代用)이라는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 모습을 보았다
무용지대용: 언뜻 보아 쓸모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도리어 크게 쓰임

무하유지향 :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는 말로, 장자가 추구한 무위자연의 이상향을 뜻한다

우리는 늘 누군가를 판단할 때 어디에 쓸모가 있냐를 가지고 판단을 한다
우리 스스로 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곤 한다. 내 자신은 과연 쓸모 있을까
하지만 쓰임새 때문에 진면목을 알 수 없을 수도 있게 된다
요새 직장인들은 빨리 진급하는 게 무섭다고 한다
이사가 되면 비정규직이 되는 것처럼, 언젠 잘릴지 모른다

살아간다는 건 아슬아슬한 곡예다
우리가 과연 나무처럼 2,000년 3,000년을 산다고 해도 좋을까?
죽음은 우리에게 공포로 다가온다
지금은 덜 느끼겠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느끼는 감정이 달라진다

죽음은 우리에게 신호를 준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어떻게든 죽음과 만나보아라 라는 신호와도 같음
1)통증(아픔)
2)고독
3)아름다운 모습으로 죽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4)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5)무지
6)삶 자체
7)아직 못 다한 일
8)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는구나

Well-being, Well-dying: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1980년대 미국에서 시작 됨)
1) Being in control 죽음에 대한 스스로의 조절
2) Being comfortable: 정신적 교통을 경감시키고 공포, 불안을 조절하고 환자를 안아주는 신체적 접촉이 필요하다. 부모님과 스킨십을 계속적으로 유지하세요.
3) Sense of closure 생의 마무리
4) Recognizing the value of dying person
5) Trust in care provider 의료인들에 대한 환자들의 믿음
6) Recognizing of impending death 임박한 죽음에 대한 인지
7) Beliefs and values honored
8) Burden minimized 부담의 최소화, 의료시스템적 문제
9) Relationship optimized 관계의 최적화
10) Appropriateness of death 죽음의 적절성
11) Leaving of legacy 유산 남기기,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어떤 것
12) Family core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

우리가 가족이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안 해주면 섭섭하고, 그러다가 멀어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고통 받는 원인은 가족, 하지만 가장 많이 위안받는 곳 또한 가족
그만큼 가족과의 관계를 유지하기란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자신이 죽은 뒤 남아있는 가족들이 받는 스트레스와 고통은 매우 큼
인생에서 수 없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지만, 가장 큰 스트레스는 배우자의 죽음이다

최근, 한국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고통 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자다가 죽었으면 좋겠다.’
9988234: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 앓다가 죽는 것(4)
‘자손들에게 폐를 끼치고 않고 죽고 싶다. 자손들이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
‘자식이나 부인을 먼저 보내지 않고 죽고 싶다.’

부모는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피할 수 있는 죽음은 피해야 한다

한 학기 동안 강의를 하면서 결국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생각은 이러한 것들이었다.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보자
자살은 하지 말자
장례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자
죽음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보자

그리고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발견하자

철학을 한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경계에 관한 것이다
무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도 자연스레 사라짐
궁극적으로는 우주와 합일을 이루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은 개인의 몫입니다

지금 이 순간 믿고, 지금 이순간 깨닫고, 지금 이 순간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가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뤄야 한다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현재 직면한 삶과 죽음의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려 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이 지금 가장 꼴보기 싫어했던 기성세대의 모습이 되어 있을 것
‘난 나중에 저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했던 모습이 바로 여러분의 모습일 수 있다

다행인 것은 우리에겐 반성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재 모습엔 과거와 미래가 함께 있다.”

한 학기 동안 수고 하셨습니다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철학 강의록 - 2011년 6월 1일

여러분들은 계절이 변할 때 뭘 느낍니까
오늘도 해가 동쪽에서 떴습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지고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립니다.
창 밖의 나무는 어제 그대로의 나무죠?
자연은 '진실무망' : 참되고 거짓이 없다.

천지도: 우주, 자연의 법칙, 하늘의 뜻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꽃은 봄이 되면 꽃을 피우고 그런 걸 통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한다.
우주의 법칙은 곧 거짓 없는 자기의 실현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도 거짓 없는 것이다.
꽃나무는 꽃을 피워 자기 실현을 할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실현해야 할까.
내가 가지고 있는 그대로를 실천해야 한다
인간은 관계에서 시작한다. 여섯 명만 건너뛰면 세계인은 하나가 된다.
자식으로서의 도리, 부모로서의 도리, 조직 구성원으로서의 도리,
자기의 위치에서(관계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것.
질서와 조화를 꽃피우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일

만약에 내가 관계를 차단하고 내가 할 일을 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우주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
도덕적인 본성의 실현 = 나 스스로가 우주의 창조자가 되는 것
우주는 공공 창조물이다.
꽃, 나무, 인간 하나하나가 전부 우주를 창조해나가고 있다.

그렇게 봤을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죽는다는 것은 무거운 책임을 다하고 나서 쉬는 것.
(레포트를 다 쓰고 나서 느끼는 감정들, 만족감, 시원함)
임무를 끝내고 나서 쉬는 것과 같다.
이처럼 삶에서 죽음을 보는 것이 유가적인 관점


하지만 도가에서는
‘왜 꽃이 피고, 낙엽이 떨어지는 것에 의미를 두냐’
‘사람도 마찬가지다. 태어났으니까 살고 때가 되면 죽는 것 아니겠느냐.’

같은 자연을 두고서 유가와 도가의 관점이 다름.
유가 (공자-노자): 나는 우주 안에서 의미로 충만한 존재, 임무를 다했을 때 우주 전체로 확장되고 우주 창조의 주체가 되는 것. 기본적으로 도덕적 활동을 통한 창조와 실현이다.
도가 (맹자-장자): 도가는 자연에서 의미를 찾지 않는다.

공자 <논어>
사서삼경
사서: 논어, 맹자, 대학, 중경(‘예기’라는 책 안에 있음)
삼경: 시경, 삼경, 역경
           시경: 삼백편의 문학
           역경: 역사
           삼경: 점 철학

三綱五倫
강: 그물을 모아주는 것, 그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삼강: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
임금은 신하의 법칙, 부인은 남편의 뜻을 따르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한다
이것은 공자의 사상이 아니라 한비자의 사상이다.
삼강은 종적 논리지만, 오륜은 횡적(수평적)논리다.
오륜은 기본적으로 쌍무적이다.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하는 이유는 부모가 나에게 잘해주기 때문이다.
관계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부모 자식의 관계다.
‘너희 부모를 대하듯이 친구의 부모를 대하고, 너희 자식을 대하듯이 친구의 자식을 대하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다 보니 바깥쪽으로 확장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계속 안으로 갇히게 됨: 학연, 지연, 혈연
오륜: 부자유친, 부부유별, 군신유의, 붕우유신, 장유유서
           인간관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
君君臣臣父父子子 (군군신신부부자자 )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고…
자기의 신분에 맞는 역할을 다하라.

노자 <도덕경>
노자는 반도덕주의자다.
도덕경은 상하로 나뉘어져 있는데
상편: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말로써 설명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하편: 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상덕부덕 시이유덕 하덕불실덕 시인무덕)
‘최상의 덕은 덕을 의식하지 않으므로 덕이 있는 것이고, 하덕은 덕에 얽매이기 때문에 덕이 없다’
즉, ‘도’를 도라고 하는 순간 이미 참된 도가 아니다.
可道가도: 갈 수 있는 길, 유교에서 말하는 인의, 공자를 비판하는 것
유가: ‘다움’ = 걸맞는 행동, 임금은 임금다움

박산위기: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쪼개면 그릇이 된다.
임금은 임금으로 규정된 것.
나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남자라고 한다면 남자다움이 나옴
그러면서 속박이 나옴
학생이라고 하는 순간 학생이라는 규정에 얽매이게 됨

노자: 어릴 때로 돌아가자.
남자 여자의 차별을 없애면 사람이 되고
사람과 동물의 차별을 없애면 생명이 된다.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의 차별을 없애는 순간 그것을 초월하게 됨

의사, 변호사, 검사가 되기 위해 왜 12년간 매몰되어야 하는가
왜 대학생과 비대학생을 구분하느냐, 같은 청년이 아니냐.

도가는 불교와 유사한 점이 있음.
‘나’ 주격이 나오면 반드시 소유격이 나옴.
나의 집, 나의 돈, 나의 생명, 소유격이 나오면 그 다음은 집착이 나옴.
죽는다는 것은 내가 죽는다는 것인데, 안 죽을 순 없잖은가
그럼 나를 뺀다. 내가 없다면 죽는 것도 없다.

불교의 출발: 삶은 고통스러운 것
늙으면 고통의 연속이다.
현대 사회: 살고 싶어도 살 수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사회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 해탈
우리는 왜 고통스러운가 – 무명 무지 무식
알면 해탈한다. 나를 알면 해탈한다.
날 빼버리면 윤회가 있을 수도 없다. 날 빼버리면 아무것도 없다.
나의 소유격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권태로워지면 또 다른 욕망을 찾게 되고 끊임없이 고통을 겪는다.
권태의 극복 과정. 욕망의 추구 과정
나를 없애라. 나라는 것은 원래 없다는 것을 알아라.

서양의 종교는 ‘절대자가 모두 알아서 해준다.’
기본적으로 동양의 종교는‘너가 알아서 해라‘: 내가 성인이 되고, 내가 부처가 되고, 우리 모두가 부처이다.
서양의 큰 바위 얼굴 이야기는 동양의 사상을 닮았음: 늘 쫓아다니다가 어느새 내가 그 사람이 되어있음.

客気객기: 세상을 손님으로서 살아가는 것
장자의 逍遙遊소요유: 마음 내키는 대로 슬슬 거닐며 다닌다.
(사물에 얽매인 현실을 초월하여 자유로운 경지에서 에서 자유로이 노님)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얽매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 <生きる이키루> 를 보고서

<삶과 죽음의 철학> 에세이

영화 <生きる이키루> 를 보고서

영화 <生きる>속의 남자 주인공, 노년의 공무원은 자신이 살아온 삶이 너무도 허무하다고 느끼던 참에, 인형 공장을 다니는 여직공이 의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인생에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건 다름아닌 시민과장 이라는 자신의 직위에 주어진 일에 책임을 가지고 완수하는 것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시민들을 위한 놀이터가 완공이 되고, 완공된 날 놀이터에서 그네에 앉아 노래를 부르면서 삶을 마감한다.

삶은 찰나의 것 소녀여, 빨리 사랑에 빠져라.

그대의 입술이 아직 붉은색으로 빛날 때

그대의 사랑이 아직 식지 않았을 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우리가 ‘끝난다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했을 때, 시간은 모습을 바꾼다. 늘 지루하게만 느껴지고 아무것도 아니던 매일이 보물처럼 느껴진다. 늘 그래왔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때에도 이제 친구들과 함께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서 특별한 추억을 만들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나 또한 일본에 10개월 간 머문 적이 있었는데 평소엔 일에 지쳐 하루 종일 잠을 자면서 시간을 보냈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오는 날을 한 달 앞두고서는 그제서야 일본에 있는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져서 여기저기로 여행을 다니고 친구들과 특별한 추억을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영화에서는 결국 죽은 자는 조용히 잊혀진다는 허무주의를 보내주면서 끝을 맺지만, 주인공은 열정을 받쳐 완공시킨 놀이터에 앉아있던 그 순간만큼은 인생을 뜨겁게 사랑하고 ‘살아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나 또한 대학교 3년생인 지금,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에 감사를 하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고 싶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하여 2 -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삶의 의미를 찾아서>를 읽고서

<삶과 죽음의 철학> 에세이
의미 있는 삶에 대하여 2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삶의 의미를 찾아서>를 읽고서

김선일

우리들은 언제부턴가 인생의 목표를 행복으로 정해놓은 듯이 살아가고 있다.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도, 좁디 좁은 취업의 문을 통과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모두 많은 돈을 벌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한다. 돈을 많이 벌면 여행도 갈 수 있고,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고, 가족들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다. 그렇다면 돈이 없고 행복하지 않은 인생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프랭클 빅토르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우리의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며 우리인생은 언제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삶에는 진정으로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며, 우리가 죽는 그 순간까지 남아서 죽음 그 자체에도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지는 것이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의 유일무이함을 깨닫고 자신의 삶의 유일무이한 의미를 찾아야 된다고 한다.

나는 한번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다. 우리 인간이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부모님의 밑에서 태어나 길러지고, 언어를 습득하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교육의 단계를 거쳐오면서 자연스레 하나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리매김을 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과정이 즐거웠고 행복했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좋은 머리 덕에 학습에도 소질이 있었고, 주위의 사물에 감탄을 하면서 감동을 받을 줄 알았고, 많은 친구들과 원만하게 어울리면서 잘 지내왔다. 물론 중3과 고3 입시공부를 하는 시기에는 남들처럼 스트레스를 받기는 했지만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힘든 공부를 하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내 존재의 이유에 의문을 품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노력한 정도의 성취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노력해도 안 되는 건가’라는 좌절감을 경험한 적도 없다. 하지만 나의 지금까지의 인생이 평탄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 두 분 모두 몸이 편찮으시다. 아버지께서는 농사일을 하다가 팔을 심하게 다치셨고, 내가 군대에 있을 때는 심장이 심하게 안 좋아져서 큰 수술을 받기도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어릴 때부터 허리가 아프셔서 수술을 받으셨는데도 크게 나아지지 않아서 지금도 고생하고 계시다. 그리고 친가와 외가 쪽 모두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고 많은 어려움들이 일어나 우리 가족에게까지 심적으로 부담을 주었다. 어떻게 보면 그러한 환경이 나로 하여금 삶이 지닌 의미에 궁금증을 품어 볼 여유를 주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하루 빨리 내가 어른이 되어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편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것, 그것이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목표이자 의미가 아닐까 싶다.

프랭클 빅토르는 삶의 의미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 있는 특정한 개인과 관계가 있고 그것은 매우 상대적이라고 말한다. 즉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날마다 다르며 시간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 속에서 삶의 의미는 언제나 변해왔고, 앞으로도 상황에 따라 계속 변하게 될 것이다. 우리 개개인은 모두 유일무이한 의미를 지니고서 인생을 살아가며 유일무이한 상황들이 연속이 바로 인생이라고 말한다. 내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삶의 의미들 또한 내가 결혼을 하고 부양해야 할 부모님이 안 계시는 상황을 맞이한다면 나는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할 것이다. 아직은 내가 어떠한 삶의 의미를 찾게 될지는 모르지만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중심에는 사랑이 놓여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나눈다. 부모님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님을 사랑하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는 그러한 점에서 무척 좋은 책이었다. 결국 우리 인생의 답은 사랑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다. 저자는 ‘우주는 너무 광대해서 낱낱의 인격과 맺는 관계를 초월해 있다. 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 자신의 작은 자아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 삶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고 말한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는 그러한 삶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니어링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서 자신들이 머무를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이웃들과 함께 조용히 살아간다. 그리고 책과 편지를 통해 올바른 세계를 만들기 위한 목소리를 낸다. 그것은 그들이 선택한 삶이다. 세계를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에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다. 혁명으로서 그 길을 이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들처럼 조용히 책을 통해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길만 있는 법은 아니다. 길가에 쓰레기를 줍고, 힘든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세계를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나이를 먹고 죽게 되고 우리의 존재는 사라지게 되지만 우리가 살았던 그 시간은 영원히 남게 된다. 그래서 앞으로 이 세상에 살게 될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 모두는 하나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은 정말 놀랍다. 누군가 쓴 책이 누군가의 삶에 방향을 설정해주고, 또 누군가가 만든 영화는 지구상의 누군가에게 꿈이 되기도 하는 걸 보면 정말 그렇다. 우리 또한 지금 삶과 죽음의 철학이라는 수업에서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의 책을 함께 읽으면서 그들의 삶을 보면서 배우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저자 헬렌 니어링은 책 속에서 말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삶의 연속성과 이어짐을 믿었다.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믿는 더 많은 만남과 더 많은 기회를 간절히 바랐다.” 

우리가 수업에서 그들의 책을 접하게 된 것을 보면 그들의 바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의 삶이 계속 이어지고 있고, 앞으로 계속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죽음은 끝이 아니다.
책 속에서 스콧이 죽는 마지막 대목을 읽을 때 마음이 무척 편안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 일리치는 죽음으로 넘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읽는 동안 무척 초조했지만, 스콧의 죽음은 물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느낌으로 편안함을 주었다. 스콧은 자신의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에는 식사를 끊으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을 하나의 경험으로서 받아들인 것이다. 헬렌은 남편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안이 잘 정돈된 문가에 서서 그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저녁을 맞이하는 남자의 면모’ 이 얼마나 편안한 모습인가.
예전에 나의 죽는 순간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는 내가 죽을 때가 되면 어떤 모습으로 죽고 싶을까’를 고민해 본 것이다. 스콧의 죽음을 보면서 다시 한번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내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영화 몇 편이 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이다. 숨이 멎는 순간 영화가 끊기게 될지, 아니면 죽음 뒤의 세상에서 영화를 계속 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죽는 순간까지 영화의 감동을 느끼고 싶다. 바라는 게 있다면 죽는 순간에도 영화의 감동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맑은 정신만큼은 유지 했으면 좋겠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의 스콧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스콧은 삶의 마지막 날을 지내면서 이러한 글을 썼다.

“인류가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지구는 어마어마한 생명체를 안고 있는 먼지 알갱이이자, 전체로 하나인 의식체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인류의 역할은 많든 적든 완전히 그르쳐졌습니다. 우리는 공을 놓치고 있어요. 시간을 찔끔찔끔 낭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뭔가 더 가치 있는 일을 다시 만들고 건설할 수 있을까요? 나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창조하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서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것이 삶의 마지막 날에 이르러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입니다. 당신이 믿는 대로 행동하시오. 당신이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친절하도록 해요. 나는 사람들이 몸으로나 정신으로나 그렇게 살도록 돕고 싶은데, 그렇게만 되면 지구는 지난 날보다 더 살기에 좋은 곳이 될 거요”

  대학생 3학년으로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 나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도 이렇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이러한 마음과 내가 해야 할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경쟁사회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마음과, 지구를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마음.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세상을 좀더 좋게 만드는 것과 같은 방향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언젠가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전세계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의미를 깨우치고,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존엄사 논쟁을 통해 본 인간의 생명

<삶과 죽음의 철학> 에세이
존엄사 논쟁을 통해 본 인간의 생명

경영학과 06 김선일

2009년 5월 21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존엄사를 인정하는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대법원은 말기 암 환자인 김 모씨 측이 병원을 상대로 낸 무의미한 연명 치료장치 제거 등, ‘존엄사 허용’ 청구 소송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원고 측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법원은 ‘짧은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이 명백할 때는 연명치료를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 존엄을 해치므로 환자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 인간 존엄과 행복추구권을 보호하는 것’ 이라고 판시했다. 이어서 ‘환자는 사전의료지시 등의 방법으로 미리 의사를 밝힐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평소 가치관, 신념 등에 비춰 객관적으로 환자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인정되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 했다. 그러한 판결이 있은 후 병원은 식물인간인 김 모씨의 산소호흡기를 제거했고, 그 후 수 일 내에 사망할 것으로 여겨졌지만 201일 동안 생존을 하면서 존엄사의 법제화에 대한 논란이 꺼지지 않고 있다. 인위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은 윤리에 어긋난다는 종교적 문제와 환자의 상태를 얼마나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느냐의 기술적인 문제들이 논란의 중심에 있다.[1]

존엄사란 인간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와 가치를 지키면서 존엄하게 죽을 수 있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즉 말 그대로 품위 있는 죽음을 말한다. 인간적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의 의학적인 치료를 다했음에도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임박할 때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질병에 의한 자연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2] 그런 점에서 단순히 편안하게 죽도록 하는 안락사와는 구분을 지으며 사용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존엄사를 안락사 중에서도 소극적 안락사[3]의 범위로 보기도 한다.

우리는 언제나 주위에서 죽음을 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한국에서는 매년 암을 비롯해 각종 질병 등으로 사망하는 환자가 26만 명이라고 한다. 또 해마다 새로 발생하는 암 환자 12만여 명을 합쳐 모두 36만 명의 환자가 지금 안과 싸우고 있다. 그리고 통계수치에 포함되지 않은 적지 않은 식물인간도 많고, 치매환자(21만 명)와 파킨슨병 환자(7만 명)를 비롯하여 노인성 질환을 앓고 있는 인구는 102만 명이라고 한다.[4] 이들 환자의 가족들까지 합친다면 해마다 500~600만 명의 사람들이 죽음을 겪거나 옆에서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셈이다.[5]

나는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임종을 집에서 지켜보았다. 외할머니께서는 심장병 질환을 앓으시다가 돌아가셨고, 친할머니께서는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외할머니께서는 임종하실 때 우리 집에 머물고 계셨는데 임종하시기 전에 아버지에게 부탁하여 자신이 사셨던 집과 마을을 돌아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외할머니를 차에 태우고 외할머니께서 평생 동안 사셨던 마을을 돌아보고 오셨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숨을 거두셨다. 외할머니께서는 자신의 임종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생을 마감하시기 전에 자신이 평생 동안 지냈던 곳을 둘러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비록 심장병 질환으로 고통스러운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긴 했지만 죽음을 맞이하시던 그 순간은 편안했을 것이다. 외할머니께서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평생을 살아온 마을과 하나하나 손때가 묻어있는 집을 돌아보시면서 무슨 회상을 하셨을까. 아마도 이제는 더 이상 만질 수 없게 되는 집의 구석구석과 더 이상 맡을 수 없는 고향의 냄새를 기억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리고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를 먼저 여의신 후로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셨는데, 병으로 고생을 하시다가 어느 날 밤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생을 마감하셨던 그 날 아침 할머니의 표정은 무척 평안해 보이셨다.

나의 외할머니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임종 때가 오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모두가 자신의 임종 때를 알고서 죽음을 받아들 일 수 있다고 한다면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과 죽음을 지켜보는 가족들 모두 좀 더 평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렇게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란 쉽지 않다. 말기 환자의 극심한 고통을 지켜보면서 함께 고통에 괴로워하는 가족들도 있고, 깨어나지 않는 환자의 곁에서 말없이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도 있다. 하지만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우리는 조금 더 이 세상에서 남아보고자, 사랑하는 가족을 조금 더 우리 곁에 남겨두고자 노력을 한다. 같이 살아 숨쉬는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한 차례 존엄사 허용 판결 후, 존엄사 논쟁이 있고 나서 한 리서치회사에서 한국인들의 존엄사에 대한 인식을 묻는 설문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한국인의 84.5%가 존엄사 허용을 찬성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유난히 종교적 이유로 반대가 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독교인들의 여론에서도 80%에 가까운 찬성률을 보였다. 이미 한국 사회도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 퍼진 것이다. 하지만 그 리서치 결과를 보고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 결과가 나와는 관계가 먼 미디어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나의 가족들과 관련된 문제였다고 한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했을까. 나의 가족 중 한 사람이 치료법이 없고 회복이 불가능한 병에 걸린 뒤 의료장비를 통해 간신히 생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을 경우 나는 그때 존엄사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질 수 있을까. 아마 나는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조금 더 함께하고 싶어서 어떻게 해서든 치료를 해서 회복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고통의 시간을 함께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에 힘겨워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건 정말 큰 고통일 것이다. 만약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가족이 그만 고통을 겪고 싶다는 말을 전해온다고 할 경우 나는 또 어떻게 해야만 할까. 그 순간 생명의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고통을 끝내고 싶다고 하는 가족에게 있는 것일까, 고통스럽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가족을 곁에 두고 싶은 나에게 있는 것일까. 이번에는 그와는 반대로 내가 환자의 입장에 있을 때를 생각해보자. 나는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기 힘든 상황이다. 그래서 차라리 고통보다는 죽음을 택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과 가족들은 어떻게 해서든 나를 살리고 싶어한다. 그 순간 죽음을 판단할 권리는 과연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나에게 있는 것일까, 부모님께 있는 것일까. 나에게 생명을 준 것은 비록 부모님이라고는 해도 나에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생명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죽는 것만큼이나 복잡하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의지대로 삶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온 우주의 힘이 미묘하게 작용하여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게 됐고 그 뒤로는 온갖 문제들에 얽히고 얽히면서 살아간다. 시간 흐름 속에서 조금씩 삶을 살아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의미를 거미줄처럼 좀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엮어 나간다. 누구는 너무도 복잡하게 얽혀버린 실타래 같은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실을 끊어 버리기도 하고, 또 누구는 조금씩 조금씩 엉킨 실을 풀어나가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만은 피하기 위해 실같이 엉켜져 있는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살아간다. 어느 날은 모든 일이 잘 풀려서 행복한 시간으로 보내기도 하는 반면 어느 날은 더 복잡하게 엉켜버리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이란 또 인간의 삶이란 힘든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풀어나가야 하는 이유는 곧 그러한 과정이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은 고난의 여정이고 고통의 연속이라는 말에서의 고통은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미세한 신경세포를 통해 아주 작은 고통에도 반응하는 감각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동물은 먹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고, 큰 상처를 입어 죽을 수도 있고, 물에 떠내려가거나 바다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고통보다는 손바닥에 박힌 작은 가시가 주는 육체적 고통에 더 신경을 써야 하고, 오히려 우리에겐 그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유엔에 들어가 지구의 병들어 있는 환경을 살리고자 운동을 하는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찾아온 지독한 치통에 고통스러워 하며 눈물을 흘리는 법이다. 병들어 있는 환자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마음이 환자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하지만, 애초에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의 크기는 같은 잣대로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육체적 고통을 직접 몸으로 겪고 있는 당사자의 그 고통은 오로지 당사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본다면 침대 위에 누워있는 가족의 육체적 고통을 내가 감당하거나 나눠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는 침대 위의 환자의 의견을 존중해야 되지 않을까. 결국 가족들이 가졌던 정신적 고통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아물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존엄사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만약 존엄사를 허용하면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생길 수 있고 존엄사를 악용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말한다. 찬성 쪽에서는 존엄사는 환자의 교통을 경감시켜주고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존엄사의 찬반 양론, 서로 입장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모두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다는 것에 전제를 두고 있다. 다만 시대의 흐름은 점점 더 존엄사를 허용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아직 한국은 최초의 존엄사 허용 판결 이후 논쟁으로 인해 법제화 단계가 더디게 진행 중이지만, 스위스, 벨기에, 독일. 일본 등의 국가에서는 이미 법제화가 되었거나 존엄사에 대한 사회의 긍정적 시선이 자리를 잡았다. 물론 나라마다 죽음에 대한 사회문화적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좀 더 죽어가는 사람을 위하는 길인가에 대해서는 고민이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이를 지켜보는 산 사람들의 고통도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 나를 비롯해 한국 사람들이 아직은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것에 대해 인식이 부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인들의 존엄사에 관한 문제와 관련하여 한 저자가 말한다.[6]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가족주의 성격이 강하다. 합리성과 자율성이 지배하고 개체성이 강조되는 서구 사회와는 달리 우리는 죽음을 가족의 틀 안에서 처리하려고 한다. 그래서 존엄사를 요구한 죽어가는 자의 뜻이 존중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서구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죽음의 개념에 관심을 보이는 젊은 세대들이 이런 점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 말기환자나 치매환자 등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우리들이 불효와 효도의 경계선에 방황하는 것도 이런 현상의 하나이다. 언뜻 품위 있는 죽음을 머리에 떠올리다가도 따지고 보면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원점에서 헤맨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웰다잉이라는 문제가 결국 웰빙의 틀 안에 있다는 것을 감지하면서도 품위 있는 죽음에 무감각한 것처럼 행동한다.”
“경제력이 커짐에 따라 국가의 품격을 따지는 시대일수록 웰빙 속에 웰다잉을 생각하는 사회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웰빙과 웰다잉에도 똑같이 품위와 품격이 있다. 그것이 삶의 보람이요, 의미 있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이라는 말에는 삶과 죽음이 함께 들어있다. 즉, 삶과 죽음은 어떠한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길 위에 놓아져 있는 흐름인 것이다. 존엄사의 논쟁의 본질도 결국은 그 흐름,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인식을 받아들이고 배워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논쟁 가운데서도 본질을 잃으면 안 될 것이다.

[1] 존엄사 논란 김옥경 할머니 201일 만에 사망(폴리뉴스, 신영호)
[2] 위키피디아 ‘안락사’ 참조
[3] 환자가 겪고 있던 질병 등의 원인으로 인해, 회복이 불가능한 과정에 들어섰을 때 안락사를 수행하는 사람이 죽음의 진행과정을 일시적으로 저지하거나, 연명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이를 방치함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이다.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 사이의 차이점은 어떤 적극적인 행위에 의해서 생명을 끝내는 것과 연명치료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생명을 끝내는 것의 구분이다.
[4]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정책연구원 2009년 노인성 질환 진료추이 분석
[5] 해피엔딩, 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최철주)
[6] 인용 <해피 엔딩, 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최철주, 궁리)



여전히 읽어봐도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 글쓰기 연습이 절실하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하여 -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고서

<삶과 죽음의 철학> 에세이
의미 있는 삶에 대하여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고서

‘두려움, 나이가 든다는 것, 탐욕, 결혼, 가족, 사회, 용서, 의미 있는 삶 그리고 죽음’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저자 미치는 모리교수와 위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사람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을까. 앞으로 더 살아갈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을까. 나도 한 번 생각해 본다. 내가 만약 지금 죽는다면 난 주위 사람들에게 무엇에 대해 얘기를 해주고 싶을까.
예전 중학교 수업 시간에 유서를 쓰는 시간을 가졌던 적이 있다. 아직 중학생밖에 되지 않은 우리들에게 유서를 쓰라고 했기 때문인지 반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선생님은 반의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자신이 정말 내일 죽는다고 생각해고 유서를 써보라고 하셨다. 이내 반 아이들은 연필을 잡고 진지하게 유서를 써 내려갔고, 교실에는 숙연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두 명씩 유서쓰기를 끝마치자 선생님은 이제 반 아이들 앞에서 각자의 유서를 낭독할 거라고 하셨다. 다시 한번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나름대로 정말 심각한 내용을 쓴 친구들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유서를 다 쓴 순서대로 한 명씩 앞에 나가서 자신의 유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유서는 모두 진지했다. 그리고 유서의 내용들은 어느 한 지점에서 맞닿아 있다는 걸 알았다. 거기에는 사랑이 있었다. 모두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했다. 자기의 부모님과 형과 누나들, 동생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했다. 나의 유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할머니와 외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형에게 보내는 유서를 따로 적었다. 내가 낭독할 차례가 되었고 나는 앞에 나가 나의 유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유서를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되었고 목이 메여서 말이 나오지 않게 돼서 결국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의 문턱에 간 순간에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삶 중 최고의 순간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삶은 보다 삶다웠다. 선한 것도 많았고 삶 자체도 정말 사는 것 같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생의 출발점에 밝은 점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최고의 순간들은 어린 시절이었음을 깨닫는다. 거기에는 사랑이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나락에 떨어져 빛을 보았고, 빛을 보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삶이 그래서는 안 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자 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들이 가여워졌다. 아내가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쳐다보았다. 눈물은 그녀의 코와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이어 그는 생각한다.

맞아. 저들에게 내가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저들에게 미안하지만 내가 죽는 게 저들에게도 나을 거야.
이반 일리치는 죽음의 문턱을 넘는 순간에 그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고, 짧은 순간이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어디에 있는 거지? 죽음이라니? 그게 뭔데? 그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죽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에게 있어서는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반 일리치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리교수를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조언을 해 줄 스승이 있었다면 그의 인생에 좀 더 의미를 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건 이반 일리치에게만 해당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그러한 스승이 필요하다. 모리 교수는 우리들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말한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사는 동안 자기 삶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배우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울 것이고, 자기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세상이 아주 다르게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걸 깨닫고서 바라보는 세상에는 두려움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나이 듦에 대한 존경과 용서가 있다. 그리고 사랑이 있는 것이다. 모리 교수의 말대로 삶과 죽음을 동일 선으로 인식하고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우린 언제까지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그 날 하루를 매우 의미 있게 보낼 거라고 하지만 우리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영원한 생의 날들이 펼쳐져 있을 거라는 믿음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힘겨운 경쟁을 하고 조금 더 많은 재산을 모으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우리가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더 나은 삶고 더 나은 죽음을 위한 것이다.
  “죽어간다는 생각과 화해하는 것, 우리 모두 찾는 게 바로 그거잖아. 결국 우리가 궁극적으로 죽어가면서 평화로울 수 있다면 마침내 진짜 어려운 것을 할 수 있겠지. 살아가는 것과 화해하는 일 말일세”
모리 교수는 죽어간다는 생각과 화해를 한다면 우리에게 있어 진짜 어려운 일인 살아가는 것과 화해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우리는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늘 살아가는 게 어려운 것이다.

올 해 들어 국내 명문 대학교의 대학생이 4명이 잇따라 자살을 하고 교수도 1명이 자살을 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한국 사회는 침통에 빠져있다. 같은 대학생 신분인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이번 일의 무게는 남다르다. 한 인터뷰에서 그 학교의 학생이 경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이 사회를 향해 말한다. 자신들은 행복하지 않다고. 올해 초에는 강원도의 한 대학생이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자살을 했다는 뉴스도 있었다. 나는 한국 대학생들의 자살에 대한 기사를 더 찾아보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대학생만 한 해에 약 240명이 자살을 한다고 하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인구 10만 명 당 자살률 24명으로 1위, 10대와 20대의 자살률 또한 OECD 1위. 40분 마다 한 명씩 자살을 한다는 통계를 봤을 때는 말을 잃었다. 행복하지 않은 대학생들이 가꿔가는 사회에는 희망이 있기는 한 걸까. 모리 교수가 말한다.
“어떤 사회든 나름대로 문제는 있지. 달아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네. 자기가 사는 곳에서의 자기의 문화를 창조하려고 노력해야지. 어디 살든지 우리 인간의 최고 단점은 근시안이라는 점이야. 우리의 잠재력을 보고 우리를 넓힐 수 있는 데까지 쭉쭉 넓혀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지.”
어쩌면 삶의 어려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버린 학생들에게는 모리 교수의 위로도 산 사람들의 동정도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그 자신들의 죽음을 택함으로써 한국 사회를 바꾸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우리 젊은이들은 이반 일리치가 살았던 삶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니, 이반 일리치는 젊은이들뿐만이 아니라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과 다름없다. 직장에서는 더 좋은 위치에 올라가기 위해 수단을 쓰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더 넓은 집을 보여주고 좋은 접시를 보여주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조금만 더 힘내서 같이 살아남은 다음,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같이 노력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은 삶이라는 어려운 길이 아닌 삶보다는 쉬운 죽음이라는 길을 택했다. 어쩌면 삶이란 게 어려운 길임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 우리가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건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삶의 순간이 그러했듯, 그 옛날 중학교 수업시간에 유서를 낭독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나와 내 친구들이 그러했듯, 모리 교수가 미치에게 말했듯…
우리에겐 사랑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은 이기지. 언제나 사랑이 이긴다네.’

‘인생을 의미 있게 살려면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바쳐야 하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헌신하고, 자신에게 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는 일을 창조하는 데 헌신해야 하네.’
‘사랑을 나눠주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

공수래 공수거 (空手來 空手去) ,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간다고 하지만, 우리는 결코 빈손으로 오가는 게 아니다. 아기로서 세상에 태어났을 때도 사람의 보살핌이 있었고, 삶을 끝맺는 순간에도 누군가의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삶이 시작한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사랑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다.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의미 있는 삶에 대해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었다. 이반 일리치와 모리 교수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나 역시 간접적이었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 중학교 수업시간의 기억을 끄집어 낼 수 있었다. 친구들 앞에서 유서를 낭독하는 동안 얼굴에 타고 흘렀던 뜨거운 눈물의 의미를 이제서야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어렸던 중학생 그 때는 단지 내가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까 슬퍼서 눈물이 나는 거라고 생각했다.특히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읽으면서 나는 과연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나 또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거기에 진심이 담겨있었는가를 의심도 해 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지금보다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느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을 했다. 나의 이러한 고민은 실천이 되었을 때 힘을 가진다는 것 또한 느꼈다. 다행히도 예전이라면 어려운 고민거리였겠지만 지금은 커다란 답이 그려진다. 우리는 태어나는 동시에 죽음에 내던져진다. 즉, 살아가는 과정은 죽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사랑’이 있는 한 삶과 죽음은 의미를 더해간다.

2011년 4월 11일 도서관에서

*인용 및 발췌: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앨봄 , 이반 일리치의 죽음/톨스토이

영화 [영매] 감상 후기와 내가 경험한 죽음에 대하여

<삶과 죽음의 철학> 에세이

영화 [영매] 감상 후기와 내가 경험한 죽음에 대하여

  나는 미신을 믿지 않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어릴 때는 겁이 많은 소년이어서 밤 길을 혼자 걷는 것이 정말 두렵긴 했지만, 그건 언제 갑자기 나타날지 모를 귀신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강도 같은 무서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태어나서 살면서 한 번이라도 귀신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 존재를 믿을 테지만 본 적이 없으니 믿을 수 없다. 내가 본 적이 없으니까 세상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하지만 내게 보이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들이 나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영화 [영매]를 볼 때는 상당 부분에서 공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주위에는 삶에 원한이 남아있거나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저승으로 가지 않고 이승을 떠도는데 영매는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산 사람들과 연결을 시켜준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서 ‘정말 주위의 귀신이 영매의 몸 안으로 들어왔던 것일까? 아니면 영매는 산 사람의 마음을 치료해주기 위해서 귀신이 들어온 것처럼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거기에 올바른 답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사후 세계의 존재의 유무에 대한 논의를 벌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할머니들이 모여서 누구는 천국에 가고 누구는 못 간다면서 천국에 대해 재미있게 웃으면서 얘기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리고 한 영매 또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에 대해 언급을 했던 것을 보면, 그 분들에게 사후 세계는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 얘기는 이 곳에서의 삶이 끝나고 죽고나면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영매는 왜 존재하게 되었을까.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우리 조상들은 자신의 조상이 죽고 나서 일정기간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살다가 안 좋은 일이 발생하면 주위를 떠도는 영혼들이 화를 내는 것이라고 믿었고 그들을 달래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사이에서 화해를 시켜주기 위한 영매가 필요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영매가 존재하는 것이다. 영매라는 존재가 있음으로써 우리 조상들은 삶과 죽음을 더 가깝게 느꼈다. 영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산 자와 죽은 자를 화해시켜 산 자가 남은 생애를 무사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는 일이다. 어쩌면 영매는 산 자와 죽은 자와의 화해도 가능한데, 우리네 인생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왜 서로 싸우고 화해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가를 말해주고 싶은 사람이 아닌가 싶다.  서로 산 자로서 대면할 때 서로에게 잘해주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지금 이 순간, 산 자로서 서로에게 잘해줘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3월 11일 일본에서 대지진이 발생해 수만 명의 사람이 죽었다. 3월 11일, 그 날 하루의 아침을 시작하면서 오늘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고 과연 누가 생각했을까? 그 날 지진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과연 누가 알았을까? 결국 예견되지 않은 죽음의 그림자는 수많은 사람들을 덮고 말았다. 나는 그들의 죽음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지진이 발생하기 한 달 전에 일본의 도쿄에서 살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4월까지 일본에 있을 예정이었지만, 학교 복학을 위해 일정을 앞당겨 한국으로 돌아왔다. 내가 만약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 머물렀다면, 돌아오기 전 마지막 여행으로 동북지방을 갔다고 한다면, 그 때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밀려왔다고 한다면 지금 이렇게 도서관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 동북지방으로 기차여행을 떠날 계획이 있었다.) 나는 죽음을 피한 사람 중 한 사람이지만, 그 날 죽음의 그림자를 나보다 더 아슬아슬하게 피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지진이 일어나는 날 아침, 친구들과의 동창모임을 하기 위해 도쿄로 향한 덕에 지진을 피한 사람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지금 숨 쉬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수많은 죽음의 그림자들을 피해 온 사람들이다. 사실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쉬울 정도로 죽음은 우리에게 너무도 가까이 있다. 죽는 것은 죽으면 끝이지만 사는 것은 대단히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다. 그들은 죽었고 우리들은 이번에도 남겨졌다. 남겨진 우리들은, 살아남은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산 자는 죽은 자에게 죽음을 피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애도를 표하고 위로를 하며 살아간다. 죽을 때까지 죽은 자를 위로하며 살아가다가 죽고 나면 산 자의 위로를 받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는 죽은 뒤 산 자들로부터 위로를 받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가족을 만들고, 친구를 만들고, 친구의 친구를 만들면서 혼자 살아가지 않는다.
  3월11일 지진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영화 [영매]에 따르면 그 날 죽은 수많은 영혼들은 이승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생애 못다한 말이 있거나,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떠도는 것일 것이다.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무슨 말이 들릴까. 영매를 통해 간절히 들어보고 싶다. 확실하지는 않겠지만 수많은 말들 중에서 이런 말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살아남은 당신들께서 내 몫까지 행복하게 살아가세요.” 그래서 난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그 행복을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가고 싶다.

2011년 3월 14일

죽으면 끝이다. 죽음 뒤의 일들은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다

삶과 죽음의 철학 3월 16일 강의록

일본 대지진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는 걸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그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은 나에게도 올 수 있고 우리 가족에게도 올 수도 있다.
만약 그런 상황이 우리에게 실제로 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죽으면 끝이다. 죽음 뒤의 일들은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다.

인류에게 이런 일이 있을 때 인류의 죽음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는 것만 보더라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한국에서는 주로 죽은 가족들을 앞에 두고 통곡하는 장면을 방송에 내보내지만
일본은 쓰나미에 휩쓸려 가는 가족들을 보면서 눈물만 머금는 절제된 모습들이 주로 나온다.

기회가 된다면 부모님께 한 번 물어보도록 하라.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묻어드릴까요, 화장해 드릴까요.”
아마 그런 걸 물어보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며 말도 못 꺼내게 할 것이다.
그건 역시 죽음을 금기시하는 한국 사회 때문.
하지만 실제로 우리 주위에선 무슨 일들이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처가 필요하다.
만약 여러분은 부모님이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았다고 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이 강의의 최종적 목표는 그러한 때 대처하는 걸 배우는 것이다.

지난 시간 <영매>를 보고 어땠는가.
무(巫)라는 것은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인가.
1980년대 한국에는 우리 뿌리 찾기 운동이 활발했다. 그 때 가장 유행했던 노래가 바로 신토불이다. 위인들의 동상을 세우는 열풍이 불어 전국 곳곳에 동상이 들어서기도 했던 시기다.
또한 대학에서는 ‘동양철학’ 이라는 강의가 정말 인기가 있어서 개설만 하면 수강생이 300명이 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통 ‘사상’은 무엇일까.
우리의 전통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유, 불, 도 이다.
하지만 유교와 도교는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고, 불교는 그 유래가 인도다. 순수한 우리 것은 없는 것이다.
중국은 도교가 있고, 일본에는 신도가 있다. 그럼 우리의 종교는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무巫’ 가 있다. 무속신앙이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원래 그쪽 사람들은 ‘무속’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
‘무’또한 하나의 종교이기 때문에 성의 영역이지만, 유교가 지배했던 조선시대부터 ‘속’자를 붙여서, 신앙을 ‘속’의 영역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학교 주위를 돌면서 점집, 점카페들이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보아라.
한국에서 점술에 종사하는 사람은 약 55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인구 100명당 한 명이 점술인 인 것이다.
국회의원 장관의 부인치고 점집 안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유난히 신경정신과가 발달하지 않는 이유도 무와 관련되어 있다.
사람들이 정신과의사들에게 상담 받을 이야기들을 점쟁이에게 전부 털어놓아 버리는 것이다.
속에 있는 얘기를 다 털어놓아서 좋고, 게다가 미래에 어떻게 될지 알려주기까지 하지 않는가.

조선시대에 국가적으로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무는 자리를 잃어갔고 무당도 사라져 갔다.
마을 곳곳마다 있던 장승배기도 모두 뽑아내 버렸다.
유교 문화는 한국에 남성중심의 가부장제를 강하게 자리잡게 했다. 유교는 남성중심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장가 못 간 남자는 무덤도 안 사준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영매>에 나왔던 최점례 자매의 춤은 전통문화 보존 차원에서 무형문화재로 등록이 되었다.
무의 진정한 의미보다는 춤사위와 노래라는 예술로 보게 되었다.
그것은 과연 바람직할까.

우리 인간은 정말 평등할까. 모두가 동등하게 태어났다는 말을 진실일까.
확실하게 평등한 한가지는 “인간은 태어난 이상 누구나 죽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태어난 순간은 느끼지 못하지만, 죽음은 철저하게 느낀다.
또한 태어난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지만, 죽는 것은 의지가 작용할 수 있다.
죽음은 성자의 마지막 단계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무엇일까?
대상에 대해 물음표를 던질 줄 안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까지 진화해 올 수 있었다.

‘신화와 죽음’에 관한 강의 이어짐.

추천 도서
<죽음의 탄생>
<사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