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힘을 지니기 위해 우리가 지불한 대가는 소외다. 이 비용은 지적 기술에 있어서는 특히 클 수 있다. 사고의 도구들은 확장되고 그 대가로 우리의 자연스러운 능력들 중 가장 사적이고 인간적인 것들, 즉 이성, 인식, 기억, 감정 등은 마비된다. 기계식 시계는 이 기기가 가져온 모든 이점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앗아갔다. 루이스 멈퍼드가 현대적인 시계가 어떻게 “수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사건들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세상에 대해 믿음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왔는지”에 대해 묘사했을 때 그는 또한 그 결과, 시계가 “사람들의 일에서 시간을 고립시켰음”을 강조했다.
->
기술의 발전의 대가로 우리가 포기하고 있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것들, 이성, 인식, 기억, 감정이라고
한다. 우리는 더이상 가족들과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않으며, 연필로 꾹꾹 눌러쓴 서투른
연애편지를 주고 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메시지를 주고 받고 얼굴을 보고 통화할 수 있어서 더 이상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친한 후배 두
명이 각각 프랑스와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가있는데, 매일같이 카톡이나 페이스북으로 소식을 접하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만약 6개월안
전혀 연락을 못하고 이야기를 못 나누고 6개월 후에 만난다면 어떨까. 기술로
인해서 우린 가상 공간에서는 늘 함께 있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애틋한 그리움을 잃은 것이다.
언제 먹고, 일하고, 자고, 일어날지를 정하는 데 있어 우리는 우리의 감각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시계에 복종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과학적이 되었지만 더 기계적이 되기도 했다.
->
"딱 5분만 더 자고 싶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밥
먹을 시간이야." "미안 10분 정도 늦을
것 같아" 정말 우리는 시간과 시계에 복종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좀 더 크게 보면 시계에 복종하며 평생을
살아간다. 때가 되면 학교에 들어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할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하고, 회사에서 은퇴를 한다. 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라 때가 되서 한다.
맥루한은 소외는 기술 이용에 따른 피할 수 없는 부산물로 이해했다. 우리가 외부 세계를 더 광범위하게 통제하기 위해 도구를 사용할 때마다 세상과의 관계는 바뀌게 된다. 통제는 심리적인 거리를 유지할 때만 가능하다. 어떤 경우 소외는 특정 도구를 가치 있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집을 짓고 고어텍스 재킷을 바느질하는 이유는 바람과 비, 추위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공공하수도를 짓는 것은 위생상 오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자연은 우리의 적이 아니며 그렇다고 친구도 아니다. 맥루한이 하고자 했던 말은 새로운 기술, 더 보편적으로 말해서 진보에 대해 솔직히 평가하자면 우리는 얻은 것뿐 아니라 잃은 것에 대해 민감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술의 영광이 우리의 핵심자아를 마비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내부적인 감시의 눈이 멀도록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
기술(스마트폰과
인터넷)에 경계를 품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예전에
이런 생각을 했었다. 일주일 중 하루는 스마트폰을 집에 놓고 나오는 날로 정하자. 일주일 중 하루는 기계에서 떨어져 지내보자. 기술에 복종되어
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감시해보자는 생각을 했었지만 스마트폰 구입 이후로 폰은 내 손안을 떠난 적이 한 번도 없다.
습관적으로 아침 뉴스를 보고, 음악을 듣고, 정보를
찾아보고, 친구에게 말을 걸고, 페이스북을 하염없이 내리면서
친구들의 근황을 살피는 일상적인 나의 모습에 변화를 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지난 20년 동안 이루어진 일련의 심리학 연구는 조용한 시골에서 자연과 가까이 하며 일정 시간을 보낸 후 사람들은 더 높은 집중력과 강력한 기억력, 그리고 보편적으로 향상된 인식을 보인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들의 뇌는 고요한 동시에 더욱 예민해진다. 집중력 회복이론에 따르면 그 이유는 사람들이 외부적인 자극의 폭격을 받고 있지 않을 때 뇌가 실제로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래에서 위로의 산만함을 처리하면서 작업 기억을 혹사시키지 않아도 된다.
->
아침에 집에서 나와 회사에 오는 길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외부 자극에 노출이 될까. 버스 안을 꽉꽉 채운 사람들과 정류장마다 나오는 광고 방송, 눈만
돌리면 보이는 거리 위의 광고들까지. 그런 외부자극을 차단하기 위해 나는 음악을 들으며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본다. 외부자극을 차단하기 위해 다른 외부자극을 이용하는 것이다. 도시에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 같다. 정보처리에 과부하가 걸리기 쉬운 환경이지만 쉽사리 마음을 편하게 하지 못하는 곳이다.
1950년대 마틴 하이데거는 다가오는 “기술 혁명의 파도는 인간을 꼼짝 못하게 넋을 빼놓고 눈을 멀게 하고 현혹시켜 이 계획적인 생각은 어느새 유일한 사고방식인 양 받아들여지고 실행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그가 우리 인간성의 정수라고 여긴 ‘깊은 사고’는 돌진하는 진보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격동의 기술 발전은 콩코드 역에 도착한 기관차와 마찬가지로 사색과 명상을 통해서만 가능한 잘 정제된 인식과 생각 그리고 감정을 잠식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기술의 광란은 모든 곳에서 견고히 자리 잡을 태세로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적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너무도 기계적이어서 가장 인간적인 등장인물은 도리어 기계인 것으로 밝혀진다. 큐브릭의 암울한 예언의 정수는 바로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컴퓨터에 의존하게 되면서 인공지능으로 변해버리는 것은 바로 우리의 지능이라는 것이다.
->
그래서 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 기술과 기계가 지배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인간다움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그 전에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인류의 역사는 인류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걸어온
것 같은데, 우리는 왜 지금 인간다움의 상실을 얘기하는 걸까.
기술을 퇴보시키면 우리의 인간다움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인간다움을 잃은 99명의 사람과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1명의 사람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과연 누가 '인간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