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문맹 극복하기, 알리 아사니

종교 문맹 극복하기, 알리 아사니


종교 문맹의 공통 증상 하나는 종교라고 하면 흔히 제례, 의례, 종교 축제 같은 종교 행위만을 떠올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개인 공동체 국가의 행위를 전적으로 종교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무슬림의 행동 하나하나를 전부 종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슬림이 다수인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조리 종교 탓으로 돌린다. 그러다 보니 무슬림이 다수인 국가를 괴롭히는 불완전한 민주주의, 경제 후진성, 부당한 처우, 여성 비하 같은 다양한 해악의 주요 원인으로 이슬람을 꼽는 사람이 흔하다. 많은 무슬림이 보기에, 이런 해석은 기독교가 주요 종교인 미국의 범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인 이유는 기독교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 없다.

종교를 이해한 학생이라면 종교 해석은 모두 기본적으로 인간이 한 일임을 알게 된다. 신앙인이라면 특정한 종교 진리를 신성한 계시로 여길 수 있는데, 그들이 그 진리를 토대로 쌓아 올리는 의미들은 그들이 처한 세속의 환경과 현실에 크게 좌우되게 마련이다.

종교 문맹과 문화 문맹을 방치한 민족과 국가는 결국 그들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를, 다시 말해 그들의 인간성을 상실하고 만다. 종교와 인종이 다른 집단 사이에서 상대 집단을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아 충돌과 비극이 발생한 예는 역사에 무수히 많다. 특히 정치 충돌과 군사 충돌이 고조된 시기에는 국가 문화 종교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를 인식할 때 종교 문맹과 문화 문맹이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런 충돌은 흔히 과장되고 상반된 이분법과 언어로 묘사되곤 한다. 이를테면 문명인과 야만인, 선과 악, '우리'와 '그들'등이다. 이 같은 이분법은 서양문명과 이슬람 문명 사이의 차이를 논의하는 오늘날의 토론에서 특히 자주 등장한다. 이런 식의 묘사는 많은 사람에게 먹힐지언정 여러 관저에서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서양 문명과 이슬람 문명을 적대적이고 상반되는 용어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옳지 않다. 종교 사상이나 개념에서 두 문명의 뿌리는 그리스 로마 문화뿐 아니라 아브라함 전통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이분법은 '타인'을 모욕적이고 틀에 박힌 모습으로 그리는 탓에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종교의 세 가지 접근법 : 신앙 접근법, 문서 접근법, 상황 접근법

종교의 표현과 해석을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비신학적 요소와 관련 짓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하는 것은 상황 접근법의 핵심 원칙이다. 해석의 문맥에 주목할 것을 강조하는 이 세 번째 접근법을 이용한다면, 같은 종교 전통도 그것을 묘사하고 실천하는 방식이 상반도리 수 있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코란이나 성경 같은 종교 문서도 신자들이 그들만의 다양한 목적을 정당화할 요량으로 임의로 해석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목적은 포용과 배제, 자유와 억압, 민주 정치와 신권 정치 등 서로 상반되기도 한다. 상황 접근법은 학생들에게 종교를 비판적으로 고민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효과적인 틀이다. 이 연구법은 종교 연구란 일상에서 종교를 실천하고 해석하면서 종교의 영향을 받고 사는 인간과 관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20세기의 영향력 있는 종교학자이자 하버드 대학교에서 여러 해 동안 비교종교학 교수를 지낸 고 Wilfred Cantwell Smith는 저서 <종교의 의미와 목적>에서 우리는 흔히 종교를 각 종교 고유의 믿음과 실천 체계를 갖춘, 늘 동일하고 의미가 명확하고 조직화된 관념으로 인식한다며, 이런 인식은 유럽 계몽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슬람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종 민족 문화가 다른 여러 사람이 서로 다른 무수한 해석을 내놓는 다양한 이야기다. 이슬람과 그것이 무슬림 사회에 미친 영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중요한 질문부터 던져야 한다. 어떤 이슬람인가? 누구의 이슬람인가? 어떤 상황에서의 이슬람인가? 무슬림 중에서도 특정 교파 (수니파, 시아파 등)에 한정된 이슬람만 아는 다수의 무슬림은 같은 무슬림이면서 자기와 다르게 신앙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볼 때면 깜짝 놀라곤 한다. 어떤 이는 이 다양성에 위협을 느껴, 진정한 이슬람은 하나뿐이라고, 자기가 믿는 이슬람 하나뿐이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또 어떤 이는 다양성은 인정하되 모든 무슬림이 특정한 기본 믿음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의 다양성을 공동체의 힘과 신의 자비를 드러내는 표시로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도 있다.

Cantwell Smith 교수는 이 변화를 구체화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개인의 신앙, 경험, 종교 행위 같은 유동적 개념이 차음 '종교'로 추상화하고 일반화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이다. 가령 예수의 제자들이 이 점진적 과정으로 기독교인 고유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면서, 스스로를 유대인과 점점 차별화하기 시작했던 일을 떠올려보라. 이슬람도 이와 비슷해서,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자기들만의 차별화된 사회, 정치 공동체를 만들 필요성에서 구체화 과정을 이용했다. (Wensinck (1932), 2007) 이들의 정체성은 지도자 무함마드를 향한 충성심으로 결속한 초대형 부족에서, 자기들만의 종교 집단으로, 스스로를 '무슬림'이라 부르는 집단으로 바뀌어갔다.

무슬림 사회는 전 세계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종교를 수많은 다른 요소와 연관 지어 해석하려고 고민 중이다. 민족주의, 현대성, 세계화, 산업화, 종교 간 그리고 내부 종교의 다원주의, 문화 간 그리고 문화 내부의 다원주의 등이 모두 고려 대상이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이런 고민을 할 때는 특정한 역사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200년 동안 여러 비무슬림 세력은 무슬림을 직간접적으로 거의 식민화했다. 그들은 식민화 계획의 일환으로, 무슬림 사회를 식민지로 재빨리 바꾸려 했다. 식민 시대가 지난 지금, 무슬림 사회는 다른 나라가 정한 이상과 기준이 아닌 자기만의 진정한 이상과 기준에 따라 정체성을 발견하고 회복하려 애쓰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반동 부류에서 진보 부류까지 다양한 신앙 해석과 해법이 제시되었다. 우리는 대중 매체가 보여주는 모습으로만 이슬람 전통을 해석하는 일반화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이슬람을 '과격하다'거나 '극단적'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원인을 '이슬람'이라는 획일화된 상상의 모습에 돌리지 말고 그런 해석이 나온 상황과 환경을 충분히 살펴야 한다. 오늘날의 이슬람 해석 가운데 상당수는 세계화와 민족주의 같은 힘이 무슬림 사회를 지나치게 왜곡한 결과가 분명하다. 칼 언스트는 종교를 설명할 때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하여 이렇게 말한다. "종교는 결코 진공 상태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항상 특정 장소와 연관되는 다양한 문화, 역사와 얽히게 마련이다. 종교에 관한 과장된 수사를 이해할 때는 반드시 상황을 고려해야 말하는 사람의 목적과 그 반대자를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