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의 자서전 #4 나의 고등학교 - 세 가지 행복과 공부

스무살의 자서전 #4
나의 고등학교 - 세 가지 행복과 공부
시골소년이 서울까지 오다


나의 고등학교 - 세 가지 행복과 공부

초등학교 6학년 이후로 줄 곧 나의 위치는 중상위권이었다. 반에서 늘4~5등을 했다. 결코 1등은 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1등을 되고 싶은 욕심은 없었다. 나는 나의 위치에 만족했다. 성적이 심하게 떨어지는 일도 없었고, 크게 오르는 경우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내내 성적 순위에 대한 압박감은 전혀 없었다. 혹시 또 내가 아래쪽으로 많이 밀려나거나 그랬다면 모를 일이지만, 늘 나의 위치는 온전했다. 내가 1등을 하는 정도의 머리와 노력 정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또한 반에서 1등 하는 애들은 자연스레 모든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고 은근히 반을 대표한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에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다. 하지만 나 정도의 위치에 있는 애들은 선생님들의 적당한 관심과, 학업에 대한 적당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무척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너무나도 쉽게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는 법을 깨우쳐 버린 듯 했다. 나의 감정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참 평탄하고 평탄한 고등학교 생활이었다. 하지만 나의 기분은 늘 허공에 떠있었다. 음악과 사진과 영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3년을 기숙사에서 보냈던 나는 적당한 규제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즐길 수 있었다. 토요일 외박 날만 되면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니고, 엄마와 함께 데이트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순간을 즐겼다. 결코 학업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억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탈하지도 않았다. 공부를 한 시간 하는 것과 영화를 보러 가는 것 중 무엇이 더 가치 있을지를 따져가면서 행동했다. 적당히 조화로웠던 내 고등학교 시절 3년이었다. 고등학교 때 잊지 못할 친구들과 잊지 못할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FOCUS 친구들을 만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2학년 때는 정말 마음이 통하고 잘 맞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는데, 가장 기억에 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는 나의 고등학교 2학년 한 해의 모든 것을 함께 했다. 우리 둘은 공부, 놀이, 고민 상담까지 모든 걸 공유했다. 서로의 개그스타일도 비슷하고 취향도 닮아서 우리는 그렇게 잘 어울려 놀 수가 없었다. 정말 2학년 때는 학교에 가서 걔 때문에 웃는 걸로 시작해서 걔 때문에 웃으면서 일과를 마칠 수 있었다. 나보다도 머리가 좋고 창의력이 좋아서 난 늘 그 친구한테 많은 걸 배웠다. 심지어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법까지도 배웠다. 그 친구는 내 인생에 정말 큰 영향을 주었다. 항상 그 친구를 보면서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낼 거라는 확신을 하곤 했다.

일본으로 갔던 고등학교 수학여행은 나의 마인드를 확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일본에 갔다 와서 일본의 매력에 빠진 나는 당장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세계가 넓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넓디넓은 세계로 나아가고 싶었다. 나는 세 달 동안 일본어를 공부해서 일본어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라고 스스로 마음먹었다. 나는 한국 땅을 벗어나 더 넓은 곳에서 뛰고 싶어졌다. 한 번에 이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좀 더 넓은 곳에서 많은 아이들과 공부하고 싶어서 시골에서 도시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리고 줄곧 전라북도 전주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이곳에 더욱 머무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음의 목표는 서울이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내 옆자리의 친구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에 있는 고등학생들과 경쟁을 해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까 숨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마음먹고 일본어 공부를 시작해서 일본어 자격증을 딴 것은 나에게 큰 활력제가 되었다. 관심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수능 날짜를 세어가며 그 어느 때보다도 공부를 열심히 했다. 세상에 태어나 왕이 되어 가장 대접받는 시기, 고3 시기에 나는 조용히 목표를 향해서 항해지도를 그려나갔고, 마침내 내 노력의 결과는 빛을 발하였다./

시골소년이 서울까지 오다

나는 건국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을 했다. 처음엔 조금 더 높은 학교를 목표로 잡았지만, 건국대학교에 합격을 나고서도 합격한 것에 대해 감사했다. 난 열심히 대학생활을 해 나갔다. 하루하루를 새로운 계획으로 세워가면서 늘 바쁘게 지냈다. 금융동아리, 사진 동아리, 영화동아리 모두 세 동아리에 가입을 했고, 나는 어느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또 학업도 마찬가지였다. 힘들게 공부해서 올라 온 서울의 대학인만큼 열심히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동시에 잡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술자리를 피하게 되었고, 생활의 무게를 학과 공부 쪽으로 옮기면서 그 동안 크게 벌려 놓은 활동 범위들을 조금씩 좁히기 시작했다.

1학년 때는 학교생활 외에도 서울을 즐겼다. 서울은 한국의 수도이고, 난 늘 이곳에서의 생활을 꿈꿔왔다. 그리고 서울에서의 숨가쁜 생활을 나를 쾌감으로 몰아넣었다. 서울에서는 모든 게 빨리 빨리 돌아갔다. 사람들의 걸음도 빨랐고, 행동도 빨랐고, 경쟁 순위가 바뀌는 것도 빨랐다.  오직 느린 건 도로 위의 자동차들뿐이었다. 1학년 때는 건대입구에서 약 40분간 떨어진 신림에서 형과 함께 거주했다. 7시 정도에 지하철 2호선에 올라 등교할 때는 정말 지옥 같은 순간들의 반복이었다. 지하철 안에 꽉꽉 채워진 사람들, 다음 정거장에서 자리가 없어도 계속 들어오는 사람들. 그러고는 두세 정거장에서 그 많은 인원이 물밀듯이 빠져나간다. 그러면 그제야 난 자리를 잡고 앉아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비효율적이고 편향적인 개발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그래도 숨 막히는 지하철의 그 살벌함도 지방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이른 아침의 서울의 지하철은 아침부터 나의 각오를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다가 숨 막히고 공기가 안 좋은 출근시간대의 지하철을 피하기 위해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기로 했다. 난 새벽 4시에 일어나 학교길 채비를 하고 4시 50분에 첫차(버스)에 올랐다. 첫차를 처음 탔을 때, 나는 승객들이 많이 없어서 자리가 남아있을 걸로 기대했다. 하지만 첫차에도 사람은 무척 많아서 앉을 곳이 전혀 없었다. 서울은 이런 식으로 나의 또 한 번 뒤통수를 때려주었다. 서울엔 인구가 많고, 그래서 나처럼 출근 시간대의 지하철을 피하고 싶어 일찍 첫차를 타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지하철보다야 숨통이 트이는 버스였기 때문에 나는 늘 첫차를 탔고, 때문에 새벽 4시에 일어나야만 했다. 나의 서울 탐방은 주로 생기 넘치는 곳이 중심이 되었다. 명동과 동대문 운동장과 코엑스, 사람이 많은 곳을 가서 사람 보는 재미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는 재미를 느끼곤 했다. 그렇게 바쁘게 지냈던 1학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나갔고, 학업에서도 인간관계면에서도 서울탐방에서도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보람차게 1년을 보냈다.

그 1년 동안 난 성장하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고서는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생활방식이나, 사고하는 방식이나, 사람을 만나는 법이나 나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 즐겁기만 했던 대학생 1년을 보낸 뒤, 나는 군대에 지원할 수가 없었다. 그 즐거움을 좀 더 만끽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내가 탐구하고 있는 학문에 대해서도 정체성을 확실히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2학년까지 마치고 군대를 가기로 결정했다. 2학년에 첫 입학하자마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1학년 때 서울 구경도 많이 하고, 영화도 많이 봤으니, 이번엔 내 스스로 돈을 벌자 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르바이트 비는 학생인 나에게는 충분할 정도였고, 나는 1학년 때보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기숙사에 들어왔기 때문에 돈을 쓰지 않고 계속 모을 수도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부모님의 선물을 사갈 때는 내 스스로의 모습이 대견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아직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지만, 그 동안 나에게 바친 부모님의 땀에 대해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오전과 낮 시간엔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1학년 때보다 더 바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면서 내가 속해있는 조직에 대해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서 새로운 인간관계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느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2년 동안 나는 대학에서 등록금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전공수업보다 배울 것이 많고 유익한 교양수업들이 그러했고, 대학생활의 본보기가 되어주는 선배들이 그러했다. 기쁘게도 네 학기 중 어느 학기 하나 빼놓지 않고, 삶에 등불이 될 만한 교양수업들을 만날 수 있었고, 좋은 본보기가 되는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내가 환경의 산물이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해주듯이 말이다. 건국대학교라는 환경은 내가 인간으로서 성숙할 수 있도록 돕는데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또 언제까지나 환경 속에 숨어있는 기회를 발견해내는 일은 나의 몫이라는 것을 진작 깨달았던 터다. 이런 생각은 날 어느 조직, 어느 환경에 가서든 잘 적응하게 만드는데 도움을 줄 것도 같다.

대학교 2년 동안 나는 나의 꿈을 향해 끊임없이 달렸다.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넓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나의 목표이자 꿈.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는 친구와 둘이서 제주도 자전거 일주를 감행하면서 끈기를 얻고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는 학교에서 실시하는 해외 탐방 프로그램에 뽑히게 되어 저 먼 땅 유럽에까지 발 도장을 찍고 왔다. 유럽에 갔을 때의 감격이란 정말이지, 최고였다. 나는 계속해서 나의 꿈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좁은 시골에서 태어난 소년이 면의 소재지로 이사를 오고, 그 소년이 시내의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고, 지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벗어나, 서울로 대학을 오게 되고, 대륙을 벗어나 제주도에 가고 일본에 가고, 유럽에 가기까지는 20년의 세월이 걸렸을 뿐이다.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좀 더 넓은 세계로 향해 나아가는 꿈을 품는다면, 나의 꿈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