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 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강상중 교수의 '살아야 하는 이유'(원어 제목 - 고민하는 힘)를 읽었다. 작년 한 해는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고민을 하며 보낸 시기였다. 아주 작은 고민부터 인생의 길을 결정하는 큰 고민까지. 그런 고민들 때문에 마음이 약해졌던 한 해로 기억된다. 주위 사람들은 내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라. 지금은 어떤 고민에 빠지게 되면 그 고민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른 것 같다. '이 고민은 조금 나중으로 미뤄두자',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볼까' 하면서 말이다. 책의 내용이 아주 마음에 든다. 며칠전에 블로그 글에서도 언급했던 '복잡함과 단순함'에 대한 얘기들과도 일맥이 상통하는 부분도 있고, 후배와 나눴던 이야기들과도 연결이 되고 있다봐라. 우리 인생은 이렇게 신기할 정도로 치밀하고도 조밀하게 연결되고 연결되어 있다

책 속의 문장 몇 줄로 책이 전하는 의미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겠느냐마는, 심히 공감을 느끼고 간직하고 싶은 문장들을 옮겨 적어보았다.그리고 책을 접한 나와 아래의 몇 문장을 접하는 누군가는 또 연결된다. 이건 마치 클라우드 아틀라스. 

 거품경제 무렵이나 아니면 고도성장기 같은 때에는 꿈이나 목표라고 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거나 좋은 회사에 취직한다거나 출세한다거나 하는 좀 더 단순한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좀 더 소중한 것이 있으며, 그것은 바로 진정한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상당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진가(자기다움)를 발휘할 수 있는 특별한 뭔가를 발견하고, 그것에 집중하는 일이라는 말이지요.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자신의 세계'에서 자기답게 사는 것이 훨씬 멋지다는 것입니다. P90 우리에게는 무엇을 믿을 것인지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그것을 찾아내야 자신의 의미도 찾을 수 있습니다. P143   

8. 살아갈 근거를 찾아낼 수 있을까. 운명은 받아들이고, 인위는 극복하자두말할 것도 없이 인간은 만능이 아닙니다. 만능이 아니라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운명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겠지요. 이를테면 태어난 나라나 장소, 혈통이 그렇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는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는가, 아름다운 용모나 운동신경, 좋은 머리를 타고나는가, 남자로 태어나는가 여자로 태어나는가. 또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도, 크고 작은 질병에 걸리는 것도, 수명이 얼마나 될지도 인간이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중에는 운명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운이 좋다'거나 '운이 나쁘다'라는 표현으로 말해지는 것들입니다. 자연재해를 당하는 것도 운명적인 것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개인의 미미한 힘으로는 대응할 수 없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점도 있습니다물론 그에 굴하지 않고 맞서나가는 자세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맞서야 할 것과 받아들여야 할 것을 잘못 선택하면 비극을 부르게 될지도 모릅니다."흐르는 강물은 그치는 법이 없고 게다가 예전의 그 물이 아니다. 물이 흐르지 않고 괴어 있는 곳에 떠오르는 물거품도 한 순간에 사라졌다 다시 떠오르며 오래 머물러 있는 법이 없다. [호조키]"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그 마음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식의 착각을 하며 돌진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예지로 자연을 모두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도를 넘어선 개발을 진행했습니다. 이에 비해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보다는 인간이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고 하는 편이 낫겠네요.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도 사회의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 이를테면 회사나 지역공동체, 국가 같은 것들입니다. 산업, 제도, 정치, 과학, 기술 등도 물론 그렇습니다. 이런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므로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도 인간이니 책임지고 관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서 우리는 때때로 이중의 잘못을 저지릅니다. '자연은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회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만' '태만'의 조합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에게 유리하게만 생각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사회라는 것은 인간의 필연적 욕구에 따라 상당히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으므로 바꾸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바꾸는 것이 어렵다고 해도 멍하니 따라가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P154 

'인간', '자연', '화폐', 이 세가 지를 교환, 생산, 소비함으로써 돌아가는 시스템이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원래 상품화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인간'은 다른 말로 하면 노동력입니다. 하지만 살아 잇는 것이므로 애초에 물건으로 취급하는 데는 무리가 따릅니다. 능력에 차이가 있고 휴식도 필요하며 병에도 걸립니다. 하지만 일단 자본가와 계약을 맺어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을 노동력으로 사용한다고 해도 예전에는 개인의 능력을 개발한다는 사상이 있었고, 그런 생각은 적어도 1970년대쯤까지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점차 무너지고 결국에는 완전히 화폐로 계산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노동력은 전 세계 어느 나라의 창고에도 늘어서 있고 국경을 초월하여 자유자재로 조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는 역사상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P156 

현재 일본에서도 실업률 증가가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3장에서도 말한 것처럼 지표상으로는 5퍼센트 전후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것을 넘어섰을 겁니다. 이는 이상하게 높은 것인데, 정말 문제인 것은 이 상태가 이미 '비상사태'가 아니라 '상시', 즉 당연한 일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업자가 상당한 비율로 존재하는 것이 이 사회의 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을 전제로 시장과 사회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일찍이 경제학자 케인스가 지향한 최종적인 목표는 '완전고용'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달성된 시대는 한 번도 없었으므로 어디까지나 이상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런대로 인본주의적인 사상이 있었습니다. 시장경제의 제일 중요한 목표가 완전고용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설사 실업을 낳더라도 경제적인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 우선 과제가 된 게 아닐까요. 비정규직 고용으로 극한까지 인건비를 줄이고, 시급을 턱없이 깎는 상황을 보면 싫든 좋든 간에 그런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의 시장경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만성적으로 실업을 만들어 냄으로써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시장경제는 사회가 붕괴하지 않을 정도까지 실업률을 높이는 쪽이 부를 극대화 한다고 까지 말할 수 잇는 메커니즘이 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자본주의는 그 정도로까지 노골적으로 변용하고 일탈해 버린 것입니다.다른 한편으로는 실업의 원인을 사회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능력 문제라는 족으로 돌려버리는 사고가 유력합니다. 예컨대 실직한 사람이 "내 일이 없어진 것은 사회가 나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 "어리광부리지 마" 라든가 "남 탓 하지 마"라고 말하며 일축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고용 상황을 뒤덮고 있는 이런 가치관이 수많은 실업자를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P166 

인간은 누구라도 '일회성' '유일성'안에서 살고 있다고 프랑클은 말합니다. '일회성'이란 그 사람의 인생이 한 번 밖에 없다는 것을, '유일성'이란 그 사람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생의 탄생과 죽음에도 중대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은 한 번뿐이고, 따라서 사람은 둘도 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이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그 당연함이 상당히 오랫동안 망각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잘 살려고 한다면, 인간다움의 근본인 이 '일회성' '유일성'을 되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번뿐인 인생을 소중히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인생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구체적인 내용은 사람에 따라 제각각입니다. 다만 제가 특별히 말하고 싶은 것은, 과거를 소중히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을 소중히 하며 살아서 좋은 과거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고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소극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쪽으로만 시선을 향하고 마는 것인데, 인간에게 정말 귀중한 것은 사실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아닐까요. 과거의 축적만이 그 사람의 인생이고, 이에 비해 미래라는 것은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제로 상태입니다. 미래는 어디까지나 아직 없는 것이고, 무 일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과거는 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내 인생'이란 '내 과거'이니, '나는 과거로소이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중요시하는 것일 수 밖에 없고, 역으로 '가능성'이라든가 ''이라는 말만 연발하며 미래만 보려고 하는 것은 인생에 무책임한, 또는 그저 불안을 뒤로 미루기만 할 뿐인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유일성'입니다. 인간은 단순한 상품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절대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이는 어느 시대,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누구라도 괜찮다'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장경제 안에서는 그런 일이 당연하게 이루어집니다. 누구로도 대체 가능한, 사람이 상품화된 경제 시스템이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어, 사람의 존엄함을 현저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정말 중요한 것은,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 그런 면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입니다. 둘도 없는 생명을 갖고 있고, 주장을 가진 개인입니다. 중요한 것은 둘도 없는, 대체할 수 없는 바로 당신인 것입니다. 누구라도 좋은 것이 아니라 대체할 수 없는 당신, 그것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다시 한 번 우리의 '본래적인'(진짜의/자기다운) 존재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깊이 파고들어 생각하고, 받아들이거나 극복해야 할 사회의 모습이 무엇인지 다시 물을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요. P171 

 9장 인생이 던진 물음에 답한다. 

프랑클은 인간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진가 그 하나, 창조//예술적인 창조, 과학에서 이루어지는 발명, 기업활동에서 이루어지는 기술 개발, 상품이나 서비스의 창조, 뭔가 업적은 쌓는 것인간의 진가 그 둘, 경험//뭔가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낯선 나라를 여행해보고, 뭔가를 배우는 모임에 가입해보고, 자원봉사 활동을 해보는 것. '창조'보다는 못하다고 해도 '해보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경험만으로도 인생에 무게가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진가 그 셋, 태도 //프랑클은 어느 말기 악성종양 환자를 예로 들었습니다.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환자는, 회진 때 의사가 죽기 몇 시간 전에 통증을 완화해 주는 모르핀을 주사하도록 지시한 사실을 알고 그날 밤 죽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그 환자는 프랑클에게 "지금 그 주사를 놓아 주세요. 그러면 선생님은 저 때문에 밤중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까요." 하고 말했습니다. 프랑클은 이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비할 데 없이 인간다운 업적"이라며 칭송했습니다. P176 병 때문에 일할 수 없는 사람이나 일자리를 잃은 사람도 타자로부터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직업만이 인간의 존엄이 잇는 곳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 안에서 일을 함으로써 뭔가 생산물을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하는 것만이 인간이 가진 인격의 모든 원천은 아닙니다. 직업 이외의 것을 통해서도 충분히 자신답게 살 수 있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어 일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라도, 그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을 열심히 바라면 존엄은 충분히 유지할 수 있습니다. P180 
우리는 일회성과 유일성 안에서 살아가는 동물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한 순간 한 순간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P180 
인간의 존엄과 인생과 맞서는 태도라는 의미에서는, 프랑클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한 "그럼에도 삶에 대해 ''라고 말하려네"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 말에는 긍정적이고 느긋한 느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 대해 흔히 '이 인생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든가 '이 인생에서 나에게 어떤 좋은 일이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면 절망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자신의 손으로 인생을 끝내려 하기도 합니다.프랑클은 인생이란 "인생 쪽에서 던져오는 다양한 물음"에 대해 "내가 하나하나 답해가는"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이 물어오는 것에 대해 계속 대답해 간 사람만이 가혹한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았던 것입니다.자신이 이 세계에 대해 요구해 가는 것이 '창조'이고 자신을 넘어선 세계로부터의 요구에 대해 책임을 갖고 답해 가는 것이 '태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태도'를 단순히 수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세계를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초의미'의 존재로 인식하면서, 게다가 그 안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에 대해 하나하나 책임을 갖고 결단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도'라는 것이고, 운명을 그저 시키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p187 
우리의 인생은 그 인생에서 나오는 물음에 하나하나 응답해 가는 것이고, 행복이라는 것은 그것에 다 답했을 때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목적으로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즉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하지만 행복은 추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노력해도 안 된다는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 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도 괜찮다는 것, 지금이 괴로워 견딜 수 없어도, 시시한 인생이라고 생각되어도, 마침내 인생이 끝나는 1초 전까지 좋은 인생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 특별히 적극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특별히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당신은 충분히 당신답다는 것. 그러니 녹초가 될 때까지 자신을 찾을 필요 같은 건 없다는 것. 그리고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담담하게 쌓아 나가면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는 저절로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 등등. 이러한 '태도'가 아닐까요. P193 
제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낙관적 인생론이나 행복론을 체로 쳐서 비관론을 받아들이고 죽음이나 불행, 슬픔이나 고통, 비참한 사건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인생을 마음껏 살아가는 길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인간의 덧없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디까지나 겸허히 인간적인 것을 긍정한다"(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한다])는 것입니다. P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