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의 자서전 #2
시골 소년 뛰어 놀며 자라다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
큰 세계로 첫 발을 내딛다
시골 소년 뛰어 놀며 자라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전라북도 완주군의 작은 시골마을, 홍개라는 곳이다. 약50여 가구가 있었던 것 같다. 마을 앞뒤로는 야산이 있었고, 좀 떨어진 곳으로는 작은 천이 흘렀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시골마을 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가족처럼 함께 어울려 지냈고, 마을의 아이들 또한 그랬다.
마을은 우리 꼬마들이 지켰다. 우리들은 항상 같이 어울려서 지냈는데,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면 다시 뭉쳐서 오늘은 뭘 하면서 놀까 라는 고민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요즘 도시의 아이들이 조기에 한글을 익히고, 여러 가지 학원을 다니는 것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우리가 하는 놀이는 모두 동네의 형들에게서 배우는 것들이었다. 겨울이 되면 마을에 버려진 빈 분유통을 찾아서 쥐불놀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 아침을 먹고 놀기 시작해서, 점심때가 되면 다시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다시 모여서 해가 지기 전까지 계속 놀았다. 당시 마을이 윗동네와 아랫동네로 나눠져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때 당시에는 굉장히 멀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아랫동네 사는 나로서는 윗동네 애들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결코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우리 형제와 가장 친했던 친구 역시 다른 집의 두 형제였다. 우리와 나이도 비슷했다. 늘 새로운 놀이를 원하고 매일 뛰어 놀던 그 때. 그 때는 행복이 무엇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테니 말이다.
시골에서 뛰어 놀던 나의 유년시절은, 학습지를 풀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었고, 한글을 빨리 깨우치기 위해 혼나지도 않았고, 나의 적성에 맞는 특기를 찾느라 여러 학원을 헤매지도 않았다. 산과 들을 나의 무대로 삼아 열심히 뛰어 놀 수 있던 시골의 환경 덕분에 나는 스트레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건강하고 즐거운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뛰어 놀기만 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어렸을 적부터 한글을 깨치기 위해 노력한 아이들과 똑같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뿐이다./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
정들었던 고향, 홍개를 떠나 그리 멀지 않은 곳 이서라는 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똑같은 시골이었지만 이사를 간 곳은 면의 소재지 이었고, 홍개에 비하면 슈퍼도 있고, 초등학교 중학교도 있고, 여러 가지 학원도 있을 만큼 발전한 곳이었다. 이 이사는 작은 곳에서 더 큰 곳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였다. 이 순간부터 내 인생의 목표가 암시되는 듯 했다. 물론 그 어릴 적에는 나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홍개에서 정말 가깝게 지냈던 형제 같았던 친구들과는 멀리 떨어지게 돼서 더 이상 함께 뛰놀 수 없게 되어서 많이 아쉬웠지만, 이서에는 더 많은 친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서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이서초등학교에 속해있는 이서 병설 유치원에 들어가 1년간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당시까지 한글을 알지 못했던 나는 그 때부터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고 정말 다양한 아이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때도 지난 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게 나는 열심히 뛰어 놀았다. 유치원 옆에 있는 놀이터라는 곳은 새로운 놀이의 소재가 되어주었고, 그곳에 데려만 놓으면 하루 종일 놀 수 있을 정도로, 우리들은 다양한 놀이들을 스스로 만들면서 놀았다. 그 유치원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모두 다 같이 같은 초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이서초등학교에는 멀리서 어린이학원을 다니다 온 친구들까지 만날 수 있었다. 엄마 손을 잡고 넓은 초등학교의 운동장에서 입학식을 했던 기억이 아주 흐릿하게 남아있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엄마는 나를 피아노 학원을 다니게 해줬고 그로부터 3년 동안은 학교가 끝나면 매일 피아노 학원을 가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내가 긴장했었을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처럼 나는 새로운 다짐을 가지고 시작했을까?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런 다짐을 가지고 초등학교 입학을 했다면 난 천재였을 테지만, 난 천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거 하나는 정확히 생각난다. 선생님께서 책을 나눠주실 때의 그 설렘. '읽기', '말하기와 쓰기', '즐거운 생활', '슬기로운 생활', '바른 생활', '산수' 교과서 책상 위에 쌓여갈 때 정말 기뻤다. 앞으로 무엇을 배우게 될까라는 흥분 속에서 책 전체의 그림들을 훑어보았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의 마음가짐이 늘 초등학교 때와 같다면, 정말 즐겁게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중학교에 올라가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새 책을 받는 것이 즐거움만은 아니었다. 책을 열어보자마자 ‘이제 이렇게 어려운 걸 배워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 먼저 하고는, 입을 쩍 벌리곤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에는 배운다는 것은 오로지 세상을 알아가는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지금의 나의 모습, 배움의 즐거움을 약간 잃어버린 나에게 뭔가 말을 해주고 있는 것 같다. 배움의 즐거움을 꽤나 일찍 깨달아서였을까. 나는 시험을 보면 전부 다 맞히거나, 늘 한두 개 정도만 틀렸다. 그래서 이서초등학교에서는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다. 바로 한 학년 위였던 형도 계속 전교 1위를 했으니, 우리 두 형제는 공부를 잘 한다고, 학교는 물론 동네에 까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피아노 학원을 다닌 것 외에는 다른 교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피아노에는 꽤나 소질이 없었던 것 같다. 3년 동안이나 다녔지만, 학원을 그만두자마자 모두 잃어버린 걸 보면 말이다. 피아노 학원까지 끝나고 나면 또 다시 놀이가 시작된다. 어렸을 적 보다는 좀 더 수준이 높아진 놀이들을 만들었다. 누가 가르쳐 준 놀이들을 하는 것이 아니었고, 모두 우리가 만들어 낸 것들이었고, 우리가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가면서 하나의 놀이로 완성해갔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놀기도 하고, 친구 집에 가서 놀기도 하고, 동네의 논과 밭에서 놀기도 하고, 동네의 형들과 자전거를 타면서 놀았다. 동네엔 형들이 굉장히 많았고, 우리의 놀이 사업은 정말 조직적으로 탄탄했고, 함께 놀자고 부르기만 하면 언제나 달려 나갔다. 교과과정을 따라가기엔 전혀 문제없을 정도로 학업 쪽은 수월했고, 노는 것도 전혀 소홀하지 않았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축구를 무척 좋아했었다. 학교가 끝나면 꼭 축구를 한 게임씩 한 것 같다. 친구들에 비해 썩 잘하지는 않았지만, 공에 집착을 보여 끝까지 따라다니는 것 하나는 잘 했다.
축구 보다는 내가 소질을 보인 쪽은 미술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인가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다. 교내에서 상상화 그리기 대회를 하면 나는 꼭 상을 타곤 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상상력이 좋다고 말씀해주셨다. 3학년 때는 우리 초등학교로 전문 미술 선생님이 오시게 되었는데, 나는 그 선생님에게 눈에 띄어 좀 더 체계적으로 미술을 교육받기 시작했다. 그 선생님은 학교 내에서 미술에 소질 있는 사람을 뽑아 미술대회팀을 만들었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는데 다달이 한두 대회는 꼭 참가했다. 높은 순위의 상들을 받지 못하고, 늘 장려상이나 입선 정도에 머물렀지만, 나의 실력에 그 정도의 상들을 받은 것에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특출 나게 잘하는 사람을 따라갈 정도는 못 되지만, 일반 사람들에 비하면 잘 하는 정도. 그게 내가 계속 존재해 온 위치이다. 그리고 늘 만족했다. 미술대회에서 상장을 받아오면 선생님들과 부모님께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아마 그 때 내 꿈은 화가였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재밌었고, 멋진 작품들을 보면서 화가의 꿈을 키웠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는 꿈을 한 가지만 가져서는 안 되는 법이다. 나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과학에 무척 많은 흥미를 보였고 나는 호기심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초등학생들은 호기심을 많이 가지고 있기 마련이고, 모두가 과학자가 되고 싶은 꿈을 한 번씩 품는 것 같기도 하다. 교내 미술팀에서 나의 실력이 인정받을 정도로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미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 받았고, 대회를 위해 미술선생님의 소개로 화원에서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학교에서 한 사람만 참가할 수 있는 대회에 내가 2년 연속으로 나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그 당시에 미술선생님께서 왜 나를 밀어주셨을까? 결국 내가 걸어온 길도 그와는 약간 길이 멀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 미술선생님께서 주신 선생님의 사랑으로, 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미술 실기 성적은 항상 최상급이었다. 여자 아이들보다도 밑그림 실력과 채색 실력이 뛰어나서, 친구들이 늘 미술학원을 다닌 적이 있는 거냐며 물었다. 눈에 띄지 않는 적당한 실력을 소유하고 있고, 자신이 그것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실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만 한다면 분명 튀게 돼있다. 초등학교 때의 미술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그런 교훈을 주신 것 같다. 학교에 미술 선생님이 아니라, 음악 선생님이 오셨다면, 그리고 따로 음악 교육을 받았다면 난 아마 남들보다 나은 음악 실력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이 축구공을 차고 있을 때, 나는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거나,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인지,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공을 차는 것에 실력을 잃어갔다. 역시나 어느 한 가지 일에 시간과 관심을 놓치게 되면 그 일에 대한 실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법이다.
공부를 잘 하면서도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 그리고 착한 아이. 이것이 나의 초등학교 시절 나에게 붙여진 수식어였다. 한 학년에 약 50여명이 있는 곳에서 1등을 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공부를 잘 해서 1등을 하는 것이지, 사람이 적어서 1등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서초등학교는 좁은 시골의 작은 학교였을 뿐이다. 사람이 적은 이서초등학교에서는 전교에서 벌어진 일이 몇 시간 뒤면 전교생이 모두 알게 되고, 한 사람의 일에 전교가 떠들썩 하곤 했다. 그리고 몇 학년에 누가 전학을 왔느니 하면, 그 학년뿐만 아니라, 전교의 모든 학년이 전학생에게 관심을 두었다. 같은 학년의 친구들은 물론이고, 전 학년의 이름을 외울 정도로 서로 사이가 가까웠다. 1학년 때 만나게 된 친구를 몇 년 동안 계속 같은 반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사이는 정말 가까웠고, 그 친구의 모든 것을 알 정도였다. 어린 나이여서 그런지 우리들은 별로 큰 일이 아닌 일로 싸움도 많이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큰 일이 아니지, 그 당시에는 정말 심각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도 누구를 죽이네 살리네 하는 심한 말들을 했었을 것이다. 또 한 번 마음이 틀어지면 다시 화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무척 오래 걸렸다. 그 때는 정말 사소한 일들에 상처를 크게 받았을 것이다. 나도 모든 친구들을 수용하진 못하고,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을 두어 그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같은 마을에 살았던 친구들 두 명이 있었는데, 우리는 스스로 삼총사 모임을 결성했고, 정말 모든 일을 함께 했을 정도로 가까웠다. 하지만 그 중에 한 명이 시내로 전학을 가게 됐고, 나도 나중에 전학을 가게 되어 죽마고우의 우정은 끝까지 이어갈 수 없었다. 지금도 그 친구들을 무척이나 보고 싶다. 그 친구들을 만나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 천진난만하게 놀 수 있을 것만 같다.
초등학교 때의 추억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끝없이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인센티브 제도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아시는 분이셨다. 선생님께서는 시험을 잘 보거나, 숙제를 잘 해오거나, 일기의 문장력이 좋거나 하면 사탕을 선물로 주셨다. 사탕은 늘 다양한 맛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공짜 사탕을 얻기 위해 늘 혈안이 되었다. 나 또한 사탕을 많이 받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었다. 선생님께서는 기업의 인센티브를 알고 계셨던 듯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우리 반의 말썽 일으키는 친구를 늘 바로 잡기 위해 엄청 시간을 많이 할애하셨다. 너무 그 친구에게만 신경을 써서 오히려 다른 아이들은 많은 관심을 많이 받지 못했다. 내 기억에도 3학년 때의 기억은 매우 조금 뿐이다. 4학년 때의 담임선생님께서는 신실한 기독교 신자이셨는데, 우리를 위해 많은 눈물을 흘리시고 정말 많은 기도를 해주셨다. 그 선생님께서도 학교 단체 생활에 적응을 잘 못하거나 비뚤어진 아이들을 바로 잡기 위해 애를 많이 쓰셨다. 학교가 끝나도 퇴근 하시지 않고, 그 아이들과 대화를 하면서 늘 기도를 해주셨다. 그 선생님께서는 몇몇 아이들에게 그 친구들과 더욱 더 가까이 지내라는 부탁도 하셨다. 그 선생님께서는 진심으로 우리를 위하셨고, 우리들이 바로 자라나길 원하셨다. 초등학교 선생님 중에서 가장 많은 기억이 남는 분 또한 그 선생님이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꼭 찾아 뵙고 싶은 은사님이시다. 그리고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을 이서초등학교에서 1년을 더 보내고 6학년 때 시내의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큰 세계로 첫 발을 내딛다
초등학교 5학년이 마칠 무렵 나는 부모님께 한 가지 부탁을 드렸다. 시내에 있는 학교로 가서 좀 더 많은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린 것이다. 부모님께서는 흔쾌히 허락을 하셨다. 내가 만약 이서초등학교에서 끝까지 있으면 늘 상위권에 앉아 있는 그 성적으로 안주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버스로 약 20분 거리에 떨어진 시내의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이서초등학교를 떠날 때는 그 동안의 추억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서 정말 많이 슬펐다. 도시의 학교를 처음 다니게 된 나는 처음에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의 학교에서는 전교생이 200명뿐이 되지 않아서 같은 학년의 친구들을 물론이고, 다른 학년의 형 동생들까지도 알 수 있었고, 서로서로 친하게 지냈었다. 하지만 전학을 간 학교는 한 반에 인원이 40명, 1학년에서 6학년까지 통틀어서 모두 60반이 넘었다. 전학을 간 나로서는 우리 반 친구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도 힘들었는데, 다른 반 애들을 안다는 것은 무리였다. 2000명에 가까운 애들 중에서 내가 알고 있는 건 고작 40명뿐이라는 사실은 나를 외롭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처음에 적응이 어려웠던 것은 바로 치열한 경쟁이었다. 시골의 초등학교에서는 시험을 보고 난 후 그냥 자기의 점수를 알게 되면 다른 친구들과의 점수를 비교해가면서 자기의 등수를 스스로 알아내는 것이었는데, 도시의 초등학교에서는 반에서의 자기의 등수와, 그리고 반끼리의 등수까지 나왔다. 한 학년에 많아야 두 반이었던 시골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시골에서는 누구는 몇 등이고, 누구는 몇 등이냐가 전혀 중요한 얘깃거리가 아니었을뿐더러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누구는 공부를 많이 잘하고, 누구는 좀 잘하고, 누구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정도로 나뉠 뿐이었다. 도시로 전학을 간 나는 자연스레 나의 등수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공부의 시간도 늘려갈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초등학교는 첫 이미지는 매우 차가웠다.
하지만 결코 안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골에서는 경험하지 못했을 여러 가지 것들을 경험하고, 여러 가지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원이 참가하는 운동회도 신기했고, 교생선생님들께서 학교로 교생실습을 나오시는 것도 무척 신기했다. 그리고 도에서 지원하는 과학영재교실이라는 곳도 참가할 수 있는 기회도 주워졌다. 경쟁적이기는 했지만 누구나가 경쟁적인 것은 아니어서, 기회를 얻으려고 조금만 노력한다면 모두 얻을 수 있었다. 난 결코 도시의 아이들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난 반에서 5등 안에 들었다. 그리고 그 등수는 늘 내 뒤를 따라다니게 되었다. 노력을 해서 얻은 결과고 나는 늘 그 정도의 성적에 충분한 만족을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께 나는 많은 사랑을 독차지 받았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나를 나중에 사위를 삼고 싶다는 말씀을 심심치 않게 하셨다. 전학을 간 학교에서도 많은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친한 친구들을 둘 수 있었다. 그 중 한 친구는 노래를 정말 잘 불러서 가수라는 소리를 듣는 친구도 있었고, 한 친구는 컴퓨터 게임을 정말 잘했다. 아쉬운 점은 반의 인원이 40명이나 되다 보니 모두가 하나 같이 친하게 지내는 것은 힘든 점이었다. 시골초등학교에서는 같은 반이 되면 무조건 친구가 돼서 잘 지냈고 다른 반의 아이들과도 단합이 잘 되는 편이었지만, 많은 인원 속에서는 당연히 끼리끼리 친한 친구들끼리 파가 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직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질수록, 경쟁이 심한 환경일수록 서로 간의 끈끈함과 따뜻함을 잃어가는 사실을 무척 빨리 체험했다. 또 내가 그런 현상을 막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그냥 그 조직에 적응해야 된다는 것도 알아버렸다.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에서 보낸 초등학교의 마지막 1년은 금세 지나갔다.
그렇게 시골의 이서초등학교에서 5년을, 도시의 초등학교에서 1년을 보낸 뒤 나는 중학교로 진학을 하였다. 아마 그 비율이 4년:2년 이거나 3년:3년 이었다면 아마 내 인생의 태도에 변화가 있었을 것이고, 내 인생이 변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경쟁이 심했던 환경에서 자랐다면 난 분명히 무척 경쟁적인 사람이 됐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우열을 비교하고, 조직에서 너무 앞으로 나아가려는 삶은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시골의 학교에 계속 다니면서 경쟁이 무엇인지 경험해보지 못하고 우물 안에서 나의 위치를 만족하면서 컸더라면 나는 지금 이 시대에서 경쟁력을 갖춘 사람이 되지 못했을 일이다. 경쟁보다는 협동이 있고 서로 노력하는 환경에서 5년을 보내고, 경쟁이 치열하고 뒤쳐지지 않기 위해 늘 노력해야 했던 1년을 보낸, 그 조화 덕분에 나는 현재의 매우 적당한 경쟁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 적당한 비율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