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지라도 달이 아름다운 밤

2013.03.25

왜 항상 밤이 되면 생각이 많아지는 걸까
밤이 되면 새로운 다짐들이 떠오르고, 잊고 있었던 옛 일들이 떠오르고, 가족들이 보고 싶고, 친구들이 보고 싶고, 책을 읽고 싶고, 영화를 보고 싶고, 옛 사진들을 들춰보게 되고, 글이 쓰고 싶어지고, 심지어 무언가를 먹고 싶어진다. 밤에 몰려오는 생각과 욕구들이 하루 중에 균등하게 찾아오면 좋을 텐데. 그렇다면 적절히 욕구를 분출해내어 더 생산적인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밤에는 잠을 자야만 또 내일 하루를 맑은 정신으로 보낼 수 있다. 그야말로 정말 맑은 정신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밤새 날뛰던 여러가지 생각들은 잠잠 해지고, 눈을 감으면 손에 잡힐 것 같은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도 희미해지고, 어떤 새로운 다짐들도 힘을 잃고 사그라든다. 그래서 아침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하루를 우리 인생으로 본다면
우리는 우리 인생의 느즈막한 때를 황혼이라고 부르지 않나. 저녁 노을로 물들어 가는 이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때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생 중 가장 아름다운 때도 그 즈음이지 않을까 싶다. 하루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공기의 고요함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여유로이 즐기는 때. 그리고는 다시 우리의 정신활동이 활발해지지 않을까. 새로운 생각도 많이 들게 되고, 인생에서 만나온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워 하며, 반성과 새로운 다짐을 반복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평생을 산다는 것은 하루라는 일생을 평생 산다는 것이다. 새벽-아침-오전-정오-오후-저녁-밤-다시 새벽에 까지 이르는 시간들을 평생 살지만, 그 평생은 평생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평생은 오늘 하루에 다름없다고도 할 수 있는데...

하루를  되돌아보며 후회하는 일들이 있다면,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서도 후회하는 일이 있겠지
오늘은 누구를 만났으면 좋았을걸. 그 사람에게 그렇게 심하게 말하지 말걸. 가족들에게 전화를 할 걸.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할 걸. 영화를 볼 걸. 이런 생각들이 하루를 마감하면서 들게 된다. 오늘은 다행인 일이 한가지 있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의 특성상 대외기관과 협력해야 할 일이 많은데, 그러다보니 하루 종일 몇번이고 협력기관의 담당자와 통화를 하고 이메일을 주고 받는다. 오늘은 아침에 출근하니 그 담당자로부터 매우 기분이 좋지 않은 메일을 와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심각할 일도 아니었는데, 그동안에 쌓이고 쌓인 게 많다 보니 난 기분이 상했고, 회신 메일에 나의 안좋은 감정을 모두 드러냈다. 그러면서 지우고 다시쓰고 반복하기를 몇 십번. 그 담당자와 앞으로도 몇 번이고 일을 함께 해야하기 때문에 이번에 세게 나가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기분 상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메일을 공격적인 멘트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결국은 '발송'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그 메일을 인쇄해서 옆의 동료에게 보여줬다. 이런 저런 일이 있어서 이런 메일을 보내려고 하는데, 이런 메일을 받으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다. 동료는 보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아차' 싶었다. 나는 나의 이런 공격적인 메일을 써내려가면서 이런 메일을 쓰고 있는 나의 행동을 합리화 했고, 이런 정도의 메일을 쓰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결국 그 메일은 보내지 않았고, 전화를 걸어 좋은 목소리로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전화를 하고나니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리고 그 메일을 보내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싶었다. 옆에 그 동료가 없었더라면 메일은 발송됐을 것이고 그 사람과 나의 사이는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게 오늘 정말 잘한 일이다. 나 스스로 감정을 잘 컨트롤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상황'이 나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것이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내가 해군 병장 시절 생활반장을 맡고 있던 때였다. 생활반의 한 수병이 취침시간이 지난 뒤 생활관의 규칙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 생활반 전체가 기합을 받는 일이 있었다. 전체에게 피해를 끼친 그 수병 때문에 정말 화가 치밀어 올라서 어떻게 그 수병을 혼낼지 생각했다.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정말 그 수병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되는지 고민했다. 나는 그 수병을 조용히 불렀다. 그 수병은 경직된 얼굴로 떨고 있었다. 자기가 크게 잘못을 했던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최대한 화를 가라앉히고 그 친구를 조용히 타이르면서 얘기했다. 오늘은 너의 잘못 때문에 다른 생활반 친구들이 밤 중에 고생을 했으니까, 다른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다음부터는 그런 실수 없도록 해달라고. 그리고는 웃으면서 조용하게 넘어갔다. 사실 그 순간 나의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 때문에 그런지 나와 그 수병은 그 이후로 정말 친하게 지냈고, 전역을 하고나서도 가끔 연락하는 좋은 사이로 지내고 있다.

인생의 시간이 흐르고 난다면
인생의 시간이 흐르고 난다면 그런 일들이 많이 떠오르지 않을까. 내가 잘못했던 일보다는 (지우고 싶은 기억들 보다는) 상황을 이겨내고 스스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할만한 일들이 떠오르지 않을까. 그런 것들 말이다. 정말 크게 잘못해서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엄청 크게 혼날 걸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뜻밖으로 따뜻하게 타일러 주시던 그 때 그런 기억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부모님과 선생님들도 엄청나게 자신의 내면과 싸우고 계셨을 것이다.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서 화가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니 말이다. 나도 조금 더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감정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 많은 (내면의)것을 분출해내며 즐겁게 살아간다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에 놓인 인간들에게 반드시 좋은 살이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이성으로서 제어하며)  너무 억누르지 않으며, 너무 분출해내지 않으며 그렇게 어렵게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쉬운것은 재미없다)

결국에 누가 옳았는지는 판단할 수 없다.
육십억개의 인생을 놓고 보았을 때(없어져간 영혼들까지 포함하면 수백억) 결국에 누가 옳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옳은 것 같다는 느낌과 그른 것 같다는 느낌만 있어 그 느낌에 기대어 역사를 써내려가지만 그 판단 또한 중립이 아니고서는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우주에 깔려있는 수많은 별들의 존재를 두고 (혹은 그 별의 탄생과 소멸의 역사를 두고) 그 존재가 (혹은 역사가) 옳다 그르다를 말할 수 없듯이 말이다. 태양은 지구에게는 따듯한 햇살과 지구 만물에게 에너지를 전달해주는 고마운 존재이지만, 화성에게는 너무 가까워서 모든 걸 타들어가게 만드는 별이고, 또 다른 행성들에겐 그 열과 빛이 너무 적게 전달되어서 있음에 못미치는 별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냥 있게 된 존재들끼리 (존재하게된 있음들끼리) 어울어져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이 누가 되었든 하나님이 창조했든 원숭이에서 진화를 했든, 우리들이 사랑의 결실이든 하룻밤의 실수든, 결과적으로는 존재하게 되었고, 존재들끼리 어울리며 존재하는 것이다. (즐겁게 혹은 괴롭게. 하지만 이왕이면 즐겁게)

오늘도 일을 마치고 학교에 들러 후배와 밥을 먹고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렸다.
후배가 얘기했다.
하늘에 달 좀 봐, 너무 이뻐. 뭐가 이쁘냐. 맨날 같은 달인데. 정말? 어떻게 저렇게 예쁜 달을 보고서 감흥이 없을 수 있지? 감성이 너무 메마른거 아냐? 봐봐 정말 이뻐. 요새 달이 참 좋은가봐. 
단언컨대 달이 좋았다기 보다는 그 후배의 마음이 좋았던 거다. 왜냐하면 그 후배는 나와 밥을 먹는 내내 자기가 요새 어떤 학문에 빠져있는지, 그 학문이 얼마나 재밌는지, 요즘 엑셀 작업에서 이런이런 부분에서 막히고 있는데 내가 해결방법을 알고 있는지, 내일은 외국에서 오신 교수님이 특강을 하는데 교수님으로부터 일찍 와서 도와주면 좋겠다는 요청을 받아서 얼마나 기분 좋은지, 계속 떠들었기 때문이다. 오늘 그 후배에게는 달이 좋아보일 수 밖에 없는 날이었다. 분명 오늘 그 달은 누군가에겐 눈물을 머금은 것처럼 슬프게 보였을 수 있다.

아름다운 달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 하자.
결과적으로는 오늘 하고 싶었던 얘기를 모두 글로 풀어내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귀가하는 길에 든 생각들, 집에 들어와 밀린 설거지를 하면서 든 생각들, 샤워를 하고 컴퓨터 전원을 켜기 전까지 들었던 생각들이 3분의2 정도는 이 글에 담긴 것 같다. (지금 이 순간까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는 생각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글의 끄트머리에서 후배의 달 이야기를 쓰다보니까 갑자기 달이 보고 싶어졌다. 오늘 정말 달이 그렇게 예뻤을까. (객관적으로) 아까는 내가 안경을 끼지 않고 봐서 별 감흥이 없었던 것 아닐까. 글을 닫는대로 밖에 나가 다시 한 번 잘 봐야겠다. 밖에 나가서 그 달을 봤을 때 달이 '내 눈에도' 아름답다면, 오늘 하루와 오늘 이 글의 제목은 '달이 아름다운 밤'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