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의 자서전 #1
엄마와 가족의 사랑 속에서 자라다
아버지 그 듬직한 이름
자랑스러운 우리 형
엄마와 가족의 사랑 속에서 자라다
큰 아버지는 아들만 하나, 나의 아버지는 아들만 둘, 그리고 고모네도 아들만 둘. 나는 아들만 있는 집안에서 위에 형을 하나 두고 둘째로 태어났다. 그렇지만 아들만 있는 집안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딸 역할을 하는 아들로 통했다. 엄마는 나의 태몽이 감이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흔히 감은 딸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태어날 때까지 딸일 것이라고 생각했지, 아들이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읽어서였을까? 나는 가족들에게도 친척들에게도 그리고 이웃들에게도 아들이 딸 역할을 참 잘한다는 말을 무척 많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 말을 들어서 그런지, 나는 으레 딸처럼 행동하려고 더 노력했다. 무엇보다 나는 엄마와 마음이 통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엄마와 더욱 궁합이 잘 맞으려면 내가 딸이 되어야 했다. 그렇다고 집안에 앉아 인형을 가지고 논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나가서 뛰어 놀기를 좋아했고, 칼 싸움하기를 좋아했고, 로봇 만화를 정말 좋아했다. 내가 딸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하고, 엄마와 계속 붙어 있으려고 했기 때문이지, 여자아이들의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주위 친척들이 말하길 내가 아주 갓 난 아기였을 때부터 엄마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 한시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고, 잠시라도 엄마가 눈에 안보이면 그렇게 떼를 썼다고 한다. 그건 다 엄마의 사랑이었던 것 같다. 엄마가 나를 진심 어린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에 엄마를 사랑하고, 내가 엄마와 진정으로 교감을 이룰 수 있는 딸이 되고 싶어 했던 것을 아닐까.
나는 어려서부터 엄마를 너무나 좋아했었다. 세상의 모든 어린 남자 아이들이 그랬겠지만, 나는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했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유년시절에 엄마의 크나큰 사랑을 먹으면서 컸기 때문에 나는 살면서 한번서 방황이라는 것을 해보지 않았다. 그저 집이 좋았고, 집이 최고였다. 나이를 먹고 커갈수록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 갔지만, 그래도 나의 마음의 중심엔 우리 가족이 있었다. 집을 너무 좋아하고 가족과 함께 하는 걸 좋아해서 그런지 나의 지금까지 인생에서는 이렇다 할 격정의 시기가 전혀 없다. TV속에 나오는 가출청소년이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청소년, 물놀이에서 사고를 당하는 애들 소식은 아주 머나먼 나라의 얘기였을 뿐이다. 집에서 넘치는 사랑 때문에, 나는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드라마틱한 소년시절을 보내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기도 하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나에게 어머니의 넘치는 사랑과 나의 집은 나를 올바르게 자라게 해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만약 엄마의 사랑이 없었다면, 가족의 사랑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늘 초등학교를 다닐 때와 중학교를 다닐 때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다. 우리 집은 논 가운데 길을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있었는데 나는 집이 가까워오면 크게 "엄마!" "엄마!"를 외쳤다. 엄마가 창문을 열어 볼 때까지 크게 외쳐댔다. 창문이 열리는 게 보이면 나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엄마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어 댔다. 1분 뒤에 집에 도착하면 바로 엄마를 볼 수 있을 텐데, 나는 1분이라도 엄마를 빨리 보고 싶어서 크게 불렀던 것이다. 창문이 열리지 않으면, 혹시 엄마가 어디 나가셨나 라는 생각 때문에 허겁지겁 집에 달려왔다. 엄마가 없으면 난 참을 수 없이 기운이 안 나고 몸에서 힘이 쪽 빠져버렸다. 외출하실 땐 보통 어디에 간다라는 쪽지를 남기고 외출하셨지만, 그 쪽지라도 없는 날에는‘엄마가 어딜 가셨지’라는 생각을 하며 걱정을 했다. 집이 있다지만 엄마가 있지 않은 집은 향기를 잃어버렸다. 멀리서 집을 바라보면 왠지 엄마의 향기가 느껴질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는데 거짓말 같게도 그런 생각이 들어맞는 때가 많았다.
난 어려서부터 유달리 건강했다. 그런데 나는 건강한 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제론 운동신경이 나보다 뛰어나고, 체력도 좋은 형은 오히려 나보다 감기를 잘 걸렸다. 어렸을 때도 형이 아파서 소아과에 갔던 기억뿐이지, 내가 아파서 소아과를 간 기억은 드물다. 어릴 적 나에게 아프다는 것은 곧 가족의 걱정과 사랑을 배로 받는 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감기에 쉽게 걸리고 체질적으로 약한 형은 나보다 가족의 사랑을 많이 받는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난 왜 아프지 않는 거야’ 라고 속으로 투덜거릴 때도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자주 아픈 형이 미운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형이 심하게 감기에 걸려서 체육관을 갔다가 아픈 몸을 이끌고 집으로 온 적이 있었는데 정말 나도 마음이 아팠다. 어쨌든 어린 나이의 나는 형에 비해 체질적으로 건강했고, 그 만큼 형에게 사랑을 뺐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번은 내가 배가 아파서 호되게 고생한 적이 있었다. 엄마는 내가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늘 말씀하셨다. 음식을 잘못 먹었던 탓인지 밤을 설쳐가면서 화장실을 오갔다. 그 때 엄마는 밤새도록 내가 화장실을 갈 때마다 화장실을 따라와 배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리고 홍역을 앓았을 때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모두 해주셨다. 그런데 정작 아플 때는 정말 아파서 엄마가 고생하는 것도 모르고 나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몸이 약하고 아파서 관심을 받고 사랑을 받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지금도 감기 기운이 살짝 보이거나, 감기에 걸리면 가장 먼저 엄마한테 전화한다. 크게 아프지도 않은데도 감기에 걸렸다는 소식을 알린다. 아직도 어린 시절처럼 아픈 것을 이용해 사랑을 더 받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깨달을 나이도 됐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님의 마음은 더 아프다는 것. 아프기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을 더 간절히 원하고, 부모님은 사랑을 주면서도 마음을 더 아파하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부모님이 날 걱정해주길 바라는 나의 모습에서 나는 부모님을 따라갈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진심으로 엄마를 좋아했고, 진심으로 아빠를 좋아했고, 진심으로 형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항상 우리 가족들을 모방하려고 노력했다. 가장 많이 따라 한 것은 역시 엄마다. 내가 아빠를 더 좋아하고 따랐더라면 아빠와 성격이 비슷했겠지만, 나의 성격은 엄마와 무척 흡사하다. 인생에 대한 가치관부터 해서 삶 속에서 여유를 찾는 방법 까지도 엄마를 따라 한다. 좋아하는 음식도, 좋아하는 음악도, 좋아하는 사람 스타일까지도 닮았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겠지만, 우리의 가족은 내 삶의 영원한 동반자가 돼 주고 좋은 삶의 지표를 제시해줄 것이다. /
아버지, 그 듬직한 이름
나의 아버지께서는 농부이시다. 완주군 이서면 이라는 곳에서 농사를 지으신다. 주로 벼농사를 지으시고 그 외에 계절별로 여러 채소 농사를 지으신다. 시골에서 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나의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운 생각 같은 것이 없었다. 나의 아버지도 내 친구들의 아버지도 모두 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골에서 좀 큰 도시의 학교로 전학을 갔을 때부터 나의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도시 친구들의 아버지들께서는 모두 직장을 다니시거나 사업을 하셨지만, 나의 아버지께서만은 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직업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것을 꺼려했다.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친구들 앞에선 그런 얘기를 하는 게 힘들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생각이 깊어지면서 내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나를 길러주신 것은 모두 아버지께서 힘들게 농사를 지으신 결과라는 것. 고등학교 때는 기숙사에 들어가서 살았는데, 부모님과 따로 떨어져 지내면서 나를 위해 고생하시는 부모님에 대해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때. 나의 친형은 대학교에 입학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나도 형의 대학 입시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온 형은 우수한 성적 때문에 고등학교에서 스카우트를 해갔다. 형도 그 학교의 기숙사에 들어가서 지냈고, 부모님은 바로 옆에서 형의 학업에 대해 관여할 수가 없으셨다. 다만 집에 오는 날이면 맛있는 음식을 꼭 해주시고, 학교생활에 필요한 용돈을 꼬박꼬박 챙겨주셨다.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던 우리 형은 서울대에 들어가게 됐다. 그리곤 우리 동네엔 현수막이 걸렸다. 작은 동네라서 큰 자랑거리가 될 만한 거리였다. '서울대 합격' 이라는 큰 현수막이 동네에 걸리던 날, 우리 부모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좁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서 자식 교육을 시킨 아버지로서는 큰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서울이란 대도시에서 비싼 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아무리 사교육을 받아도 넘기 힘든 곳이 바로 서울대의 문턱이다. 그 뒤로는 나는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었다. 물론 형이 열심히 공부한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다른 부모님들보다도 힘든 경제적 상황에서 자식 농사를 성공 시켰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아무리 기쁘거나 슬퍼도 감정 표현을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으신다. 우리들 뒤에서 그저 묵묵히 우리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계신다. 그 길이 잘 됐든 잘 못 됐든 일단은 우리가 가는 길을 응원해주신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말리신 적이 없다. 우리의 선택을 존중해주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에겐 늘 딱 한 가지만 부탁을 하셨다. '착하게만 자라라' 라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원하지 않으셨고, 남들보다 앞서 달리는 것도 원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묵묵하게 우리 두 형제를 밀어주었기 때문에 나와 형의 길이 더 수월해진 것 같다./
자랑스러운 우리 형
우리 집은 형제만 둘이다. 그것도 연년생이다. 우리 두 형제는 어렸을 때 엄청 사이가 좋았었다고 한다. 우리 둘이 한 번도 싸우지도 않고 너무도 친하게 지내서 동네 어른들이 어떻게 저렇게 사이가 좋을 수 있냐면서 칭찬을 했을 정도라고 한다. 어릴 적 일이라 기억이 선명하게 나지는 않지만 나는 형과 싸운 기억은 없는 것 같다. 형은 나보다도 훨씬 머리가 좋았다. IQ테스트를 할 때는 엄청 높은 지수가 나와서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고,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에 가서도 전교 1등의 자리를 결코 놓친 적이 없다. 그에 비하면 나는 초등학교 때는 반에서 1등을 했지만,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는 반에서 5~6등 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상위권에 들어가고 싶은 욕심은 있었지만, 늘 노력해도 그 정도의 결과를 얻어냈던 것 같다. 공부하는 양을 비교하더라도 내가 우리 형에 비해 월등히 많았는데도, 형이 나보다 훨씬 결과가 좋았던 걸 보면서, 우리 형은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곧 그 결과는 서울대의 합격으로 드러났고 말이다.
나이가 먹고 우리 둘 다 커가면서 우리 사이는 예전만큼 가까워 지지 않았다. 형은 친구들과 노는 걸 좋아했고, 아빠의 성격을 닮아서 친구들과 같이 노는 걸 좋아했다. 커갈수록 형은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 나와,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적어진 것 같다. 형은 늘 집안의 장남처럼 듬직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동생인 내가 가지지 못할 진지함과 성숙함을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어느 한 수업시간에 자신의 유서를 써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 유서를 친구들 앞에서 낭독하는 것이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술술 써 내려갔다. 내 차례가 왔고 나는 내가 쓴 유서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 읽기 시작할 때부터 나의 음색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가족 얘기가 나올 때부터는 더 이상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형에게 쓴 부분을 읽을 때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자리에 서서 계속 울었고,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형한테는 이런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형, 그거 기억나. 형은 나보다 훨씬 공부도 잘하고 뭐든지 잘했잖아. 특히 나는 수학을 어려워했었는데 같은 방에서 공부 할 때면, 내가 모르는 문제를 형이 항상 잘 이해되도록 설명해줬지. 난 정말 형 같이 똑똑하고 좋은 형을 두어서 항상 자랑스러웠어.' 형이 집안의 장남으로서 공부와 노력을 게을리 하고, 삐뚤어진 길을 갔더라면 나도 그 길로 빠졌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늘 형처럼 공부를 잘하길 바랬고, 형을 보면서 많은 자극을 받아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다. 형은 나에게 좋은 모델이 되어줬던 것이다. 아버지를 닮아 육식을 좋아하고, 묵묵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운동을 좋아해서 나와는 취향 차이가 많이 나서 많이 가까워지는 것은 힘들지만, 언제나 사랑하는 형이다./
자서전을 쓴다고 시작하니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나의 가족들이었다. 내가 자라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나의 가족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늘 그들에게 내가 멋진 인생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2007년 10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