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내린 가을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있고

정점은 군대시절이었다. 과업이 끝나면 딱히 할 일이 없었고, 주말에도 낮잠을 자거나 TV를 보는 일 외에는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늘 '공부방'에 내려가서 연필과 종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무작정 생각나는 것들을 종이에 옮겨 적었다. 그때만큼 나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들을 솔직하게 적어내려갔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참 많이도, 청춘에 대해 고민을 했더랬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나라에 청춘을 위로하는 책들이 쏟아지고, 강연회가 열리면서 나의 글 속에 '청춘'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일이 줄어든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던 행동이었던 것 같다. '청춘'을 내 글에서 반복하면서 스스로를 청춘이라 칭하면 정말 위로받아야만 하는 대상이 되는 느낌이었다. 군대 시절에만 해도 '청춘'이라는 단어는 펄떡펄떡 뛰는 이미지로서 마음 속에 번졌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청춘'에서 '푸를청과 봄춘 - 푸른 봄'의 생기는 느껴지지 않았고, 그 단어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사회의 역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들의 힘없는 노랫말 같았다.

지난 추석 때 어머니께서도 나에게 '힘들지' 라는 말을 건네주셨다.

一生靑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CD선물을 건네받았던 적이 있었다. 청춘이라는 건 좋은 거라면서, 육체는 늙어가도 청춘의 마음은 바래지 않는다는 걸 느끼며 감격스러워 했었다. '그래 난 언제까지나 청춘이야'라며.

기성세대와 사회의 청춘을 향한 위로와 동정들이 오히려 '청춘'을 정말 나약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건지 생각해 본다. 뭐 나도 "동정을 할거면 돈으로 주세요."라고 말을 해보고 싶다.

지금의 사회를 만들어온 것에 대해 미안해하지도 않아도 되고,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인마냥 너무 멀리 떨어져서 위로를 해주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어른들의 세계에 들어오고 싶어해서 들어온 우리들이니까 같이 세계를 공유하는 존재들로 봐주는 편이 더 사회를 위해 바람직하다.

어느덧, 어제 내린 가을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있고, 다가오는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