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의 자서전 #3 내 인생의 관심사와 만나다

스무살의 자서전 #3
내 인생의 관심사와 만나다
영화를 만나다
사진을 만나다

내 인생의 관심사와 만나다

집에서 가장 가깝기도 하고 평소 가고 싶어하던 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됐고 반 배치고사를 본 뒤 반을 배정받았다 .1학년 3반, 문정자 담임선생님. 초등학교 2학년 이후로의 기억은 많이 선명하고, 중학교 이후의 기억은 거의 모두 살려낼 수 있을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등교 첫 날의 교실 안 풍경을 기억할 정도니 말이다. 수업이 시작 전 나는 즐겨보던 어린이 잡지 '어린이동산'을 읽고 있었다. 그러자 멀리서 담임선생님께서 나의 자리로 다가 오시더니 무엇을 보고 있냐고 물으셨다. 나는 책의 표지를 보이면서 어린이동산 이라는 잡지를 읽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말씀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제 중학생이 되었으니 어린이가 아니죠. 오늘까지만 보도록 하고, 중학생한테 어울리는 다른 책들을 읽어보세요."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었다. 그 날 이후로 난 학교에 그 잡지를 다시는 가져가지 않았지만, 집에선 여전히 즐겨 읽었다. 그 잡지에는 재미있고 유익한 내용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중학교의 수업은 초등학교의 방식과 180도 달랐고, 난 그러한 수업 방식에 무척 잘 적응해 나갔다.

중학교 시기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에 대한 것들을 알려준 시기다. 초등학교 때의 나의 관심사가 수시로 바뀌어서 꿈도 수시로 바뀌었지만, 중학교 때는 나의 취향을 적당하게 잡아내고 그것을 나의 관심사 만들 줄 알았다. 먼저 내가 수학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복잡하게 계산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을 하는 과정이 나의 머리를 정말 아프게 만들었다. 수학 시간만 되면 왜 계산기를 멀쩡한 계산기를 놔두고 왜 이렇게 고생해서 손으로 계산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불평을 하곤 했다. 한 번은 수학선생님을 찾아가 "전 정말 수학이 어려워요. 수학이 싫은데 어떡하면 좋죠." 라며 진지하게 나의 문제를 털어 놓기까지 했었다. 수학시험을 보면 성적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수학의 교과과정을 따라가기에 내 스스로가 벅차했다. 그 때 내가 수학을 좋아했더라면 내 인생은 바뀌었을 것이다. 수학 말고는 특별히 싫어하는 과목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내가 체육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몸이 성장하고 친구들 간에 공을 차는 실력 차이가 났고 자연스레 축구를 할 기회가 많이 없어졌다. 체력도 좋고 지구력도 좋았지만 공만 잡으면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체육의 실기는 주로 구기 종목 능력을 봤고 덕분에 나의 체육 실기 점수는 말도 못했다. 대신 미술의 실기와 음악의 실기는 괜찮았기 때문에 체육에서의 손실을 회복할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체육시간에 소홀했던 것이 후회되기도 한다. 좀 더 적극적으로 공놀이를 열심히 해서 중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 기분이 안 좋을 때나 스트레스가 쌓일 때 공을 차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울 뿐이다. 수학과 체육을 잃었지만 얻은 것이 더욱 많았다.

난 영어를 무척 좋아했다. 나는 중학교에 들어와서 영어를 처음으로 배우는 것이었고, 영어시간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흥분 속에서 언제나 열심히 했다. 그리고 나는 과학을 좋아했다. 과학 시간엔 옆자리의 짝꿍과 토론을 벌이곤 했다. "왜 갑자기 생물이 늘어난 거지", "그건 왜 그런 거지" 라는 식의 질문을 계속 서로 물어가면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사회 과목이었다. 국사를 비롯해서, 세계사, 그리고 경제현상까지 통틀어서 배웠던 사회시간은 정말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정말 자상하셨던 사회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묻는 질문에 늘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셨다. 특히 나는 국사를 좋아했었기 때문에 꽤 오랫동안 나의 꿈은 국사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시간이 좀 흐른 뒤 고등학교에 가서는 관심분야가 국사에서 경제로 바뀌었을 뿐, 사회는 역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라는 것은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이때부터 내가 앞으로 택해서 걸어가야 할 학문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중학교 시기는 내 인생의 방향과 즐거움을 찾아 준 것이다. 영어를 좋아했던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팝을 듣기 시작했다. 부모님께서 영어듣기를 하라며 휴대용 카세트를 사주셨지만, 나는 그것을 사용해 중학교 3년 내내 팝만 들었다. 팝을 좋아하게 되면서 내 인생은 리듬을 타게 되었다. 늘 팝만 들어서 한 친구는 나한테 제발 좀 그만 듣고 국산 가요 좀 들으라고 말을 했다. 나 말고 남들이 모두 듣는 가요를 듣지 않은 덕분에 나는 유명한 가수의 가요 하나 조차 제대로 따라 부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팝을 들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나와 똑같이 팝을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알고 있는 팝에 대한 지식을 교환하고 팝 얘기를 나누면서 둘도 없는 친한 친구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다. 우리 둘은 아침에 학교에 오자마자 팝 얘기로 시작해서 오후에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까지 팝 얘기로 대화를 나눴다. 정말 마음이 잘 맞았던 이 친구와 같이 고등학교로 진학하자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나중에 미국에 가서 살자는 꿈을 공유하기도 했다. 팝은 내가 발견한 첫 번째 즐거움이다. 팝을 좋아하게 되면서 마음이 잘 맞는 친구를 만나게 된 거고, 경쾌한 인생을 보내는 준비를 완료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한 소절도 따라 부르기 힘들었던 가요대신 가사를 줄줄 외웠던 팝은 내 인생의 반가운 손님이었다./

영화를 만나다

이어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팝을 들으면 경쾌한 걸음을 걷고 있던 나에겐 또 다른 손님이 찾아온다. 바로 영화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은 백 퍼센트 환경 덕이다. 먼저 중학교 2학년 초, 중학교에서 50미터 떨어진 거리에 '빅뱅'이라는 비디오대여점이 생겼다. 영화대여점의 비디오 대여료는 한 편당2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과 8박 9일이라는 파격적인 대여기간을 제시했다. 물론 오래된 프로에 해당했지만 말이다. 그 전엔 동네에 있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심형래의 영구시리즈를 빌려다 보거나, 정말 재미있다고 소문난 영화를 빌려다 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비디오대여점이 생기면서 나는 매일 같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과자 하나와 아이스크림 하나를 덜 먹으면 5편의 비디오를 빌려다 볼 수 있었다는 계산 하에 나는 그것을 적극 이용했다. 당시 비디오대여점은 일반 구프로와 추천프로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나는 추천프로를 모두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뒤 시간이 지나자 정말 추천프로의 비디오를 드문드문 빼먹고 거의 모두 빌려보게 되었을 정도였다. 처음에 영화는 나에게 가르침을 주거나 감동을 주지는 않았고 나도 그런 의도에서 영화를 빌려다 본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단지 방과 후 집에서 보내는 시간에 재미있는 비디오를 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재미를 얻기 위해서 빌려 본 것이었다. 월요일만 되면 비디오가게에 가서  '이번 주는 무슨 영화를 볼까' 라는 고민을 하며 일고 여덟 편의 비디오를 한꺼번에 빌렸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무엇을 먼저 볼까'라는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아쉬운 것은 내가 그 때 내가 본 영화들을 적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중학교 때 영화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비디오테이프 한 개는 교과서보다도 더욱 의미가 있었다. 그 이후로 난 영화 속에서 수많은 스승들을 만나게 됐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게 됐다.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에 나의 감정을 이입시켜 눈물을 펑펑 쏟아내기도 했다. 어느 날은 새벽녘 잠이 안 와서 영화를 한편 보는데, 그 영화가 어찌나 슬프던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계속 울었던 적도 있다.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포레스트 검프'를 보면서 인생은 초콜릿 박스와도 같아서 어떤 삶의 방향을 걸어가게 될지 예상할 수 없다는 주인공 어머니의 철학과, 어느 길을 가든 간에 자신의 앞만 바라보면서 꾸준히 달려가는 포레스트 검프의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모습은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의 Carpediem(현재를 즐겨라)이라는 외침 속에서 내 인생의 초점을 어디에다 맞추고 살아갈 것인지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파인딩 포레스터'를 보면서 인생의 역할 모델을 발견하게 됐고, '노팅힐'을 보면서 뜻밖에 찾아 올지 모르는 사랑에 대한 기대를 품게 되었고, '나홀로 집에'를 보면서 뜻하지 않게 가족의 소중함을 발견했다.

언제부턴가 무슨 영화를 보든 간에 꼭 한 가지의 배움을 발견하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영화는 나에게 가장 큰 스승님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영화에서 얻는 감동과 교훈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보다도 훨씬 더 오래갔고, 주인공의 모습과 행동은 머릿속에서 전혀 떠나가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 꿈이 국사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던 것도, 영화를 만나고부터는 영화감독이 되는 것을 꿈으로 가지기 시작했다. 친구나 가족은 나의 기분을 일일이 맞춰줄 수는 없었지만, 영화는 항상 나의 기분에 따라와 줬다. 힘들 땐 주인공이 크게 성공하는 영화를 골라보면 됐고, 웃을 일이 없고 힘이 나지 않을 땐 재미있고 웃기는 영화를 찾아보면 됐고, 화가 날 때는 눈물 나는 슬픈 영화를 보면서 감정을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점은 영화를 보기 전과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내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나의 모습이 바뀌는 데에는 100분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에 대한 환상을 펼쳐나갔다. 늘어가는 환상이 인생에 좋은 영향을 미칠지 악영향을 미칠지는 모를 일이었다. 분명한 건 내가 영화를 많이 보면서 또래보다 더 성숙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남의 삶을 보고 배우는 것이더라도 나에겐 하나하나 교훈으로 다가왔다. 전주에서는 전주국제영화제가 마침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첫 회가 개최됐다. 이 역시 영화와 나의 운명적 만남이 아닐까. 중학교 때는 혼자 돌아다녀보지 못해서 선뜻 버스를 타고 영화제에 갈 수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이후론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계속 참가하고 있다. 하필 전주영화제 기간이 학교의 중간고사 기간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지만, 나는 시험에 아랑곳 하지 않고 늘 영화제에 참석했다. 그 모든 것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가 던져준 현재를 즐기라는 메시지 아래 행해졌다. 고등학교 때는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어서 중학교 때만큼 영화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말이 되면 꼭 비디오를 빌려보고 극장을 찾아 영화를 즐기곤 했다. 단순히 영화를 즐기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나는 내가 사는 곳에 생기는 영화관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전주영화제 덕분에 전주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한국의 4대 멀티플렉스라고 불리는 극장들이 전주에 모두 들어왔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메가박스는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정말 많이 방문했다. 처음 생겼을 때는 운영과 관리 측면에서 미숙한 점이 많이 보여서 꾸준히 고객엽서 카드를 쓰면서 좋은 의견을 제시했다. 그런 노력이 결국은 복이 되어 돌아왔다. 메가박스에서 벌인 이벤트에서 내가 1등으로 당첨되어서, 100일 영화 무료 관람권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 때 관심의 힘을 새삼 깨달았다. 특정 대상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애정을 보이면 좋은 결과가 찾아온다는 사실. 좋은 일이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 그 관심은 순전히 내가 좋아서 보인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가 있다. 100일 무료관람권에 당첨 됐을 때는 너무나 기뻐서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모두 그 사실을 알리고 다녔다. 엄마도 그것이 행운이 아니라 나의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는 말을 해주셨다.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영화를 둘러싼 이외의 것들까지도 날 행복하게 만들어서 너무나도 감개무량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난 행복이라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진지하게 행복에 대해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 시절엔 행복을 정확히 내가 주무를 수 있을 정도로 다루진 못했지만, 나의 행복 곁엔 항상 영화가 함께 있었다. 서울로 대학을 와서도 영화에 대한 사랑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온라인을 통해 한 영화동호회를 가입하게 되고, 그 사람들과 함께 극장을 다니면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열심히 활동해서 결국 운영자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 한해 동안 극장에서 본 영화는 모두 180여 편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본 것이다.

그 뒤로 난 한 해에 꼭 영화 100편씩 보자는 다짐을 했다. 영화감독의 꿈은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잠시 뒤로 미루어 두었다. 하지만 그 꿈은 아직도 유효하다. 난 제임스카메론 감독처럼 미국의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감독상을 거머쥐고 싶다. 눈을 감고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면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감이 생긴다.  영화는 내가 팝에 이어 두 번째로 발견한 인생의 즐거움이다. 새로운 영화가 일주일 마다 극장에 바뀌어 걸리는 한 내 인생은 늘 새로움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진을 만나다

첫 번째 발견은 음악이었고, 두 번째 발견은 영화였다. 음악과 영화 모두 다른 사람의 창작물이다. 그래서 창작자와 그걸 감상하는 나는 일방적이고 수동적이 관계가 되어버린다. 나에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취미가 필요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세 번째로 발견한 나의 보물은 바로 사진이다. 그저 다른 사람의 사진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진을 찍어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에 대한 사랑은 중학교 3학년 때 시작 되었다.  나는 엄마께 디지털 카메라를 무척 사고 싶다고, 합리적인 이유를 대가면서 디지털 카메라를 사야 되는 이유를 말씀하셨다. 언제나 그랬듯 어머니께서는 디지털 카메라를 사주셨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사진을 찍기 시작한 나는 사진의 역사라든가 사진의 기초 같은 것들을 전혀 배우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피사체를 화면 안에 넣고 사진에 담을 뿐이었다.  디지털 카메라를 산 이후로 나의 모든 관심은 카메라에 쏟아졌다. 중학교 3학년이라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해야 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진을 찍는 일에 더욱 열중했다. 당시엔 디지털 카메라가 보편화되기 이전이었으니까, 나는 꽤나 학교에서 선두주자가 되었던 셈이다. 나는 중학교 친구들과 정말 많은 사진을 찍었고, 포토샵으로 사진을 편집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셔터만 눌러 대던 나는, 사진을 찍으면서 점차 좋은 사진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발견해 나갈 수 있었다.

나에게 좋은 사진이란 꾸밈이 없는 사진, 자연스러운 사진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뭘 모르고 과도하게 편집했던 사진들이 나중에는 정말 보기 안타까울 정도였다. 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전라북도의 디카 동호회 JBDICA라는 곳에도 가입해서 사진도 올리고 열심히 활동을 했다. 중학교 때 수만 장의 사진을 찍으면서 스스로 쌓아간 실력 덕분에,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제법 사진을 잘 찍는 다는 소문을 내고 다닐 수 있었다. 마침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나처럼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있고, 사진에 관심이 많은 친구와 만났다. 그 친구는 나보다 사진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기계 쪽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브랜드 별로 출시된 디지털 카메라의 모델명을 모두 꿰뚫기도 했다. 이후엔 디지털 카메라 시장이 엄청나게 커지면서 외우는 걸 포기했다. 나는 그 친구를 통해 사진 실력을 향상 시킬 수 있었고, 같이 사진을 찍으면서 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진을 찍으면서 놀다가 나중에 두 친구와 더 뭉치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디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역시 사진을 찍으면서 친해졌다.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져서 고등학교의 사진동아리를 만드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린 그 자리에서 바로 모임을 결성하고, 이름까지 FOCUS라고 지어버렸다. 그 이후 나의 고등학교 1년은 끝날 때까지 포커스 친구들과 함께 했다. 개성 만점이 FOCUS 친구들 덕분에 나의 고등학교 1년을 무척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반 친구들은 물론 다른 반에서도 우리 FOCUS의 이름이 조금씩 들렸다. 하지만 비공식 동아리였기 때문에 거의 우리 네 네 명의 친목 모임에 가까웠다. 하지만 고등학교가 끝날 때까지 나는 FOCUS의 이름을 잊지 않고 살았다.

사진은 나에게 많은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음악과 영화는 내가 행복을 받을 수 있는 통로고, 사진은 내가 직접 행복을 만들 수 있는 통로다. 친구의 사진을 찍어주고서 결과물이 만족스러울 때의 그 행복감은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은 나도 기쁘고, 잘나온 사진을 갖는 친구도 기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그 두 시선의 차이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창작해낼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느끼는 데에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고, 그 중에서도 사진은 누구나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창작의 길이었다. 글을 쓸 때처럼 곰곰이 생각할 필요도 없고, 작곡을 할 때처럼 멜로디를 머릿속에 그릴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피사체에 사진기를 대고 셔터만 누르면 새로운 창작물이 나오는 것이다. 다른 창작에 비해 고통이 너무 안 들어가서 정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지적될 수도 있지만, 사진은 노력 투입 대비 행복 산출이 매우 큰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내가 찍은 사진들은 온라인 게시판에 올리거나, 콘테스트에 많이 응모했는데, 콘테스트에서 꽤나 많은 상품을 받았다. 포탈사이트 네이버에서 졸업사진 콘테스트를 열어서 사진을 응모했을 때는 4위를 해서 MP3플레이어를 받은 적도 있고, 가장 큰 디지털카메라 사이트인 디시인사이드라는 곳에 사진을 올려서 '오늘의 사진'으로 뽑혀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사진을 보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느낀 건 사진이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느낌이었다. 사진이 찍기 전까지는 나는 운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진을 찍고부터는 여러 가지 콘테스트에도 당첨이 되고, 멋진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 지고, 동호회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으니 말이다. 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진을 찍는 순간만큼 행복한 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사진은 나에게 무척 긍정적 마인드를 정착 시켜주었다. 사진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의 속속들이를 발견해낼 수 있었고, 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것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해주었다. 내가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꺼내서 보면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거기에 배경음악까지 깔리면 정말 판타스틱한 여행이 돼버린다. 꾸밈없고 가식적이지 않는 사진을 좋아하지만,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는 정지화상을 통해 한 사람의 꾸밈을 혹은 가식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잘 웃지 않고 묵묵한 사람이 딱 한번 웃는 순간 그 표정을 포착하면 전혀 다른 모습의 이미지가 창출되는 것이다. 잘 웃지 않는 사람도 그 사진을 보면서 '내가 웃으면 이렇게 좋아 보이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이어 대학교에 와서까지 나는 영화를 좋아하고 사진을 잘 찍는 애로 통했다. 대학교에 들어와 늘 꿈꾸던 사진 동아리에 가입하고 열심히 활동했지만, 한꺼번에 많은 동아리를 들은 바람에 사진동아리를 포기하고 과 내의 동아리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과 동아리에서 엠티를 가거나 행사가 있으면 늘 내가 사진사가 되어서 사진 찍는 일을 도맡아 했다. 사진 찍는 일을 도맡아 하면 그 단체 사진에는 내가 들어갈 수 없게 되지만, 그것에 대한 아쉬움은 이미 고등학교 때 정리를 했었다. 같이 사진을 찍히는 것도 좋지만 다른 이들의 추억을 내가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기쁨을, 사진사는 그 기쁨을 가진다. 여전히 난 사진기를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주위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나와 그들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