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뇌 회로는 계속 변형되고 있으면 새로운 뉴런과 새로운 시냅스 역시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대학에 입학했을 때와 대학을 졸업할 때의 뇌는 같은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정도로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20세 전반의 이 시기를 놓치면 이런 뇌의 대변화를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습니다. 즉, 지금이 사물에 대한 견해나 사고방식의 대변혁을 달성할 수 잇는 인생의 마지막 기회인 것입니다.
극좌표 중심사고에서 데카르트 좌표 중심사고로 전환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극좌표란 세계의 중심에 자신을 놓고, 무엇이건 자기중심적을 세계를 바라보는 구도를 말합니다.
정치 세계에서는 세계 어디에나 편협하고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조장하는 쇼비니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아직까지도 극좌표계 사고에 물든 뇌를 가진 사람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차이는 모든 사람들이 인생 어딘가에서 경험하고, 또 극복해 온 일입니다. 충고 비슷한 말을 하자면 시간을 들여서 극복하라는 정도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시간을 들여 운동과 같은 육체적 활동을 동반한 기분전환을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뇌가 하는 일의 절반은 자신의 육체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육체적인 행동을 하거나, 혹은 신체 각 부위에 있는 어떤 입력 센서에 일정의 강한 자극을 주면 금세 뇌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결국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절 수 없잖아.'라고 자신을 타이르고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일은 산처럼 많고 물론 나도 많았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테크닉의 하나가 바로 억지를 쓰는 것입니다.
실존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인간의 죽음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제시해 왔습니다. 인간은 죽어야 하는 구체적 존재로서 실제로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 그게 바로 실존이라는 거죠. 거기서 모든 철학적 문제를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 실존주의 철학의 기본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때는 전능감에 사로잡히지만 반대로 흔들릴 때는 '나는 아무것도 못해'라는 절망감과 무능감에 빠져 의기소침해 합니다. 이렇게 양극단으로 마음이 흔들려서 괴로워하는 것이 스무 살 때의 심리적 특징입니다. 여러분뿐만이 아닌 스무 살 전후의 젊은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심리인 것이죠.
"뭐야, 나만 특별한가 생각했는데 다들 그런거야?"라고 실망하지 않길 바랍니다. 스무 살 전후의 젊은이들이 가장 하기 쉬운 오해가 바로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독특한 존재이며 서로 다른 개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것 같으면서도, 실은 다양한 의미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유사하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진실입니다.
인간은 독특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상태에 놓이면 모두 똑같이 느낄 감정이나 정서 이것이 이른바 인간성이라는 것이니까요. 나만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개성과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기뻐할 만한 안도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의 좋은 점은 읽다가 싫증이 나면 바로 중단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관계라면 절대 불가능하지만 책은 계속해서 새로운 것으로 바꿔갈 수 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젊었을 때는 책이든 뭐든 내 취향이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던 것 같습니다. 젊을 때는 한쪽으로 치우친 내 취향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개성이라고 생각했고 개성은 무조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니 개성 같은 것에 가치는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뇌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많은 우연들이 쌓이면서 자신의 뇌에 일종의 편향을 가져왔고, 그 편향이 자신의 것이므로 가치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 것에 특별한 가치가 있을리 없습니다.
보편은 불편한 것입니다. 즉, 편향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난부 요이치로 선생의 '대칭성의 자발적 꺠짐'의 이론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의 뇌는 불편, 즉 완전한 대칭성을 유지한 채로는 발육할 수 없습니다. 바늘 끝에 볼베어리으이 공을 올린 채 장시간 놓아두면 반드시 굴러 떨어지는 것처럼 뇌도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어딘가에서 대칭성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편향이 생기게 됩니다. 개성은 어떤 자력으로 인해 생기는 것도 아니며 물론 신에게 받은 은혜도 아닙니다. 만물의 어머니가 주신 여러 우연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하나의 필연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연이 만들어낸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더라도 젊을 때는 그것이 자신의 개성인 이상, 거기에 가치를 두고 자신의 개성을 중심으로 앞으로 쭉쭉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젊을 때는 그것으로 만족하겠지만 나이가 들고 시야가 넓어지면 다른 사람의 개성의 장점도 눈에 들어오고, 가치 또한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자신의 개성을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의 개성과도 적극적으로 조화를 이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책을 읽을 때도 다양한 책에 적극적으로 손을 뻗는 것이 좋습니다.
프리먼 다이슨의 <다양화 세계> Infinite in All Directions '모든 방향의 무한함'
<프리먼 다이슨, 20세기를 말하다> 젊은 시절에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
어쨌든 우리는 자연과학적으로나 사회과학적으로나 또 인간과학적으로도 진위를 알기 어려운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분명 순수과학, 특히 물리학의 논리 등은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고 증명되거나 반증되는데 인간사회나 국가사회 혹은 국가 이익 등이 관련된 다양한 일에 있어서는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쉽게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이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의 세계, 그리고 현실 세계와 다른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무살의 여러분은 사건의 이면을 바라보는 훈련이라고 해야 할까 전달된 정보의 진위를 판별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전해들었을 때 재미있다는 생각에 무심코 달려들고 싶어지는 정보는 대개가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항상 그런 경계심을 갖고 있으십시오. 나와 같은 저널리즘의 세계로 들어오면 먼저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첫머리에서 서술했는데 사실은 일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문제의식을 갖고 매일매일 뉴스를 접해야 합니다.
역사란 그저 눈앞에서 전개되는 것일 뿐입니다. 역사란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인간들이 만들어냅니다. 인간은 항상 실패를 반복하는 동물입니다. 개인의 실패와 집단의 실패가 서로 뒤얽혀 만들어진 실패의 아라베스크 모양이 역사라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서 펼쳐지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현실도 상당히 혼란스럽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너무 큰 기대를 갖고 많은 것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실망할 일이 무척 많을 수 있습니다.
세상사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현실은 역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있을 수 있고, 무엇이 있을 수 없는지 사건에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항상 역동적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판타레이(panta rhei: 만물은 끝없이 변천한다)야 말로 영원한 진리인 것입니다.
<청춘은 길어도 아프지 않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