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이렇게 살아갈 예정이다. 그대와 나의 기분좋은 영화같은 인생을 주고 받으면서


6월 말, 내가 써 온 글들을 더 잘 관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뒤로부터  약 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내가 결정한 방법은 이 곳, 구글 블로거이다.  9월 18일부터 블로그 이사를 시작해서 3주 동안 1,000여개에 가까운 글을 모두 옮겼다. 이것은 정말 큰 작업이었다.

# 글 위주로 옮겼다. 영화, 책 리뷰 / 사진 / 음악 등에 대한 관리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 2005년부터 2013년에 이르기까지 약 9년의 시간여행을 했다. 나는 정말 수많은 생각을 하고 살아왔다.

#  내가 작성한 글은 모두 2,000여개가 넘었다. 글들을 나름 분류하기 위해서 모든 글에 각각 태그를 달았다. 내가 가장 많이 이야기 했던 부분은 인생의 느낌 (239) 나에게 하는 말 (209) 관계 (118) 청년의 다짐 (116) 그대에게 하는 말 (107) 그대가 말했다 (102) 그대는 감동 (74) 일본인연 (72) 책이 말하길 (72)...  이다. 많은 걸 느끼며 살아왔고, 그리고 내 자신과 그리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항상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나는 그런 인생을 좋아했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갈 예정이다. 그대와 나의 기분좋은 영화같은 인생을 주고 받으면서

# 앞으로도 열심히 쓰고 쓸 것이다

네이버 블로그 유지에 대한 고민

예전엔 블로그에 자주 들러 글을 쓰던 것이, 최근엔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 이유

가장 큰 이유는 물론 게으름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예전엔 글 쓸 단서를 잡으면 어떤 식으로든 문장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요새는 그러질 못하고 있는데, 그건 게으름으로 모두 설명된다.

그 밖의 다른 변명을 더 대보자면

1. 트위터를 다시 하면서 
   - 순간 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트위터에 잠깐씩 기록한다. 그러다보니 정말에 단순하며 생각의 확장에 이르지 못하는 문장들을 올리고 있다. 트위터에 별 내용이 있느냐. 그건 또 아니다. 그저 느낌들을 기록하고 있다. 어떻게든 '기록'을 남기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항상 어딘가에 적고 있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지 않는 것이 나의 일상을 기록하지 않음은 아니다. 군대에 들어가 훈련병이 되었을 때도 노트와 펜을 받자마자 훈련병의 일상을 기록했다. (일상을 어느정도 깊이로 기록하느냐는 물론 차이가 있다.) 지금은 트위터며, 구글플러스며, 페이스북이며, 내 PC의 파일들, 또는 클라우드 상의 파일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다만 블로그에 기록할 만한 '일'이 없는 것. 어쩌면 공개할만한 기록이 없는 것. 비밀글은 많이 작성하고 있다.

2. 블로그 정체성에 대한 고민
  - 내 블로그는 '나'를 그려왔다. 2005년 무렵 고등학교 때부터 블로그를 시작했으니 벌써 9년이 채워져 간다. 그래서 주위 친구들에게 내 블로그만 잘 읽어보면 나라는 사람을 100% 알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곤 했다. 심지어 내 가족 내 친구들 내 지인들의 관계도 모두 알 수 있다. 그만큼 내 블로그는 나와 이미 동일시되어 있다. 내가 보이고 싶은 모습만을 기록하는 나의 페르소나로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보니 블로그의 정체성은 나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처음엔 내가 좋아하는 취미들, 이를테면 영화, 음악, 책, 사진 등을 모아놓는 저장소로서의 역할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다보니 대학생활의 모든 경험과 생각들, 나의 역사들이 고스란이 남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나의 개인적인 역사를 이곳에 쌓아가고 있는 것이 좋은 걸까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사실 서로가 살아온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나도 좀 더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생산하면 좋을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는 중.

3. 네이버 블로그 유지해야 하나
  - 네이버의 서비스가 폐쇄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는 바였지만, 최근 지인과의 대화를 통해 새삼스레 폐쇄성을 느끼게 되었다. 내 블로그에 방문하는 사용자의 대부분은 네이버 검색을 통해 들어온다. 그만큼 국내시장에서는 네이버가 검색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과, 네이버가 자사의 서비스를 우선적으로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한 네이버 블로그에 나는 9년간 데이터를 축적해 왔다. 그리고 나에게 큰 변화가 있지 않은 이상, 나는 네이버에 계속 내 데이터를 축적할 것이고 그 기간이 길어질 수록 이곳으로부터 빠져나가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일단은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모든 데이터를 백업해 놓기 위해 관련 서비스를 검색해봤더니, 그 방법은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고 너무도 불편하며 파일 포맷도 PDF만으로  제공하더라. 순간, 위기 의식을 느꼈다. 발을 쉽게 못 빼버리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선택지는 1)정말 오랜시간을 걸려 자체적인 백업방법으로 백업을 할 것이냐 2)네이버 블로그를 그냥 끝까지 이용할 것이냐 3)네이버 블로그를 폐쇄할 것이냐 등이다. 1번은 그 동안 올린 데이터(글과 사진과 영상)가 너무 방대해서 매우 힘든 작업이 될 것이고, 2번은 솔직히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활용한 이후로 모든 검색은 구글을 이용하고, SNS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기타 등을 이용하고 있는데 폐쇄적인 네이버는 그런 것들간의 동기화 혹은 호환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조금 더 네이버에 대한 느낌을 말하자면, 광고액에 따라 우선적으로 광고를 노출시키는 네이버 검색이야 진작에 사용하기를 포기했고, 메인화면에 둥둥 떠다니는 신문 모양의 언론사 링크는 클릭할 동인이 없고, 그마저도 뉴스 기사를 읽으면 표현의 자유가 난무하는 댓글들에 다시 고개를 돌려버린다. 잘 쓰고 있는 것도 있다. 네이버 사전과 지도! 특히 네이버사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네이버랜드에 내 역사를 쌓아가는 일을 재고하고 있는 중이다.

각각에 대한 결론
1. 트위터에 짧은 단상을 적더라도  그 생각을 확장하여 글을 쓰는 연습을 하자.
2. 세상에 의미있는 정보를 줄 수 있는 분야를 정하자. (무엇보다 나의 관심사와 연결이 될 수 있는 글)
3. 당분간은 현상 유지를 하는 동시에 네이버를 탈출하여 둥지를 틀 수 있는 새로운 스페이스를 모색해보자.


종교 문맹 극복하기, 알리 아사니

종교 문맹 극복하기, 알리 아사니


종교 문맹의 공통 증상 하나는 종교라고 하면 흔히 제례, 의례, 종교 축제 같은 종교 행위만을 떠올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개인 공동체 국가의 행위를 전적으로 종교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무슬림의 행동 하나하나를 전부 종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슬림이 다수인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조리 종교 탓으로 돌린다. 그러다 보니 무슬림이 다수인 국가를 괴롭히는 불완전한 민주주의, 경제 후진성, 부당한 처우, 여성 비하 같은 다양한 해악의 주요 원인으로 이슬람을 꼽는 사람이 흔하다. 많은 무슬림이 보기에, 이런 해석은 기독교가 주요 종교인 미국의 범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인 이유는 기독교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 없다.

종교를 이해한 학생이라면 종교 해석은 모두 기본적으로 인간이 한 일임을 알게 된다. 신앙인이라면 특정한 종교 진리를 신성한 계시로 여길 수 있는데, 그들이 그 진리를 토대로 쌓아 올리는 의미들은 그들이 처한 세속의 환경과 현실에 크게 좌우되게 마련이다.

종교 문맹과 문화 문맹을 방치한 민족과 국가는 결국 그들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를, 다시 말해 그들의 인간성을 상실하고 만다. 종교와 인종이 다른 집단 사이에서 상대 집단을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아 충돌과 비극이 발생한 예는 역사에 무수히 많다. 특히 정치 충돌과 군사 충돌이 고조된 시기에는 국가 문화 종교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를 인식할 때 종교 문맹과 문화 문맹이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런 충돌은 흔히 과장되고 상반된 이분법과 언어로 묘사되곤 한다. 이를테면 문명인과 야만인, 선과 악, '우리'와 '그들'등이다. 이 같은 이분법은 서양문명과 이슬람 문명 사이의 차이를 논의하는 오늘날의 토론에서 특히 자주 등장한다. 이런 식의 묘사는 많은 사람에게 먹힐지언정 여러 관저에서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서양 문명과 이슬람 문명을 적대적이고 상반되는 용어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옳지 않다. 종교 사상이나 개념에서 두 문명의 뿌리는 그리스 로마 문화뿐 아니라 아브라함 전통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이분법은 '타인'을 모욕적이고 틀에 박힌 모습으로 그리는 탓에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종교의 세 가지 접근법 : 신앙 접근법, 문서 접근법, 상황 접근법

종교의 표현과 해석을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비신학적 요소와 관련 짓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하는 것은 상황 접근법의 핵심 원칙이다. 해석의 문맥에 주목할 것을 강조하는 이 세 번째 접근법을 이용한다면, 같은 종교 전통도 그것을 묘사하고 실천하는 방식이 상반도리 수 있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코란이나 성경 같은 종교 문서도 신자들이 그들만의 다양한 목적을 정당화할 요량으로 임의로 해석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목적은 포용과 배제, 자유와 억압, 민주 정치와 신권 정치 등 서로 상반되기도 한다. 상황 접근법은 학생들에게 종교를 비판적으로 고민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효과적인 틀이다. 이 연구법은 종교 연구란 일상에서 종교를 실천하고 해석하면서 종교의 영향을 받고 사는 인간과 관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20세기의 영향력 있는 종교학자이자 하버드 대학교에서 여러 해 동안 비교종교학 교수를 지낸 고 Wilfred Cantwell Smith는 저서 <종교의 의미와 목적>에서 우리는 흔히 종교를 각 종교 고유의 믿음과 실천 체계를 갖춘, 늘 동일하고 의미가 명확하고 조직화된 관념으로 인식한다며, 이런 인식은 유럽 계몽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슬람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종 민족 문화가 다른 여러 사람이 서로 다른 무수한 해석을 내놓는 다양한 이야기다. 이슬람과 그것이 무슬림 사회에 미친 영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중요한 질문부터 던져야 한다. 어떤 이슬람인가? 누구의 이슬람인가? 어떤 상황에서의 이슬람인가? 무슬림 중에서도 특정 교파 (수니파, 시아파 등)에 한정된 이슬람만 아는 다수의 무슬림은 같은 무슬림이면서 자기와 다르게 신앙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볼 때면 깜짝 놀라곤 한다. 어떤 이는 이 다양성에 위협을 느껴, 진정한 이슬람은 하나뿐이라고, 자기가 믿는 이슬람 하나뿐이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또 어떤 이는 다양성은 인정하되 모든 무슬림이 특정한 기본 믿음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의 다양성을 공동체의 힘과 신의 자비를 드러내는 표시로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도 있다.

Cantwell Smith 교수는 이 변화를 구체화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개인의 신앙, 경험, 종교 행위 같은 유동적 개념이 차음 '종교'로 추상화하고 일반화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이다. 가령 예수의 제자들이 이 점진적 과정으로 기독교인 고유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면서, 스스로를 유대인과 점점 차별화하기 시작했던 일을 떠올려보라. 이슬람도 이와 비슷해서,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자기들만의 차별화된 사회, 정치 공동체를 만들 필요성에서 구체화 과정을 이용했다. (Wensinck (1932), 2007) 이들의 정체성은 지도자 무함마드를 향한 충성심으로 결속한 초대형 부족에서, 자기들만의 종교 집단으로, 스스로를 '무슬림'이라 부르는 집단으로 바뀌어갔다.

무슬림 사회는 전 세계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종교를 수많은 다른 요소와 연관 지어 해석하려고 고민 중이다. 민족주의, 현대성, 세계화, 산업화, 종교 간 그리고 내부 종교의 다원주의, 문화 간 그리고 문화 내부의 다원주의 등이 모두 고려 대상이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이런 고민을 할 때는 특정한 역사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200년 동안 여러 비무슬림 세력은 무슬림을 직간접적으로 거의 식민화했다. 그들은 식민화 계획의 일환으로, 무슬림 사회를 식민지로 재빨리 바꾸려 했다. 식민 시대가 지난 지금, 무슬림 사회는 다른 나라가 정한 이상과 기준이 아닌 자기만의 진정한 이상과 기준에 따라 정체성을 발견하고 회복하려 애쓰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반동 부류에서 진보 부류까지 다양한 신앙 해석과 해법이 제시되었다. 우리는 대중 매체가 보여주는 모습으로만 이슬람 전통을 해석하는 일반화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이슬람을 '과격하다'거나 '극단적'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원인을 '이슬람'이라는 획일화된 상상의 모습에 돌리지 말고 그런 해석이 나온 상황과 환경을 충분히 살펴야 한다. 오늘날의 이슬람 해석 가운데 상당수는 세계화와 민족주의 같은 힘이 무슬림 사회를 지나치게 왜곡한 결과가 분명하다. 칼 언스트는 종교를 설명할 때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하여 이렇게 말한다. "종교는 결코 진공 상태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항상 특정 장소와 연관되는 다양한 문화, 역사와 얽히게 마련이다. 종교에 관한 과장된 수사를 이해할 때는 반드시 상황을 고려해야 말하는 사람의 목적과 그 반대자를 파악할 수 있다."


운명이란게 번번이 내 의지를 조롱하고 희망을 비웃지만 아직 완전히 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나인 : 아홉번의 시간 여행을 보고 느낀점 및 결말

결말에 대한 나의 생각

운명과 의지의 싸움
애초에 선우는 뇌종양을 가지고 죽을 운명이었다.선우는 죽으면서 "내가 곧 향이었다"며 말하고 향을 다 쓰는 순간 자신도 소멸된다.

결말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운명은 피해갈 수 없다'는 거 아닌가. 죽음만큼은 어떻게든 손대지 못하는 영역이다. 마치 영화 데스티네이션처럼 한 순간 죽음을 피하더라도 다시 찾아온다. 방화로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를 살리려 과거로 되돌아가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막지 못했고, 우울증에 빠진 형을 살리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게 하지만 결국 자살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 친구 영훈이가 오히려 향을 찾다가 죽는 편이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더 나았을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말이 참 가슴이 아팠다.)

운명은 정해져있다고 믿는 것과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것(의지)이라고 믿는 것, 이게 참 재미있는 거다.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 결국 '스스로 개척하는 운명'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의 운명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우리가 흔히 운명이라고 말하는 불가항력적인 무언가의 일을 바꾸기 위해 '의지'를 발휘하지만, 그 조차 운명의 범위 내에서 돌아가는 것이라면 '의지'를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그 조차 운명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운명과 의지'에 관하여, 이 가장 멋진 대사가 드라마를 가장 크게 관통한다고 생각한다. "나라면 끝까지 해보겠어. 모두가 행복해질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서. 운명이란게 번번이 내 의지를 조롱하고 희망을 비웃지만 아직 완전히 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자신을 포함한 우주가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 때,누군가는 그것을 운명인냥 받아들이지만 누군가는 더 행복해지기 위해 의지를 발현한다. 끝없이 운명과 싸움을 벌이다가 결국은 마지막에 과거에 갇혀 죽어버린 선우. 19화에서 모든게 해피엔딩으로 가는 것 같았지만, 선우가 죽으면서 그건 결국 불행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즉, 선우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불행을 해결하기 위해 운명을 거스르고 그것을 바꾸려 하지만, 결국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삶이 비극일지라도
선우가 죽으면서 영훈에게 메시지를 전할 때...몇 번의 생을 살아도 계속 친구로 있어줘서 고마웠다1고 말하는 걸 들으면서 정말 가슴이 너무 뜨거웠다. 선우가 몇번이나 운명을 바꾸려고 시도를 하는 과정에서 주변 인물은 변하지 않고 모두 선우의 주위를 맴돈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 어떻게든 만나는 것이다. 함께 운명의 수레바퀴에 타고 있다. 그 끝은 비극이었지만 비극의 삶을 살아가면서 서로를 믿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함께 운명에 저항하며 살아온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삶이었을 듯 싶다. (이런 생각으로 이끌어내지 않으면 결말의 팩트가 너무도 잔인한 비극이라서 그걸 받아들이기에 가슴이 너무 아프다)

삶에 대한 팩트와 판타지
우리의 삶이 해피엔딩으로 바라는 것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깨어나지 못하는 판타지다. 사회는 정의롭기를 바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하지만 판타지는 말그대로 허구이며, 세상은(운명은) 우리가 바라는 판타지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팩트다. 허나 또, 팩트만으로 살아가는 게 우리 인간은 아니다. 우리에겐 자유의지가 있으니 믿고 싶은 건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면 된다. 운명이 우리를 속이고 조롱할지라도 말이다. 인간은 그걸 뛰어넘으려 부단히 노력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이 선우를, 민영이와 형을 그리고 친구 영훈이를 행동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정말 흥미진진하고 전해주는 메시지도 진한 훌륭한 드라마였다.

 그 운명을 선택해준 사람들에게 매번 내 생애마다 한결같이 내 가장 진실한 친구가 되어준 너에게 감사한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는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는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우리가 죽을 때는 세상이 울고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 화이트 엘크

— 긍정 봇 (@Be_positive_bot) 2013년 5월 13일

완전한 글을 쓰겠다며 헛되이 낭비하지 마시오. 지금 가능한 일을 하시오

"완전한 글을 쓰겠다며 헛되이 낭비하지 마시오. 지금 가능한 일을 하시오. 그러면 불완전한 그 일을 통해 무언가를 배울 것이니, 그 배움을 바탕으로 다음 일을 하시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는 것이며, 어느새 완성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이오."

괴테

삶이 편안하면 방심하게 되고, 방심하면 안주하고 방탕해진다.

삶이 편안하면 방심하게 되고, 
방심하면 안주하고 방탕해진다.
편안한 삶에는 성장이 없다.
시련이나 위기는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더욱 옹골찬 인간으로 빚어지게 한다.
도자기는 수천도 고온을 견디고 나서야 예쁜 그릇이 된다.
온실 속 화초보다 온갖 위험 속에 자란 야생초가
더 강인하고 생명력이 질기다.
-권근, ‘주옹설’에서

어느 것에도 모험을 걸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갖지 않고,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The person who risks nothing, does nothing, has nothing, is nothing, and becomes nothing. He may avoid suffering and sorrow, but he simply cannot learn and feel and change and grow and love and live.”
-Leo F. Buscaglia quotes

"어느 것에도 모험을 걸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갖지 않고,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는 고통과 슬픔은 피할 수 있겠지만 배우고, 느끼고, 변화하고, 성장하고, 사랑하는 진정한 삶을 살 수는 없다."

- 레오 버스카글리아

Darkness cannot drive out darkness

Darkness cannot drive out darkness.

only light can do that.

Hate cannot drive out hate.

Only love can do that.

어둠은 결코 어둠을 몰아낼 수 없다. 오직 광명만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미움은 결코 미움을 몰아낼 수 없다. 오직 사랑만이 미움을 몰아낼 수 있다.

 Martin Luther King, Jr.

우리는 성공을 구현한 완벽한 본보기가 돼야 한다.

우리는 성공을 구현한, 완벽한 본보기가 돼야 한다. 
성공이 다가오기 전에 자신이 성공을 내뿜어야 한다. 
태도의 관점에서 먼저 정신적으로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돼야 한다. 

- 얼 나이팅게일 Earl Nightingale

진정한 변화는 결코 쉽게 오지 않으며,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Mind Programming 발췌

나는 기쁨과 평화 균형, 조화로 가득 찬 세상을 상상하고 싶다. 하지만 자연의 성질을 매우 냉담하고 육식성이라 생각할 때는 그러한 상상을 하기가 어렵다. 그럴 때는 자연을 인격화하려 한다는 걸 깨닫고 인간에게 눈을 돌린다. 인간의 끔찍한 행동과 비교하면 사자가 양을 죽이는 행위는 순수하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평화와 균형, 조화를 찾는 진실한 방법은 무엇일까? 영적인 평온함을 얻고 이를 적절히 균형 잡힌 정신과 감성에 융합해 평화와 균형, 조화로 가득 찬 세상을 구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보통 자동차나 수영장, 집 등의 물질적인 부와 육감을 만족시키는 것들 또는 관능적인 욕구에 대한 만족 같은 것들이 구현의 대상이다. 그 반면 영적으로 진지한 사람에게는 평화와 균형, 조화가 우선적인 구현의 대상이며, 그 다음이 건강과 개인적인 행복이다. 이것은 명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이므로 이 주제를 다음과 같은 말로 남겨두자. 개개인은 저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있다. 그리고 개인이 자신의 목적에 따라 욕구를 구현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자신과 주위 세계를 꺠달음으로 이끄는 것이다.
 
마음은 점화장치와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나 자신에게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꿈을 인식하거나 새로운 하루 일과로 곧바로 주의를 집중한다. 마음은 사고와 믿음, 야망, 목표 등의 내면세계를 즉시 전달한다. 이러한 즉각적인 의식의 흐름, 곧 혼잣말은 자신의 기분이나 태도, 선호도, 그 밖의 많은 것을 알려준다. 내면에 있는 초대형 쓰레기통의 내용물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이 의식의 흐름이다.
  
그렇다면 인간성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인간성을 정의하는 일은 왜 이토록 어려운 걸까? 인간성이란 자연에 근거를 두고 인격화하는 공통된 마음의 특성을 동반하는 역동적인 경험이다. 아마도 이 대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목격한 후 마음이 따뜻해지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미소를 짓고, 소름이 돋는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반응이며 인간성의 한 부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 예로 불이 난 집에서 어린아이를 구하려다 부상을 입은 개를 보고 우리는 경탄과 경외심, 사랑을 느낀다. 인간성은 어떤 이야기 속에서 열거할 수 있는 감동 이상의 것이다. 인간성은 정서이며, 원시 욕구에서 비롯된 감정을 초월한다. 감동적인 이야기, 마음을 들뜨게 하는 창조력, 가슴 뛰는 모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솟구치는 열정, 내적 성찰로 이끄는 환희와 경외감 등 이 모든 것이 인간성이다.
 
장대높이 뛰기 장면을 과학적 관점에서 수백번 유심히 보았다고 해서 내가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대높이뛰기를 알기 위해서는 실제로 해보아야 한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조종당하는 걸 원치 않는다면 조종을 막기 위해서 무엇인가 행동을 해야만 한다.
 
우리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더 향상된 주거 환경과 그 밖에도 많은 것을 꿈꾸고, 정말 원하기만 한다면 거의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쳐놓은 장벽에 부딪혀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마음은 절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 최면이나 심리요법은 실효성이 없기 때문에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믿는 사람들, 인간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서구 문화의 영향권 아래 사는 사람들은 인간의 자율성에 대해 좀 더 열린 사고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자율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창조할 수 있으며, 적어도 인생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키고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깨우고 자아를 실천하는 데 뇌의 우반구를 활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잔잔한 호수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상상해보라. 이런 심상화는 뇌의 우반구를 활성화하고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는 내면의 잡음을 멈추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나의 결론은 이렇다. 나는 당신을 믿는다. 덧붙여서 우리 각자가 나 자신은 물론 타인을 믿을 때 근본적인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는 세계의 평화를 약속하는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다.
 
행복한 심장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며 우리는 왜 이것을 원하는가? 내가 깨달은 거 이렇다. 우울한 심장이 면역계나 내분비계, 자율신경계를 최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게 한다면 믿겠는가? 이는 수명이 짧아지고 삶의 질이 낮아진다는 의미다. “인생은 어차피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의 연속이야. 인간은 누구나 결국 죽는다고!”라는 말은 자기충족 예언일 뿐이며, 우울한 심장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TV앞에 앉은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과민한 암시 감응성이라는 의식 상태로 들어간다. 흔히 최면 상태라고 말하는 상태다.

생각 역시 심장의 일관성과 관련이 있다. 슬프고, 악하고, 비열하고, 폭력적인 기억을 지니면, 즉 누군가에게 분노를 품으면 불규칙하고 일관성 없는 심장 패턴이 생긴다. 생각은 감정으로 표현된다. 그릇되고 원하지 않는 생각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부정적인 감정을 중화시키는 일이 왜 그리도 중요한지 잘 알 수 있다. 진짜 미소가 나올 때까지 가짜 미소를 띠어야 한다. 웃음은 뇌를 속여 천연 아편을 더 많이 생성하게 한다.
 
생각은 물질이다. TV프로그램을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광고는 보지 마라. 특히 병을 알리는 광고를 경계하라. 머릿속에 들어가는 내용을 감시하고 내적인 평화와 고요함을 위협하는 생각은 무조건 없애라.

문제는 이를 실천하는 일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세계정세에 항상 귀 기울이고 합리적인 투표자로서 선거에 참여해야 마땅하다. 또한 세계인으로서 자유와 책임을 부여 받는다. 하지만 확신하건대, 우리는 모두 각자의 양심의 명령에 따라 결과에 집착하지 않으며 살 수 있다. 그렇게 살면 견해와 관점이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간의 뇌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을 부정적인 것으로 판단해 회피하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이를 관장하는 뇌 영역은 전두엽(감정제어와 공격적 행동을 제어하는 기관)으로, 사람이 공포를 느낄 때나 공격성을 조절할 때 이 부위가 활발하게 활동한다. 그러나 폭력적인 게임을 오래하면 이 부위가 거의 작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폭력 게임을 하지 않은 사람은 폭력적인 장면에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낸 반면, 폭력게임을 한 사람은 폭력에 둔감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인간은 환경의 소산물이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고 해석한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믿음’이 언어를 습득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대물림된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라.우리가 겪은 많은 일들은 우리가 한 번쯤 상상해본 일일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기대하는 것을 얻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을 창조하게 된다.

증오, 분노, 불신, 부러움, 탐욕, 공포, 질투 등을 모르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지원과 사랑만을 알고, 무시되고 방치되거나 불안전한 느낌을 모른 채 성장한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인내와 끈기로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믿게 된다. 학습 도구를 접하고, 탐구심과 독립심을 키우며, 끈기를 발휘해 성공했을 때 칭찬이라는 보상을 받는다. 아이는 모든 분야에 통달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실제로 성공을 거듭한다. 그 과정에서 자기 능력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삶을 진정으로 바꾸고 싶으면 무엇보다도 자신과 자신의 선택에 책임질 준비부터 해야 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마음을 연구하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향상시키는 일을 해오면서, 변화를 꿈꾸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고 변명만 수없이 늘어놓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여러 가지 도구와 기술을 찾으며 분주할 날들을 보내지만 어떤 방법에도 효과를 볼 만큼의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괜찮아 보이는 방법을 발견할 때마다 그 체계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이유를 찾기 바쁘다. 자신을 향상시키는 방법은 수없이 많지만 우선 변화에 대한 진정한 열망이 있어야 한다.

변화는 저항을 낳는다. 저항은 변화를 피하려는 과정이다. 이것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진정한 변화는 결코 쉽게 오지 않으며,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변하기 위해서는 어려움을 견뎌내겠다는 의지, 내려놓기, 비난과 자기책임에 관한 관점의 전환,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려는 진실한 열망, 자신을 보는 방식에 대한 심각한 수정이 요구된다.

행동을 바꿔라. 그러면 생각이 바뀐다. 생각을 바꿔라. 그러면 행동이 바뀐다. 변화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경험하라. 그러면 변화가 강화된다. 변화의 중심을 자신에서 세상에 대한 봉사로 전환하라. 그런 후에 개인과 사회로부터 최대의 잠재력이 발휘될 것이다.

박장대소는 마음을 속여 인생이 멋지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걸 아는가? 그렇다. 웃으면 뇌의 화학작용이 바뀔 것이다. 단순히 표정만 바꿔도 거의 즉시 슬픈 기분이 누그러진다.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세상 전체를 꿈으로 보는 것 같다. 잠에서 깨어난 후 꿈속의 일을 가지고 정말로 화를 내지 않는 것처럼, 현실 세계에서도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일이 우습게 느껴진다. 용서는 우리가 실제라고 생각하는 모든 세계 또는 물질세계를 초월한다. 모든 일이 그저 일어나지 않았으니 용서할 것도 없다.
 
스승님, 저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인생은 기적입니다.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인간의 의식 또한 기적입니다. 저는 모든 창조물에서 신을 봅니다. 꽃향기에서, 아이의 웃음에서, 연인의 다정함에서, 별들의 반짝임에서 사랑의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세상을 볼 때 저는 그 불가사의함에 놀랍니다. 매일같이 펼쳐지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경외심을 느끼고 숭배합니다. 저는 만물이 선하며 매 순간 적절한 방법으로 각자의 선함을 표현한다는 걸 압니다. 제 형제들이 말하는 것이 환상일 뿐이라는 걸 압니다. 오직 영원의 세계만이 진실이니까요. 저는 결핍, 제약, 어려운 상황 등에 무게를 두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보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니까요. 저는 그저 제가 본 광경을 세상에 주고 싶을 뿐입니다. 살아 있다는 축복에 가슴이 뜁니다.

“세상은 보는 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각자의 관점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 관점에 따라 각자의 일이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관점에 따라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기억은 우리의 자아상과 기대, 전반적인 행복에 근원적인 역할을 하는 매우 강력한 힘이다. 기억은 모든 경험을 연결한다. 이러한 연결, 즉 깊은 마음의 연결 덕분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지속성이 없다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매우 단편적이고 인위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기억은 개인의 정체성, 자신에 대한 기대, 세상을 보는 방식, 믿음, 거주지, 어제와 그저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기한다. 기억이 지워져서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고 상상해보라. 아마 하루하루가 완전히 따로 놀 것이다. 기억은 연속성을 지시해서 우리 삶을 구성한다. 또한 기억은 실제 정보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마음은 모든 사건이 완벽하게 기록되는 빈 서판이 아니다. 실제로 기억할 때마다 기억하는 것이 조금씩 달라진다. 기억이 기대나 공포, 불안, 욕구 등에 의해 왜곡 된다는 증거다. 우리는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들을 마음속에서 실제처럼 그리기도 하는데 이 마음 속 그리기는 사건 전에 일어나기도 하고, 사건 후에 일어나기도 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중요한 사건에 대한 기억은 더 많은 사건에 대한 기억은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대개 감정적으로 얽혀 있어 기억력에 영향을 미친다.

사실 우리는 잊기 위해서 기억한다. 마음은 어느 단계에서 기억을 억제함으로써 행복을 지킨다. 마음은 회상하지 못하게 꽁꽁 싸매놓은 걸 기억해서, 잊힌 기억을 지키는 전략 체계를 발전시킨다. 이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억제된다.

 “당신이 보는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형태는 바뀔지라도 핵심은 그대로 남아 있다. 모든 멋진 광경은 사라진다. 모든 달콤한 말도 색을 바랜다. 하지만 낙담하지 마라. 그 원천은 영원하며, 성정하고, 가지를 치며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기쁨을 선사한다. 왜 눈물을 흘리는가? 당신 안에 원천이 있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원천에서 솟아난다” – 잘랄 아드딘 아르 루미 (이슬람 신비주의자) –

남은 날이 50일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매 순간이 무척 소중하게 다가온다. 매일 솟는 찬란한 태양, 따뜻한 미소, 즐거운 웃음, 간섭하고 통제하려는 사랑이 아닌 순수하게 격려하는 사랑 등등. 또한 자동적으로 우선순위를 매기게 된다. 그날 이후 나는 오랫동안 미뤄놓았던 일을 다시 손에 잡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용기를 주는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매번 시간이 없다고 갖은 핑계를 대며 미뤄왔지만 남은 인생이 50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이 방식이 정말 효과가 있으려면 50일이 정말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남은 날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 대해 많은 것을 새로 배웠다. 생을 마감하기 전에 더 많은 걸 배우리라고 확신한다. 나는 인생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다. 그 믿음은 점점 더 강해지고 내 감사함은 점점 더해간다. 죽음보다 삶을 믿어야 한다. 분명 흥미로운 인생이 펼쳐지며, 작은 일상에도 감사가 넘쳐날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조용히 읊조린다. 이렇게 아침에 정신 상태를 살짝 바꿔놓으면 머릿 속에 있던 ‘제기랄, 침대에서 일어나야해!’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인 기대감으로 바뀌어 그날 하루를 감사하게 된다. 간단히 이 방식을 충실하게 실천하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역경이 찾아왔을 때 아름다움과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어쩌라고? And so what?”
 일어난 일은 알어난다. 우리 책임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기기만일 뿐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경외심에 대한 이야기는 밤새도록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온세상이 경이로웠다. 모든 것이 굉장히 놀라웠다. 이것은 공경심이다. 공경심이 없다면 경외심을 가질 만한게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냉정하고 그릇된 자존심만 남는다. 이는 만물의 이치와 그 기원과 이용방법을 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어떤 것의 이름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믿기 쉽다. 전기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사용하므로 우리는 전기가 무엇인지 이해한다. 빅뱅에 대해 알기 때문에 우주의 창조를 이해한다. 하지만 정말 이해하는 걸까?전기가 거의 모든 사람의 삶의 일부가 됐지만, 과학은 여전히 전기를 완전히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뭘 해야 할지는 알겠는데, 항상 초조해요. 지금까지는 그래요.” 그러면 우리의 말과 생각이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우주가 생겨난다. “당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진실이 될 것이며, 당신이 기대하는 것을 얻을 것이며, 당신이 자신에게 말하는 방식이 자신을 바라보고 발견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언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다. 우리는 자신의 언어를 의식함으로써 지금까지 해오던 부정적 사고의 패턴을 바꿔야 한다.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은 행복하다. 생기가 넘치고 내면이 충만하며, 선순환이 계속돼 연이어 좋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행복과 충만감은 어디서 올까? 인생의 좌절을 맛본 사람이 충만감을 회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개인적인 충족감이 행복을 주고, 자긍심을 높이며, 부와 명성, 평화, 균형감, 조화로 이끌 수 있을까? 적극적으로 기쁨과 행복을 도모하고 시대에 맞는 성공 비결로 자신의 인생을 성장시킬 기회를 잡는다면 가족과 친구, 동료들과의 관계가 향상될 수 있으까?

 1. 진짜 ‘나’ 되기
 지금까지의 당신과는 완전히 다른, 놀랍고 멋진 당신을 보아라. 대부분의 사람은 성장하면서 잘못된 자기 개념을 주입받는다. 어린 시절 우리는 수용되고 싶은 욕구로 종종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포기하곤 한다. 행복은 마음의 상태며, 진정한 행복은 내면에 건설된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구현할 권리를 타고났다. 삶의 풍요로움과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우리에게 분명히 있다. 우리 모두가 기적이며, 우리의 존재 자체가 선물이다. 생각은 기대감을 반영한다. 우리는 무의식에 뿌려진 씨를 열매로 거둔다. 의심은 실패를 낳고, 두려움은 분노를 낳는다.

2. 생각은 물질이다.
생각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기대하는 것을 얻게 된다. 생각이 곧 사람이다. 우리는 경험한 모든 일에 대한 잠재적인 믿음을 실행한다. 자신에게 행복, 충만감, 성공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가? 존재의 모든 단계에서 모든 선은 항상 자신을 위해 나타난다는 것을 진실로 믿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창조한다. 삶의 구심점은 사건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삶의 구심점이다. 자신의 생각과 욕구가 일치했을 때 꿈꾸던 일이 마법처럼 이루어진다.

3. 용서하고 내려놓기
모든 행동은 선택의 결과다. 우리는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수준에서 결정을 내린다. 삶은 모든 측면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일 때,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두려움이란 감정을 만난다. 앞의 반응 행동과 달리, 이 때는 힘을 얻어 모든 자극에 대해 적절하게 반응할 능력이 생긴다. 의식이 하는 최고의 역할은 억제라고 했다. 사실 남 탓을 하는 한 성장하고, 통제하며, 평화와 균형 그리고 조화를 경험하는 능력이 제대로 발휘될 리 없다. 성장의 힘은 용서에 있다. 내려놓으면 자유로워 진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를 얻는다.

4. 나 자신을 사랑하라.

5. 수용하는 힘
 대개 우리는 자신이 저항하는 것을 얻게 된다. 또한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거의 언제나 자신 안에 있는 요소를 반영한다. 자신을 사랑하고 수용했을 때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만난 사람은 모두 스승이다. 각자 무언가 우리에게 교훈을 남긴다. 다른 사람을 마치 자신인 양, 자신의 최고 모습인 양 대하라. 뿌린 대로 거둔다.

 6. 상호의존의 힘
 행복은 존재의 상태다. 행복은 영원이라는 시공간을 초월한 상태에서 맛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바로 현재, 순간순간에 경험하는 것이다. 행복은 조건부가 아닌 무조건적인 신뢰와 사랑을 기반으로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을 경험하게 한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일의 책임이 외부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갈등으로 빚은 불안 상태는 우리 내면 깊은 곳의 두려움을 부추긴다. 이 두려움은 매우 창조적인 힘이 있어 사람들에게 종종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을 상상하게끔 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예상하거나 이미 일어났던 일을 한탄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것이다.
 
7. 지금 당장 실천하라.
 꾸물대지 말고 지금 당장 실천하라. 무언가를 바꾸려면 직접 행동해야 한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자신만이 자신을 바꿀 수 있고, 그러기 위해 행동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일어나서 배운 것을 실천하라. 놀라운 변화가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

학습된 무기력

학습된 무기력 - 위키백과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란 1960년대 Seligman이 동료들과 함께 개를 대상으로 한 고전학습이론을 실험 중, 피할 수 없는 전기쇼트를 받은 개들이 후속 실험에서 셔틀박스 속에서 장애물을 뛰어넘어 쇼크를 피하는 기술을 학습하지 못하는 현상에 명명한 것이다.

Seligman & Maier는 학습된 무기력에 관한 고전적 실험을 두 집단의 개를 사용하여 실시 하였다. Seligman & Maier는 구금장치에 가죽 끈으로 묶여있는 개에게 강한 전기충격을 주었다. A집단에 속해 있는 개들은 환경에 대해 어느 정도 통제를 가할 수 있었다. 즉 A 집단의 개들은 코 근처에 장치된 관자를 밀어냄으로 충격이 시작될 때마다 전기충격을 끌 수 있다. B집단에 있는 개들은 그런 통제력이 없다. B집단의 개들에게는 충격이 도피불가능 하다. 그러나 A집단의 개와 B집단의 개에게 가해진 그 전기충격의 횟수와 시간은 정확히 동일하였다. A집단에 있는 각각의 개에 대해 B집단에서 대응되는 개가 있는데, 즉A집단의 개가 충격을 끌 때마다, B 집단의 개에 대해서도 전기충격이 꺼진다. 이런 배열은 실제의 전기충격이 A,B 집단에 대해 정확히 동일하게 할당됨을 확인해 준다. 상이한 점은 A집단과 B집단의 개들이 충격에 대해 할 수 있는 역할이다.

A집단은 어떤 통제를 할 수 있는 반면에, B 집단은 참을 도리 밖에 없다. 그 후 A,B 집단의 개들은 왕복회피상자에서 표준적인 회피학습과제를 제시받았다. A집단의 개들은 이전에 어떤 전기충격과 같은 실험적 경험이 없는 개들과 마찬가지로 빨리 학습하였다. 초기 시행동안에는 개들은 충격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장애물을 뛰어 넘었으나, 나중 시행에서는 유예된 시간이 끝나기 전에 장애물을 뛰어 넘어서, 전기충격을 완전히 피했다. 그러나 이전의 구금장치에서 도피 불가능한 전기충격을 받았던 B집단의 개들은 매우 상이하게 행동하였다. 시초에는 다른 개들과 마찬가지로 행동하였는데, 미친 듯이 이리저리 뛰거나, 짓거나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B집단의 개들은 곧 훨씬 수동적이 되었다. 그들은 앉아서 낑낑거리거나 충격이 가해지는 것을 단순히 받아들였다. B집단의 개들은 회피하거나 도피하지 않았다. 왕복회피상자에서도 B집단의 개들은 주관적인 것인데도 충격을 피하지 않았다. 이전에 도피 가능한 충격을 경험한 개들은 도피하는 것을 학습하였다. 그러나 이전에 도피불가능한 충격을 받은 개들은 무기력에 빠져서 도피학습을 할 수 없었다.

학습된 무기력이론은 1975년 Seligman에 의해 처음 발표되었다. Seligman(1975)은 학습된 무기력이란 ‘유기체가 자신의 환경을 통제할 수 없게 되면 그 결과로 통제하려는 시도를 포기하는 것을 학습 한다’고 하며 무기력도 학습된다고 주장하였다. Seligman에 의하면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혐오적인 사전에 직면하여 자신의 반응으로 미래의 결과를 통제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 즉 자신의 반응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예측에서 무기력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원래 실험실에서 통제 불가능한 전기충격에 노출된 개가 나타내는 반응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개념이었다. 즉, 우리에 개를 넣고 개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학습하게 되어 반응 없이 전기충격을 받게 되며, 나중에는 전기충격을 피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도 피하려 하지 않는 실험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학습된 무기력에 관한 실험연구는 초기에는 쥐, 고양이, 물고기, 원숭이를 비롯한 동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으나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인간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그 연구 결과는 종을 초월하여 일반화 될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인간에게 적용된 학습된 무기력 실험연구는 Hiroto에 의해 이루어졌다. Hiroto((1974)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도구적 실험과제를 택하고 혐오자극으로 소음을 사용하였다. 도피가능집단은 도구를 누르면 소음이 꺼지는 것을 학습하였고, 이와 짝지어진 결합집단은 동일한 소음을 듣도록 되어있으나 스스로는 어떤 반응으로도 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 또한 통제 집단은 소음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 후 모든 피험자들에게 셔틀상자(finger shuttle box)의 상황에서 반응하게끔 한 결과 도피가능집단과 통제집단의 피험자들 모두 손을 옮기는 반응을 학습하였다. 그러나 결합집단 피험자들은 도피나 회피학습을 수행하지 못했다. 대부분 수동적으로 앉아서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소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통제 불가능한 부정적 사건이 인간의 학습된 무기력을 일으킨다는 연구 결과에 대한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첫째, 많은 이론가들은 학습된 무기력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 많은 경우에는 수행 결핍이 나타나지만 적은 경우는 오히려 수행이 증가됨을 제시하며 통제 가능성으로 인간의 학습된 무기력을 설명하는 학습된 무기력이론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둘째, 통제기대가 학습된 무기력을 충부히 예측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Mikulincer,1944). 통제 불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수행 저하 사이에 연관성이 존재하지만, 이는 특정 상황과 사람에게 제한된다. 또한 인간의 통제기대는 주관적으로 이루어지며 단순한 학습과정을 가진 동물과 다르기 때문에 설명하기 어렵다. 셋째, 학습된 무기력의 결핍 정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인지, 정서적인 요인들이 추가적으로 밝혀졌다. Mikulincer는 반복되는 실패로부터 학습된 무기력이 발생되기까지는 과제가치, 자기초점, 통제에 대한 기대,불안, 회피와 같은 정서가 학습된 무기력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고 제시하였다.

어떤 사건에 대한 원인을 판단하는데 영향을 끼치는 심리학의 인지적 편견

귀인 편견(attributional bias)은 어떤 사건에 대한 원인을 판단하는데 영향을 끼치는 심리학의 인지적 편견 중 하나다. (귀인)

귀인 편견은 보통 행위자/관찰자 차이(actor/observer differences)의 형태를 띈다. 어떤 행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행위자)는 그 것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과(관찰자) 다르게 본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종종 가용성(availability)의 비대칭성에 의해 생긴다. 예를 들어 행위자의 행동은 관찰자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기억하기 쉽기 때문에 이 후에 더 고려대상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인에 대한 판단은 이런 이유들로 왜곡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몇몇 실험에서 실험 대상자는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 중 한 사람쪽만 보거나, 한 사람의 얼굴만 보았다. 실험 대상자가 더 잘 볼 수 있었던 사람에 대해 실험 대상자는 그 대화에서 더 중요하거나 영향력있는 사람으로 인식했다.

가장 잘 알려진 귀인 편향은 아마 근본적 귀인 오류일 것이다.

http://ko.wikipedia.org/wiki/귀인_편견

잦은 실패야말로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You Are Not So Smart

당신의 진정한 자아는 당신이 여태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복잡한 구조물이다. 당신의 행위가 점화 효과의 결과일 때, 그러니까 적응무의식에서 어떻게 행동하라고 보낸 암시의 결과인 경우, 당신은 자신의 기분과 결정과 사고를 해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한다. 머릿속 장막에 가려진 정신이 조언을 건넸음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인간 행동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의식의 통제 아래 이뤄지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개인의 공간을 철저하게 관리하지 않아 혼란과 혼돈이 발을 들이게 놔둔다면 그것들은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당신이 당신의 공간을 더더욱 방치하도록 만들지 모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긍정적인 작용이 삶의 질을 높이도록 해야지, 삶에서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직접 점화 효과를 일으킬 수는 없지만 그래도 스스로 바라는 정신 상태를 만들기 위해 주변 공간을 조성할 수는 있다.
 
이 머릿속에서 정보를 꺼내 저 머릿속으로 넣으려면 의사소통 같은 것을 통해 전달되어야 한다. 표정, 목소리, 몸짓, 지금 읽고 있는 단어들. 이런 투박한 도구들에 의존해야 한다. 감정이 아무리 강하고 생각이 아무리 강력해도 당신의 마음 밖 세상에게는 마음 속 세상만큼 극심하고 강렬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투명성에 대한 환상이다.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 알고, 그러한 생각과 감정이 구멍들을 통해 새어나가 세상에 드러나고 외부에 인식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당신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가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과대평가하며 다른 사람 역시 그들만의 작은 비눗방울 안에 갇혀 자신들의 내부 세계에 대해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현상학은 너무나 강렬해서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는 그 너머를 보기가 쉽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가설은, 당신은 모두가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의 행동과 외모를 평가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 당신은 대부분 배경의 일부로 사라진다는 스포트라이트 효과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효과는 너무 강력해서 마치 상상 속 스포트라이트가 당신의 몸짓, 언어, 표정까지 모두 꿰뚫고 심지어 당신만의 은밀한 세상까지 낱낱이 까발리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사람들 앞에 설 때,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를 할 때, 뇌 안에는 불안이 가득해도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당신의 생각보다는 훨씬 침착해 보일 것이다. 그러니 긴장을 풀고 웃어라. 초대받은 집 식탁에 차려진 음식이 개밥으로밖에 쓸 수 없을 것 같아도 제발 먹지 말라는 당신 뇌의 간절한 경고는 음식을 차려 내온 집주인에게 들리지 않는다.
설명하는 과정이 까다로울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화는 내지마라. 그 사람이 당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이 당신만큼 영리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그러니 긴장을 풀고 차분하게 계속 가라.

지난 30년에 걸친 연구에 따르면,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이 직장 동료보다 능력 있고, 친구보다 도덕적이며, 일반 대중보다 친절하고, 동년배보다 지적이며, 평균적인 사람보다 매력 있고, 지역 사회 사람들보다 편견이 덜하며, 또래보다 젊어 보이고, 자신이 아는 대부분의 사람보다 운전을 더 잘하며, 다른 형제자매들보다 낫고, 평균 수명보다 더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방금 이 문장을 읽으면서 당신은 "아닌데, 난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데"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이 평균적인 사람보다 스스로에게 더 정직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그렇게 영리하지 않다.)
어느 누구도,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이 통계를 구성하는 인구의 일부로서 평균을 산출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당신은 자신이 평균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은 그렇다고 믿는다. 자기 위주 편향 self-serving bias 에서 비롯된 이러한 경향을 기만적 우월감 효과 illusory superiority effect 라고 부른다. 당신은 주변의 모든 이들만큼이나 굉장히 자기중심적이다. 당신의 세상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이기 때문에 당신의 생각과 행동의 대부분은 당신의 개인적 세상을 주관적으로 분석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당신의 하루하루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은 저 멀리서, 혹은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보다 항상 더 의미가 있다. 당신의 능력이나 지위를 평가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게 되면 이러한 자기 본위가 당신을 하나의 숫자, 하나의 평균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당신은 이런 생각을 기분 나쁘게 보고 스스로를 고유한 존재로 바라볼 방법을 찾는다.

실제 난이도와 관계없이 그저 사람들에게 과제가 얼마나 어려울지 미리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자신을 상상 속 평균과 비교해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다.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쳐내기 위해 당신은 먼저 과제가 쉽고 간단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다면 기만적 우월감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대인관계와 사회적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인식할 때, 자기 위주 편향과 기만적 우월감이라는 심리적 장치를 사용한다. 당신은 낯선 사람보다 가까운 친구의 성공과 실패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당신은 버락 오바마나 조니 뎁이 성공한 사람들이란 걸 알지만 그보다는 직장 동료나 동창생,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아 온 친구들을 삶의 표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당신이 아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당신보다 더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고, 당신은 당신이 그들보다 더 인기 있다고 생각한다.

 통제력 착각에 대해 알았다고 해서 삶을 힘들게 만드는 상황을 극복해 나가기 위한 노력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어쨌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아무 결과도 보장받지 못하니까. 다만 어떤 노력을 하든 미래는 대부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혼돈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라. 혼돈을 계획에 끼워 넣어라,. 어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실패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사전에 실패는 없다고 믿는 사람은 절대 실패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예측 가능하고 대처 가능한 일도 있지만 사건이 일어나는 시기가 미래일수록 당신이 사건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은 줄어든다. 당신의 몸에서 멀어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관여할수록 행사 할 수 있는 권력은 줄어든다. 1조 개의 주사위를 10억 번 굴리는 것처럼 게임에 작용하는 요인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무작위적이어서 진정으로 대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름의 모양을 예측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과정 또한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 작은 것들, 중요한 것들을 통제하는 방법을 찾으려 애쓰고 그것들이 쌓여 행복이 되게 하라. 그러나 어쨌든 더 큰 그림에서 보면 당신이 상황을 통제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심리학에선느 진정한 객관성이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기억, 감정, 조건부여를 비롯한 기타 모든 종류의 정신적 표류가 새로운 경험을 얻는 족족 오염시킨다.

자성예언은 현실에 대한 사회적 정의에서 그 힘을 얻는다. 당신의 인생은 대부분 논리적으로 정의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정의된다. 다른 사람들의 인식이 행동으로, 정책으로, 믿음으로 전환되면 인식은 현실이 된다. 인생의 너무나 많은 부분이 행동의 지배를 받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전문가의 경우처럼 사람들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증을 얻기 위해 책을 구매하고 있었다. 크레브스는 수년간 아마존의 구매 성향과 사람들이 소셜네트워크에 모이는 경향을 조사했는데, 그의 조사는 확증 편향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가 예측하는 바를 잘 보여 준다. 당신은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옳다고 믿고 싶기 때문에 그런 믿음을 확증해 주는 정보를 찾고, 그와 반대되는 증거나 의견은 경시한다는 것이다. 반세기에 걸쳐 진행된 연구로 확증 편향은 정신적 장애 가운데 가장 믿을 만한 것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기자는 그 이야기와 반대되는 증거를 무시하는 경향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설을 증명하려는 과학작는 가설과 반대되는 결과가 나올 여지가 거의 없는 실험 환경을 조성하지 않아야 한다. 확증 편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음모론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인류는 정말로 달에 인간을 보냈을까?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2009년 오하이오 신문에서 실시한 한 연구에서는 사람들이 자신과 의견과 일치하는 논문을 읽을 때 36%나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신은 잡지 구독을 늘리고, 책을 읽고, 텔레비전을 몇 시간씩 보면서도 자신의 세계관과 반대되는 것은 절대로 찾아보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세계관에 대해 더욱 확신하게 되고, 그 누구도 당신을 설득할 수 없게 된다. 기억하라. 저 바깥에는 확증 편향에 길든 사람들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광고주에게 시청자를 팔아넘기려는 누군가가 늘 활보하고 있다는 것을.

기업의 홍보대사를 자처하지 말자. 당신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는데 잘못 결정했다고 여기게 되는 결정 후 부조화를 물리쳐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정당한 선택을 했다고 느낌으로써 스스로에게 드는 의문과 불안감을 줄여야 한다. 거기에 유대감, 세부적인 자아상, 그리고 각종 편향. 이 모두가 첨가되어 비로소 거대한 신경 집합체가 만들어진다. 그러니 다음에 당신이 가진 휴대전화나 자동차나 TV가 다른 제품보다 나은 점을 100가지는 말할 태세가 갖춰지더라도 그만 두라. 당신은 지금 타인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칭찬하려는 것뿐이니까.

체화된 인지 오류, 2008년, Lawrence williams와 John Bargh의 실험, 따뜻한 커피 혹은 아이스 커피르 들고 낯선 사람을 만나게 하는 실험. 당신은 밝은 색깔의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 친절하고 호의적인 사람으로, 즉 성격이 '밝은'사람으로 본다. 또 말하는 속도가 느린 사람을 덜 똑똑한 사람으로, 즉 이해가 '느린'사람으로 본다. 당신이 속한 문화권에서 어떤 비유를 사용하든, 일치하는 언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주변 세상에서 받는 느낌을 변화시키게 된다. 촉감 또한 이러한 현상의 강력한 형태로, 사물이 피부에 닿는 느낌은 사물이 마음에 닿는 느낌으로 바뀔 수 있다. 이와 같은 형상을 체화된 인지 Embodied cognition 라고 한다.

어떤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 그러니까 그 사람에 대해 알 만한 기회를 갖지 못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어떤 인물로 탈바꿈시키는 경향이 있다. 턱없이 부족한 경험과 잔뜩 과장된 공상으로부터 추려 낸 원형과 전형에 기대는 것이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늘 사회적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한다. 그리고 상사와 함께 있을 대의 당신은 각기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당신은 친구와 가족, 심지어 상사도 당신처럼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심리학자들은 대부분의 행동이 외부의 힘과 내부의 힘 사이에서 벌어지는 줄다리기의 결과임을 안다. 사람은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고유한 존재이므로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직장에 있을 때의 당신과 집에 있을 때 드러나는 성격이 다르다. 글로 적어놓고 보면 뻔한 소리 같지만 다른 사람을 평가할 대는 주변 상황의 힘을 곧잘 잊어버린다. 그래서 “잭은 모르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걸 불편해 해서 공공장소에서 만날 때는 한적한 곳을 찾는 경향이 있어.” 라고 말하는 대신 “잭은 수줍음이 많아”라고 말한다. 사회라는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는 그게 지름길이다. 당신의 뇌는 지름길을 아주 좋아한다. 주변 상황의 힘을 무시하기란 쉽다. 상황이라는 렌즈를 통해 사람을 보는 것은 사회심리학의 기초 중 하나로,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귀인이론 attribution theory 이라 부른다.

심리학자 해럴드 켈리에 따르면, 당신은 다른 누군가의 행동에 대한 원인을 찾을 때 일관성을 고려한다. 친구 하나가 당신이 아는 사람과 싸움을 벌였다면 먼저 이들의 행동이 과거의 행동과 일관됐는지 따져 본다. 그들이 사소한 의견 차이로 곧잘 싸움을 벌이곤 했다면 성격을 탓하지만, 대체로 차분한 사람들이었다면 싸움의 원인을 상황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이런 편법은 대체로 잘 들어맞는다. 세계가 지금과 같이 발전하기 전에는 매일 만나는 사람들의 일관성을 파악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현대사회에서는 종업원이나 지하철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일관성을 확인할 수 없다. 총기를 난사하는 사람이 과거에도 그런 행동을 했는지, 혹은 도로에서 끼어드는 사람이 항상 그렇게 욕먹을 짓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일관성을 확인할 수 없을 때 당신은 사람들의 행동을 성격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긍정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말하자 남자들은 여배우가 단순히 시키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안면서도 여배우가 자신들에게 정말로 호감을 가진 것처럼 느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그들이 실제로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냐에서 비롯될 뿐 배경과는 상관이 없다고 믿음으로써 근본적 귀인 오류를 범한다. 한 남자가 스트립 쇼를 하는 여자가 정말로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는 것이나 상사가 모든 부하 직원이 자신이 코스타리카에서 낚시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근본적 귀인 오류다.

잔혹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다.

사랑하는 이의 냉담한 태도가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나 극심한 심적 동요를 일으키는 문제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바에 무관심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당신은 근본적 귀인 오류를 범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표를 던질 때 그 사람이 표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회적 가면을 꾸며 냈는지는 무시한 채 그저 호감이 가고 친근해 보인다는 이유만을 내세운다면 역시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표를 던질 때 그 사람이 표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회적 가면을 꾸며 냈는지는 무시한 채 그저 호감이 가고 친근해 보인다는 이유만을 내세운다면 역시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호의를 성적 관심으로 평가한다거나 가난을 게으름의 결과로 평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한 원인을 찾으려고 하면 그 원인은 쉽게 찾아진다. 하지만 상황이 얼마나 강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먼저 고려하는 일은 거의 없다. 당신은 그 사람을 비난하면서, 그 사람의 환경이나 그의 동료들이 미친 영향은 비난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행동이 철저히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허수아비 오류
논쟁에서 지고 있을 때 당신은 종종 이런저런 비겁한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려고 한다. 치사하게 굴려는 건 아니었다 해도 화가 나서 말싸움을 하게 되면 사람 마음이란 것이, 대개 그런식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법이다. 이럴 때 가장 쉽게 사용하게 되는 논리적 오류로 허수아비 오류가 있다. 이 오류를 저지를 확률은 꽤 높은데도 우리가 이 오류를 사용하거나 자신도 모르게 이 오류를 범할 때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일이 자주 있다.
개인적인 문제든 추상적인 문제든, 어떤 논쟁을 시작할 때면 당신은 반박하고 논박하고 부인하기 쉬운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낸다. 혹은 상대가 주장하거나 변호하지도 않은 입장을 혼자 만들어서는 공격한다. 이것이 허수아비 오류다. 당신의 다른 사람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찰나, 그의 주장대로라면 세계가 미쳐 돌아갈 거라는 공상의 시나리오를 쓸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멋지게 허수아비를 세운 것이다. 주장의 부정적인 결과를 찾기는 쉽고, 이를 극복할 방안을 찾기는 어렵다. 한번 돌아보라. 애초에 상대방은 그런 주장은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는 자신의 제안 때문에 수많은 식당들이 줄줄이 폐업하는 일을 바라지 않는다는 입장을 모두에게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정 내에서 쉽게 닭을 키우는 조그만 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방안을 내놓는 대신, 당신이 만들어 낸, 깃털 날리는 최후의 날에 대해 반박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음에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을 때, 자신이나 상대방이 허수아비를 만들지는 않는지 주의하라. 누가 됐든 그 사람은 논리적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며, 설사 논쟁에서 그가 이기더라도 정말로 이긴 것은 아니다.

논쟁이 과열되면 상대방의 이름을 막 부르게 되기도 한다. 그럴 땐 상대방이 대변하는 입장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을 공격하게 된다. 저열하고 무지하다고 평가된 사람의 의견이라면 더 무시하기 쉽다. 그를 향해 편협한 인간이라고, 바보이거나 거지 같은 놈이라고 부르면 속이 시원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옳고 그 사람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당신은 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실수를 저지른다. 말하는 이가 누구인가, 또는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면 바로 인신공격의 오류 ad hominem fallacy를 저지르는 것이다.
흡연자가 식당 내 흡연이 합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이해가 관계된 일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손을 내저으며 의견을 무시해선 안 될 일이다. 그의 말이 타당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가 흡연자라는 사실이 당신의 판단을 뒤흔들도록 놔둬선 안 되는 것이다.

당신은 사람들을 인물됨에 따라 파악하고 그들의 행동에서 일관성을 찾는 경향이 있다. 이는 누구를 믿어도 좋은지 구분하는 데 대체로 유용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누구를 믿어도 좋은지 따지는 일과 그 사람이 말이 진실인지 따져 보는 일은 서로 다른 문제다.
사람을 판단하는 당신의 눈이 아무리 뛰어나도 기억해야 한다. 사실 판단 능력 또한 뛰어나지 않다면 당신의 생각은 망상에 그치고 만다는 것을.

대부분 비정상적인 행동이 그렇듯이 심기증도 모두가 평범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일 뿐이다. 누구나 우울할 때가 있다. 누구나 이따금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울증, 망상증, 강박증 같은 장애는 이처럼 정상적인 성향들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변형된 형태로 과장하고 확대한다. 당신에게도 이러한 심기증 환자처럼 사전에 무의식적으로 변명할 거리를 궁리하는 경향이 있다.
맡은 프로젝트가 너무 방대하고 까다로워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할 때가 있다. 책을 쓰거나 영화를 감독하는 일처럼 전문성을 요하는 일일 수도 있고, 기말고사에서 낙제점을 면해야 한다거나 회사 상사에게 중요한 보고서를 발표해야 하는 등 보다 일상적인 일일 수도 있다. 당연히, 실패할 가능성이 보일 때마다 마음속에는 의심들이 떠다니게 된다. 그러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강해지면 자기불구화self-hanicapping를 통해 감정상태의 진행 방향을 바꾸려 한다. 자기 불구화는 현실과의 타협이라 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해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인식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식까지도 무의식적으로 조작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싶지 않은 척 짐짓 연기를 한다거나 뭔가 불쾌한 것이 사실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이라며 스스로를 설득하는 등의 행위를 선행적 합리화 anticipatory rationalization 라 부른다. 자기 불구화 행동은 실패의 원인을 자신의 능력이 아닌 다른 요인으로 돌리는, 말하자면 미래 현실에 대한 투자다. 이 행동 역시 당신의 자존감을 확고하게 세우기 위한 것이다. 실패의 원인을 늘 내부의 힘이 아닌 외부의 힘 탓으로 돌린다면 과연 누가 당신이 실패했다고 말하겠는가?

인간에게는 미루는 습관이 있다는 점을 믿지 않거나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달리 열심히 일하고 철저하게 시간을 관리할 수 있다는 이상적인 생각을 갖는다면 약점을 극복할 전략을 절대 세우지 못할 것이다. 미루는 습관은 일종의 충동이다. 또한 미루는 습관은 과도한 가치폄하로, 지금의 확실한 것을 저 멀리 언젠가 있을 분명치 않은 것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미루는 습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고에 대한 사고에 능숙해야 한다. 소파에 앉아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있는가 하면 언젠가 다른 생각과 열망의 영향을 받게 될 당신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의 뇌 속에 ‘현재’라는 색깔과 ‘미래’라는 색깔을 모두 가진 팔레트가 있다면 ‘현실’이라는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의 작동은 대부분 무의식의 잠긴 문 너머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이 생각들은 무의식과 의식이 상호작용한 결과물의 일부다. 때때로 심리학자들은 의식을 두뇌와 진화에 맞춰 몇 가지 부분으로 나눈다. 이는 의식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지만 벌레와 물고기 수준의 단순한 뇌에서 지금의 뇌로 진화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여러 부분으로 나눠 바라보는 것은 꽤 유용한 방법이다. 두뇌를 고고학 발굴처럼 최근의 지층 밑에 고대의 유물들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면,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두뇌의 오래된 부분은 주로 두뇌의 아래쪽에 자리한다. 이 부분은 생존과 관련된 부분을 다루거나 숨쉬기나 두 발로 서기처럼 굳이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부분을 조절하는 데 쓰인다. 중뇌는 원시인 시절에 형성되어 감정이나 사회적인 의식을 관장한다. 가장 최근에 진화한 뇌의 상층부는 이성과 계산을 다룬다. 전두엽과 신피질은 의식의 본부라고 해도 좋다. 두뇌의 다른 구조에서 온 제안들을 받아들이고 행동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이성적, 수학적, 합리적 체계적 의식은 느리고 둔하다. 이 부분은 기록하고 도구를 사용한다.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고 본능적인 의식은 빛처럼 빠르다. 사용하던 자동차 기름을 바꿀 대나 새로운 식기세척기를 구입할 때 당신은 작동 원리나 설명서, 용량 등을 결정하지 감정에 기대지 않는다. 반면, 점심을 어디서 먹을지, 어떤 영화를 빌려 볼지를 결정할 때는 순간적인 판단과 수치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에 따른다. 최종 결정은 여전히 의식이 내리지만 의식에 느낌을 전달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의식이다. 삶의 대부분의 일들은 감정적 두뇌가 맡아 고려한다. 이는 사회적인 상황이나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당신의 사고와 행동이 대개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계기에 영향을 받으며, 접근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장소에서 전해지는 의견에 따라 움직인다는 말이다. 우선 의식이 자동적인 부분, 감정적인 부분 그리고 생각을 하는 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고 봐도 좋다. 이를 둘로 줄여 ‘의식적인 당신’과 ‘무의식적인 당신’이 있다고 해보자.

앙투안 베카라와 한나 다마지오 Antoine Bechara and Hanna Damsio가 <사이언스>지에 게재한 연구는 무의식적인 당신을 훌륭하게 드러낸 사례로 종종 거론된다. 당신의 추론 능력은 “서술적 지식보다는 신경계를 이용하는 의식 없는 편향의 움직임을 따른다.”것이 그들의 가설이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문제 해결 과정에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위험과 보상에 대한 판단은 무의식적인 당신이 시작한다. 무의식적인 당신은 대상이 좋은지 나쁜지, 위험한지 안전한지, 의식적인 당신이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기 이전에 알아차린다. 좋은 것은 이득을 주고 나쁜 것을 해를 끼친다. 당신이 무언가 좋다고 판단한다면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는 말이 된다. 비행기를 타고 라스베이거스로 휴가를 떠나겠는가? 펜과 텔러의 마술을 보고 사막에서 도박을 해 볼 수 있다면 비행기 사고로 죽을 가능성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만하기 때문에 당신은 티켓을 끊고 난기류와 부딪쳐 보기로 할 것이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의식 속 칠판에다 적어 가며 계산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물 위로 튀어나온 빙산처럼 칠흑같이 어두운 무의식에서 솟아나온, 감정의 순간적인 떨림과 직감을 통해 도출되는 것이다. 당신네 종족은,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심사숙고보다는 직감으로 결정을 내린 역사가 훨씬 길다. 그러니 이러한 정신적 술수의 영향력이 그렇게나 큰 것이다.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기분이 좋아진다는 점 말고는 별 소득이 없다. 사실 그것은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마음을 흐리게 만들어 앞으로의 행동을 점화시킨다.
프로이트는 건강한 정신은 심리치료사라는 거름 종이를 통해 마음속 불순물을 걸러냄으로써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억압된 두려움과 욕망, 결론 나지 않은 논쟁, 치료받지 못한 상처로 감염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신은 이러한 정신적 파편을 중심으로 병적 공포와 망상을 낳았다. 따라서 정신이라는 곳을 샅샅이 뒤져 창을 열고 신선한 공기와 밝은 빛이 들어가게 만들어야 했다.

화를 운동이나 다른 유사한 활동으로 전환하는 방법은 화가 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거나 흥분 수위를 높일 뿐이므로 화를 식히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훨씬 더 공격적인 행동이 나올 수 있다. 화를 식힌다는 것이 화를 전혀 다스리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시먼은 반응을 잠시 미루어 두거나 편하게 쉬거나 공격성을 가지고는 전혀 할 수 없는 활동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제안한다.
카타르시스는 기분을 좋게 만들지만 그것은 감정적 쳇바퀴에 지나지 않는다.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드는 감정은 그 뒤에도 그 자리에 계속 남는다. 카타르시스로 기분이 좋아진다면 미래에 또다시 카타르시스를 찾게 된다.

당신이 속한 문화의 규범과 당신이 살고 있는 대륙의 법에 진심으로 동조하길 거부하려는 것은 벅찰 뿐만 아니라 실로 헛된 노력일 것이다. 당신은 시대정신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동조가 인생이라는 게임의 한 부분임을 알고 있다. 다른 나라를 여행하며 그 나라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판단한다.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면 그 사람이 하는 대로 행동한다. 대학 강의실에서는 조용히 앉아 필기를 한다. 운동을 하러 가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주변을 둘러보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당신은 다리의 털을 밀고 얼굴의 수염을 깎는다. 냄새를 없애는 스프레이를 뿌린다. 이 모두가 동조하는 행동이다.
심리학자 Noam Shpancer가 자신이 블로그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우리는 언제 동조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가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홈베이스이자 우리의 기본 모드이기 때문이다.” 슈팬서는 당신이 동조하는 이유가 뇌 속에 사회적 수용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동맹이 필요하다는 걸 아는 것이다. 당신은 다양한 출처에서 정보를 받을 수 있을 때 세상을 더 정확하게 그린다. 당신에게 친구가 필요한 이유는 버림받은 사람에게는 값진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되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스마트폰에 설치해야 할 멋진 앱이나 꼭 읽어야 할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 당신은 흔들린다. 동조는 생존매커니즘이다.
당신의 행동이 자기 자신이나 다른 이들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될 때는 주저 말고 기존 질서에 의문을 던져라.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상황에서라도 말이다.

당신은 투표를 하는가?
만약 투표를 하지 않는 다면 그 이유가 어차피 바뀌는 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치인들은 다 똑같이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수백만 표 중에서 나의 한 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그렇다. 이것이 바로 학습된 무기력이다. 매 맞는 여성, 인질, 학대받는 아이, 장기 복역수가 탈출을 거부한다면 이는 노력해도 소용없다고 이미 체념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냐, 하는 마음인 것이다. 나쁜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사람이라 해도 실패할지 모르는 일에 전념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느낀다.
상황이 절대 바뀌지 않으리라 믿는 경우에는 내일이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경우보다 더 강하게 슬픔을 느낀다. 당신에게 닥친 문제가 삶의 특정 요소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당신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면 이번에는 한층 더 우울한 기분에 빠지게 된다.

하루하루를 지날 때마다 운명을 바꾸는 힘들 – 직장, 정부, 중독, 우울함, 돈 – 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당신은 소극적인 저항들로 여기에 맞선다. 전화벨 소리를 바꾸기도 하고 벽지를 새로 바르기도 하고 우표를 수집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당신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으니까. 선택이라는 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무기력의 무게에 짓눌려 쓰러지지 않게 당신을 잡아 준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지난 행동에 연연하지 않고, 실패하더라도 당당할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잦은 실패야말로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죽음이 아니고서야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없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라. 

눈을 감고 가장 좋아하는 곳에 있는 곳을 상상해 보세요

회사에서 음악으로 스트레스를 치유하는 강좌를 들었다. 평소에도 음악이 나의 기분을 어떻게 바꿔주는지 익히 알고 있었는데, 그걸 다시 한번 강단 앞에 선 교수님으로부터 들으니 음악을 더 가까이 곁에 두고 싶어졌다.스위트라테의 '처음 홀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곡도 알게 되었는데,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음악이었는데 듣고 있으니 정말 마음이 편해졌다.

강연자가 말했다. 눈을 감고 가장 좋아하는 곳에 있는 곳을 상상해 보라고. 그리고 그 곳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함께 있다고 생각해보라고. 나의 마음은 캄캄한 영화관에 갔다가, 중학교 때 부터 꿈꾸던 어느 시외 근교의 정원 딸린 집의 바베큐 파티 하는 모습으로 갔다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펼쳐진 곳으로 갔다가.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대목부터는 누굴 먼저 떠올려야 좋을지 몰라서 결국 그 모두를 한꺼번에 생각해내는 바람에 정신없어지고 말았다.

오늘의 강연 주제는 스트레스였는데, 스트레스 자가진단을 해보기도 하였다. 평소에 스트레스를 안받는다고 생각해서 큰 문제없겠거니 생각했지만 의외로 높은 지수가 나와서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 나는 요새 걱정이 많은가 보다.

오늘은 조금 바쁜 하루였다. 회사 건너편의 회사에서는 비를 맞으며 사람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며칠전부터 시작된 시위는 아직까지 이어졌고, 비가 멈추지 않았던 퇴근 길에서도 그 분들은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예전에 살면 살수록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다는 것에 놀란다는 글을 적은적이 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 때의 글은 꽤나 긍정적인 어감의 말이었다. 세상에는 너무도 다양한 삶이 있으니, 나도 하나의 다양함을 이뤄내는 삶을 살아가보자 뭐 그런식의 마음을 가지고 적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오늘은 나의 예전 그 생각이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나의 그 작은 생각이 보호해서는 안될 누구를 보호하고, 보호해야 할 누군가를 보호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먼저 나의 앞길을 살펴야겠다는 생각은 끊임없이 찾아왔다. 발걸음이 무거웠던 퇴근 길이었다.

과거의 나와 미래의 너는 서로의 글을 읽으며 서로의 삶에 영감을 주며 공존한다

회사의 동료들과 맛있게 점심을 먹고 회사 근처를 한 바퀴 돌았다. 봄이 왔다는건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찬바람이 여간 멈추질 않아서 여유로이 산책을 하기보다는 빨리 따뜻한 사무실에 들어가고 싶은 날씨였다. 그런데 진짜 봄이 온거 같다. 회사 옥상에 올라가 바람을 쐬도 더 이상 바람이 차지 않다. 시원하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인턴생활을 한지도 곧 세달이 채워져 간다. 많은 걸 배우며 느끼고 있다. 그래서 아주 좋은 경험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많은 직장인들은 이런 좋은 날씨로부터 위안을 받는 것 같다곧 짧은 봄이 끝나고 무더운 여름이 찾아올테지만 이 짧은 봄은 우리들에게 많은 걸 의미한다.

나에게는/
하고 싶은게 부쩍이나 많아지는 봄이다. 읽고 싶은 책, 보고 싶은 영화, 배우고 싶은 것가고 싶은 곳 등등 마음 속에 위시리스트가 빈틈없이 꽉꽉 채워지고 있다. 실현가능성을 따져본다면 제한된 시간과 비용과 혹은 마음의 용기 때문에 위시리스트를 얼마나 실현시킬 수 있을지는 대단히 미지수지만 위시리스트가 있는 것 자체에 마음이 놓이는 요즘이다.

얼마 전 본 영화 '오블리비언 Oblivion'에서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한,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과거의 기억들이 곧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 더해서 우리가 바라는 것 또한 곧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희망'이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꺼내놓는 게 쿨하지 않고, 현실감각이 떨어지고때론 부끄럽게 보여지는 요즘 세상이지만, 있는 걸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 더 쿨하지 않고 부끄러운 것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희망은 있다는 말이다이건 또 내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고 쓴 '믿음'에 관한 글과도 연결된다. '믿는 사람에겐 존재한다'는 것.

내 블로그에서 내 글들은 끊임없이 '연결'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느낀다. 언젠가 본 영화, 언젠가 읽은 책, 언젠가 만난 사람, 언젠가 강의실에서 배운 내용들은 쉴새없이 끊임없이 연결된다. 예를 들어 이 글이 맞닿아 있는 내 삶의 접점을 말해보자면,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봄을 산책한 일우린 무슨 얘기들을 나눴지이런 날씨 좋은 날 소풍 가고 싶다 - 그러게, 정말 봄이 왔네. 좋다 - 작년에는 일본, 독일,중국 친구들과 어린이대공원을 벚꽃놀이를 갔었지중학교 때 재밌게 봤던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 흐드러지게 흩날리던 벚꽃이 생각나네 - 그 애니메이션의 음악도 좋았는데 - 벚꽃이 아름다웠던 애니메이션은 '초속 5cm'라는 애니도 있었지 - 애니라,, 친구 중엔 그림을 잘 그리는 애가 있는데 - 그 친구는 뭐하며 지내나'

글이 지니는 가치에 대하여
애초에 인간은 소리 언어를 기록하기 위해 문자 언어를 만든다단순한 글자에서 단어로, 문장으로 그리고 글로 발전하게 됨과 동시에 우리 인간은 과거로의 연결통로를 가지게 된다그리고 하나의 생각은 한 사람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글을 통해 공유되게 된다. 말그대로 시공간을 아우르며 우리는 모두 연결된다. 과거의 너와 미래의 나, 과거의 나와 미래의 너는 서로의 글을 읽으며 서로의 삶에 영감을 주며 공존한다. 그러니까 좋은 생각을 많이 하련다. 이글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내가 됐든, 타자가 됐든 결국엔 어느 누군가와 연결된다는 생각을 한다면 좋은 생각만을 담지 않을 수가 없다.

봄꽃 산책으로 가볍게 시작한 문장이, 또 이렇게 하나의 짧은 글이 되었다.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내 머릿 속에 스친) 예전에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으로 연결지어 이 연결을 마무리해보자.

삶은 결과를 위한 끊임없는 추구가 아니라 조각을 이어 만든 퀼트 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삶이 각자의 길을 찾아갈 있도록 도와주며 서로 한땀한땀 꿰매나가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와 사랑과 번영을 확인할 있다. 우리가 엮어나가는 관계들이 아름답고 끝없는 패턴을 이루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 있는 곳과 지금 아는 것들은 , 당신이 직접 혹은 책과 음악, 이메일, 문화 등을 통하여 당신의 속에서 상호작용한 사람과 생각과 경험으로부터 발생한 산물이다. 풍요가 풍요를 불러들이고 있을 누가 많이 받고 누가 많이 주는지 계산할 필요는 없다. 오늘부터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사람과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고 인간관계를 넓혀나가겠다고 결심하라. 어떻게 삶을 살고 싶은가? 당신의 퀼트에 어떠너 사람을 엮어나가고 싶은가? 아마도 일이나 회사나 멋진 신기술 보다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세상을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으로 만들어나가는 몫은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다.<Never eat alone> 키이스 페라지 , 라즈 지음
2011 4 1 도서관 4층에서 http://ksi8084.blog.me/40126458394

책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옮겼을 때도 4월의 봄이었다. 2년 전의 봄. 이렇게 올해의 봄과 2년 전의 봄은 또 연결되는구나.

그리고 또 그로부터 2년 전의 봄
기뻤다. 내가 썼던 글들을 보면서 당시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를 알수있는데 생각들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글들이 예전의 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때 당시 생각을 했다는 자체에 놀라버린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글쓰기에 집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글쓰기는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것은 나라의 일들을 기록하는 역사와도 같다. 이번처럼 예전에 썼던 글들에서 지금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건 대단히 멋진 일이다. 글쓰기의 위력을 실감한다. 내가 쓴글의 가장 수혜자는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란 사실을 알았다. 당분간은 일기를 온라인에 옮기는데 치중하자. 그걸 통해서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고 있다. 너무도 재미있다. 내가 썼던 글을 통해서 '' 찾아가는 느낌이다. 나란 사람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나란 사람은 일정한 범위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지금은 매우 기쁘다. 내가 누군지 알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감이 충전된다. 부드럽게 나가자
그때 당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하는게 아니다.) 나란 존재를 알아가는 것이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때처럼 나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자. 범위는 상상력을 통해 확산될 있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글쓰는 연습을 계속하다보면 어쩌면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세상을 바꿀수 있는 아이디어가 나올지도 모른다
내가 그동안 기표에 너무 얽매여 있었던 같다. 기표는 기의를 모두 표현해낼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머릿속의 생각들(기의)이고, 내게 필요한 것은 그것들을 최대한 모두 끄집어내어서 나에게 허락된 능력을 사용해 표현 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표의 함정에 빠지지 말도록 하자. 나에게 필요한 것은 글씨연습이 아니라 글연습이니까 사람을 사귀는 방법이 필요한 아니라, 진정한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세상의 핵심은 속뜻에 있다는 것을 지금 이순간부터 잊지 않기로 하자. 2009 4 11 '병영일기'  http://seonil.egloos.com/9936322

2년 전, 4년 전 이맘때의 글에서도 '연결'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니, 얼마나 재밌나.지금으로부터 2년 후의 4월에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위와 같은 이야기를 또 한번 하지 않을까.

2013 4 17일 봄날


월요일 저녁의 내 작은 방은 사무치게 좋았다

주말 동안에 엄마가 서울에 다녀가셨다. 엄마는 아들의 집을 구석구석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청소해주셨고, 아들이 좋아하는 밑반찬을 여러가지 해주셨다. 그리고는 신림에서 공부하고 있는 형을 불러서 엄마와 아들 둘이서 맛있는 김치찌개를 함께 먹었다.

나는 수도 없이 가본 인사동, 엄마를 모시고 처음으로 가보았다. 정말 좋아하시더라. 시간이 가는 줄 모르며 이 상점 저 상점 모두 둘러보았다. 붓글씨를 다시 시작하고 싶으시다며 필방에서 붓도 한 자루 사셨다. 엄마는 국민학교를 다닐적에 붓글씨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았었다는 이야기도 하신다.

엄마는 짧은 주말 동안 아들과 함께 시간을 함께 보내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월요일 저녁 퇴근을 하고 집에 가니 집안이 무척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엄마가 내려가시기 전 또 한번 집을 청소해 놓은 것이다. 엄마는 서울은 사람도 많고 차도 많아서 싫다고 하신다. 나도 가끔 서울이 싫을 때가 있긴 하지만, 엄마가 남겨놓고 간 숨결 때문에 따뜻하게 빛났던 월요일 저녁의 내 작은 방은 사무치게 좋았다.

우리 인생은 예상 가능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재밌겠지

대화는 치유의 힘을 지닌다는 걸 깨닫는 하루 였다.많은 일들이 있어서 힘든 하루였지만 후배와 대화를 나눈 후 기분이 나아졌다.얼마나 피곤했으면 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길에 잠이 들어서 거의 신설동 근처 까지 갔다버스에서 자다가 훌쩍 40분이 지난 것이다.

후배와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지금은 시간이 늦었기에 대화의 자세한 내막까지는 쓰지는 못하겠고.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시 정리를 해봐야겠다. 인간은 기록하는 동물이니까. (최근에 인간의 기억력이 기록 때문에 약해지고 있다는 책을 읽었다. 기술의 발달로 기록하는 게 갈수록 편리해짐에 따라 더 이상 기억력을 사용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 착각에 대한 이야기. 무언가를 (없다는 게 알지만) 있다고 믿는 것과, 정말 있다는 것(본인은 그게 착각인지 모르는 것

# 무신론자 유신론자의 넘나들 수 없는 경계, 이 부분에 대해서 난 뇌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다시 말하자면 믿고 안 믿고의 경계. 너는 내가 아니고 나는 네가 아닌 이상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고 체계

# 왜 살아야 하는가. 우린 왜 살지?
살면 살수록 더 많은 짐을 짊어지게 되고 더 많은 고통을 경험하는데 계속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

#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놀이동산과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롤러코스터 2, 바이킹 2, 등등 놀이기구를 타는 시간이 길어야 모두 합쳐 30분도 안되겠지만 그걸 타기 위해 기다리는 10시간 (우리가 현재에 투자하는 길고 긴 시간들. 은퇴 후 세계여행을 위해 평생 돈을 모으기 위해.와 같은 목적처럼
우리는 우리가 타고 싶은 놀이기구를 마음대로 탈 수 있다. (마음대로 진로를 정할 수 있다
우리는 놀이동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대로 퇴장할 수 있다. (인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것이 될 수도 있고, 그 사회(체제, 혹은 빅브라더스에 의해 지배되는 구조)를 벗어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놀이동산은 대개 코스가 정해져있다. 거기가면 '이건 꼭 타야돼, 저건 꼭 타야돼' 등등 필수코스가 있다. (우리 인생에서도 꼭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코스들이 있다. 대학진학, 취업, 결혼, 승진 등등)
정말 스릴넘치는 롤러코스터를 타기 위해 2시간을 기다릴지, 아니면 2시간동안 그보다는 조금 시시한 놀이기구 5개를 탈지, 그건 우리 모두가 선택해야만 하는 것(긴 시간을 투자하여 값진 결과를 이뤄낼지, 아니면 소소한 작은 재미들을 즐기며 살지)
아니면 놀이기구를 타지 않아도 된다. 그냥 혼자 (혹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재밌게 논다. (사회가 정해놓은 필수코스(취업, 결혼 등등)을 반드시 따르지 않아도 된다)

# 주말의 친구와의 즐거운 약속을 기다리며 보내는 일주일
고통스러운 일주일과 기분 좋은 일주일의 경계는?

# 인생에서의 로맨스. 영화같은 로맨스를 하기 위해서는 외모가 필수적인가.

# 누군가가 결혼한다는 것의 의미는

# 성공한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

# 누군가가 죽는다는 의미는. 어차피 평생 다시 보지 않을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죽었을 때. 죽어서 이제 영영 못 보지만, 어차피 살아있어도 안 볼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그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슬퍼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 (죽을 때 슬퍼하는 이유가 누군가를 다시는 영원히 못만나는 것이 그 이유라는 전제 하에서

# 죽은 자에게 예의를 표한다는 것. 생에서 한번도 만난적도 관심을 기울인 적도 없는 친구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 가서 그 할아버지에게 절을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우린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 진정으로 슬픔을 느끼는가. 어디까지나 산 사람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것 뿐인가. 그것도 하나의 사회생활이라고 불리는 따분한 영역인지

# 모든 죽는 사람들에게 예의를 표해야 하는가. 어떤식으로든 우리는 연결되어있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의 삶을 공유한 사람들간에 그런 예의가 필요할까

# 진심으로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 나는 다시는 내 생에 못 볼수도 있는  ISP 외국친구들 중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엄청나게 슬플 것이다.

# 희망을 가지고 사는 건 행복인가 불행인가. 희망이 있다고 믿고 살아가는 것과 없다고 현실을 직시하고 사는 것 뭐가 더 좋은가


# 그리고 마지막 대화

A: 많은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도 전에 안봐도 뻔한 스토리라고 하면서 영화를 평가하잖아.

B: 당연히 사람들은 돈을 지불하고 영화를 보러 가는거니까 뻔하지 않은 새로운 걸 기대하지. 스토리가 예상 가능하다면 재미가 떨어지잖아.

A: 그건 우리 인생도? 우리 인생은 다 예상가능 하잖아.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들처럼 대부분 그걸 바라고 있잖아.

B: 참 미묘하게 어쩔때는 그렇고 이렇고 하네.

A: 예상 가능하면 재미가 떨어지니까 우리 인생은 예상 가능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재밌겠지. 온갖 불확실성을 모두 끌어안는 거야. 물론 그러기 위해선 재밌다는 것이 더 가치서열에서 우위에 있어야함을 전제로 하고 동시에 가치서열에서 우위에 있다는 것이 좋다는 전제가 필요하고 또 좋은게 좋은 거라는 것도 전제를 둬야지

B: 복잡하고 모르겠다.일단은 살아보는 걸로 결정.

A: 나도


실수인지를 아는 유일한 방법은 실수를 해서 "그래 그건 실수였어"라고 깨닫는 방법밖에 없지

“Yes, it’s a mistake. I know it’s a mistake but there are certain things in life where you know it’s a mistake but you don’t really know it’s a mistake because the only way to really know it’s a mistake is to make the mistake and look back and say yup, that was a mistake. So really, the bigger mistake would be to not make the mistake because then you’d go your whole life not really knowing if something’s a mistake or not.”
 —  How I Met Your Mother
 우리는 우리가 할 행동 중 무엇이 실수고 무엇이 실수가 아닌지 안다고 하지만, 그게 실수인지를 아는 유일한 방법은 실수를 해서 "그래 그건 실수였어"라고 깨닫는 방법밖에 없지. 정말 큰 실수는 실수를 하지 않는거야.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것이 실수인지 실수가 아닌지를 모른채로 평생을 살아갈테니까.

기술의 힘을 지니기 위해 우리가 지불한 대가는 소외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을 읽고서
기술의 힘을 지니기 위해 우리가 지불한 대가는 소외다이 비용은 지적 기술에 있어서는 특히 클 수 있다사고의 도구들은 확장되고 그 대가로 우리의 자연스러운 능력들 중 가장 사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즉 이성인식기억감정 등은 마비된다기계식 시계는 이 기기가 가져온 모든 이점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앗아갔다루이스 멈퍼드가 현대적인 시계가 어떻게 “수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사건들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세상에 대해 믿음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왔는지에 대해 묘사했을 때 그는 또한 그 결과시계가 “사람들의 일에서 시간을 고립시켰음을 강조했다.
-> 기술의 발전의 대가로 우리가 포기하고 있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것들, 이성, 인식, 기억, 감정이라고 한다우리는 더이상 가족들과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않으며, 연필로 꾹꾹 눌러쓴 서투른 연애편지를 주고 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메시지를 주고 받고 얼굴을 보고 통화할 수 있어서 더 이상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지도 않는다실제로 친한 후배 두 명이 각각 프랑스와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가있는데, 매일같이 카톡이나 페이스북으로 소식을 접하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만약 6개월안 전혀 연락을 못하고 이야기를 못 나누고 6개월 후에 만난다면 어떨까기술로 인해서 우린 가상 공간에서는 늘 함께 있게 되었지만그 대가로 애틋한 그리움을 잃은 것이다.

언제 먹고일하고자고일어날지를 정하는 데 있어 우리는 우리의 감각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시계에 복종하기 시작했다우리는 더 과학적이 되었지만 더 기계적이 되기도 했다.
-> " 5분만 더 자고 싶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밥 먹을 시간이야." "미안 10분 정도 늦을 것 같아" 정말 우리는 시간과 시계에 복종하며 하루를 살아간다좀 더 크게 보면 시계에 복종하며 평생을 살아간다. 때가 되면 학교에 들어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할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하고, 회사에서 은퇴를 한다. 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라 때가 되서 한다.

맥루한은 소외는 기술 이용에 따른 피할 수 없는 부산물로 이해했다우리가 외부 세계를 더 광범위하게 통제하기 위해 도구를 사용할 때마다 세상과의 관계는 바뀌게 된다통제는 심리적인 거리를 유지할 때만 가능하다어떤 경우 소외는 특정 도구를 가치 있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우리가 집을 짓고 고어텍스 재킷을 바느질하는 이유는 바람과 비추위를 차단하기 위해서다공공하수도를 짓는 것은 위생상 오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다자연은 우리의 적이 아니며 그렇다고 친구도 아니다맥루한이 하고자 했던 말은 새로운 기술더 보편적으로 말해서 진보에 대해 솔직히 평가하자면 우리는 얻은 것뿐 아니라 잃은 것에 대해 민감해져야 한다는 것이다우리는 기술의 영광이 우리의 핵심자아를 마비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내부적인 감시의 눈이 멀도록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 기술(스마트폰과 인터넷)에 경계를 품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예전에 이런 생각을 했었다. 일주일 중 하루는 스마트폰을 집에 놓고 나오는 날로 정하자. 일주일 중 하루는 기계에서 떨어져 지내보자기술에 복종되어 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감시해보자는 생각을 했었지만 스마트폰 구입 이후로 폰은 내 손안을 떠난 적이 한 번도 없다. 습관적으로 아침 뉴스를 보고, 음악을 듣고정보를 찾아보고, 친구에게 말을 걸고, 페이스북을 하염없이 내리면서 친구들의 근황을 살피는 일상적인 나의 모습에 변화를 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지난 20년 동안 이루어진 일련의 심리학 연구는 조용한 시골에서 자연과 가까이 하며 일정 시간을 보낸 후 사람들은 더 높은 집중력과 강력한 기억력그리고 보편적으로 향상된 인식을 보인다는 것을 밝혀냈다이들의 뇌는 고요한 동시에 더욱 예민해진다집중력 회복이론에 따르면 그 이유는 사람들이 외부적인 자극의 폭격을 받고 있지 않을 때 뇌가 실제로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더 이상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래에서 위로의 산만함을 처리하면서 작업 기억을 혹사시키지 않아도 된다.
-> 아침에 집에서 나와 회사에 오는 길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외부 자극에 노출이 될까버스 안을 꽉꽉 채운 사람들과 정류장마다 나오는 광고 방송, 눈만 돌리면 보이는 거리 위의 광고들까지. 그런 외부자극을 차단하기 위해 나는 음악을 들으며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본다. 외부자극을 차단하기 위해 다른 외부자극을 이용하는 것이다도시에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 같다. 정보처리에 과부하가 걸리기 쉬운 환경이지만 쉽사리 마음을 편하게 하지 못하는 곳이다

1950년대 마틴 하이데거는 다가오는 “기술 혁명의 파도는 인간을 꼼짝 못하게 넋을 빼놓고 눈을 멀게 하고 현혹시켜 이 계획적인 생각은 어느새 유일한 사고방식인 양 받아들여지고 실행될 것이라고 관측했다그가 우리 인간성의 정수라고 여긴 ‘깊은 사고는 돌진하는 진보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격동의 기술 발전은 콩코드 역에 도착한 기관차와 마찬가지로 사색과 명상을 통해서만 가능한 잘 정제된 인식과 생각 그리고 감정을 잠식할 것이다하이데거는 “기술의 광란은 모든 곳에서 견고히 자리 잡을 태세로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적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너무도 기계적이어서 가장 인간적인 등장인물은 도리어 기계인 것으로 밝혀진다. 큐브릭의 암울한 예언의 정수는 바로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컴퓨터에 의존하게 되면서 인공지능으로 변해버리는 것은 바로 우리의 지능이라는 것이다.
-> 그래서 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기술과 기계가 지배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인간다움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그 전에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인류의 역사는 인류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걸어온 것 같은데우리는 왜 지금 인간다움의 상실을 얘기하는 걸까. 기술을 퇴보시키면 우리의 인간다움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인간다움을 잃은 99명의 사람과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1명의 사람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과연 누가 '인간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