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Not So Smart
당신의 진정한 자아는 당신이 여태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복잡한 구조물이다. 당신의 행위가 점화 효과의 결과일 때, 그러니까 적응무의식에서 어떻게 행동하라고 보낸 암시의 결과인 경우, 당신은 자신의 기분과 결정과 사고를 해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한다. 머릿속 장막에 가려진 정신이 조언을 건넸음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인간 행동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의식의 통제 아래 이뤄지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개인의 공간을 철저하게 관리하지 않아 혼란과 혼돈이 발을 들이게 놔둔다면 그것들은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당신이 당신의 공간을 더더욱 방치하도록 만들지 모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긍정적인 작용이 삶의 질을 높이도록 해야지, 삶에서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직접 점화 효과를 일으킬 수는 없지만 그래도 스스로 바라는 정신 상태를 만들기 위해 주변 공간을 조성할 수는 있다.
이 머릿속에서 정보를 꺼내 저 머릿속으로 넣으려면 의사소통 같은 것을 통해 전달되어야 한다. 표정, 목소리, 몸짓, 지금 읽고 있는 단어들. 이런 투박한 도구들에 의존해야 한다. 감정이 아무리 강하고 생각이 아무리 강력해도 당신의 마음 밖 세상에게는 마음 속 세상만큼 극심하고 강렬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투명성에 대한 환상이다.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 알고, 그러한 생각과 감정이 구멍들을 통해 새어나가 세상에 드러나고 외부에 인식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당신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가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과대평가하며 다른 사람 역시 그들만의 작은 비눗방울 안에 갇혀 자신들의 내부 세계에 대해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현상학은 너무나 강렬해서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는 그 너머를 보기가 쉽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가설은, 당신은 모두가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의 행동과 외모를 평가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 당신은 대부분 배경의 일부로 사라진다는 스포트라이트 효과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효과는 너무 강력해서 마치 상상 속 스포트라이트가 당신의 몸짓, 언어, 표정까지 모두 꿰뚫고 심지어 당신만의 은밀한 세상까지 낱낱이 까발리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사람들 앞에 설 때,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를 할 때, 뇌 안에는 불안이 가득해도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당신의 생각보다는 훨씬 침착해 보일 것이다. 그러니 긴장을 풀고 웃어라. 초대받은 집 식탁에 차려진 음식이 개밥으로밖에 쓸 수 없을 것 같아도 제발 먹지 말라는 당신 뇌의 간절한 경고는 음식을 차려 내온 집주인에게 들리지 않는다.
설명하는 과정이 까다로울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화는 내지마라. 그 사람이 당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이 당신만큼 영리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그러니 긴장을 풀고 차분하게 계속 가라.
지난 30년에 걸친 연구에 따르면,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이 직장 동료보다 능력 있고, 친구보다 도덕적이며, 일반 대중보다 친절하고, 동년배보다 지적이며, 평균적인 사람보다 매력 있고, 지역 사회 사람들보다 편견이 덜하며, 또래보다 젊어 보이고, 자신이 아는 대부분의 사람보다 운전을 더 잘하며, 다른 형제자매들보다 낫고, 평균 수명보다 더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방금 이 문장을 읽으면서 당신은 "아닌데, 난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데"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이 평균적인 사람보다 스스로에게 더 정직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그렇게 영리하지 않다.)
어느 누구도,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이 통계를 구성하는 인구의 일부로서 평균을 산출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당신은 자신이 평균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은 그렇다고 믿는다. 자기 위주 편향 self-serving bias 에서 비롯된 이러한 경향을 기만적 우월감 효과 illusory superiority effect 라고 부른다. 당신은 주변의 모든 이들만큼이나 굉장히 자기중심적이다. 당신의 세상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이기 때문에 당신의 생각과 행동의 대부분은 당신의 개인적 세상을 주관적으로 분석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당신의 하루하루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은 저 멀리서, 혹은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보다 항상 더 의미가 있다. 당신의 능력이나 지위를 평가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게 되면 이러한 자기 본위가 당신을 하나의 숫자, 하나의 평균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당신은 이런 생각을 기분 나쁘게 보고 스스로를 고유한 존재로 바라볼 방법을 찾는다.
실제 난이도와 관계없이 그저 사람들에게 과제가 얼마나 어려울지 미리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자신을 상상 속 평균과 비교해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다.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쳐내기 위해 당신은 먼저 과제가 쉽고 간단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다면 기만적 우월감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대인관계와 사회적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인식할 때, 자기 위주 편향과 기만적 우월감이라는 심리적 장치를 사용한다. 당신은 낯선 사람보다 가까운 친구의 성공과 실패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당신은 버락 오바마나 조니 뎁이 성공한 사람들이란 걸 알지만 그보다는 직장 동료나 동창생,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아 온 친구들을 삶의 표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당신이 아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당신보다 더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고, 당신은 당신이 그들보다 더 인기 있다고 생각한다.
통제력 착각에 대해 알았다고 해서 삶을 힘들게 만드는 상황을 극복해 나가기 위한 노력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어쨌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아무 결과도 보장받지 못하니까. 다만 어떤 노력을 하든 미래는 대부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혼돈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라. 혼돈을 계획에 끼워 넣어라,. 어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실패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사전에 실패는 없다고 믿는 사람은 절대 실패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예측 가능하고 대처 가능한 일도 있지만 사건이 일어나는 시기가 미래일수록 당신이 사건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은 줄어든다. 당신의 몸에서 멀어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관여할수록 행사 할 수 있는 권력은 줄어든다. 1조 개의 주사위를 10억 번 굴리는 것처럼 게임에 작용하는 요인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무작위적이어서 진정으로 대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름의 모양을 예측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과정 또한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 작은 것들, 중요한 것들을 통제하는 방법을 찾으려 애쓰고 그것들이 쌓여 행복이 되게 하라. 그러나 어쨌든 더 큰 그림에서 보면 당신이 상황을 통제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심리학에선느 진정한 객관성이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기억, 감정, 조건부여를 비롯한 기타 모든 종류의 정신적 표류가 새로운 경험을 얻는 족족 오염시킨다.
자성예언은 현실에 대한 사회적 정의에서 그 힘을 얻는다. 당신의 인생은 대부분 논리적으로 정의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정의된다. 다른 사람들의 인식이 행동으로, 정책으로, 믿음으로 전환되면 인식은 현실이 된다. 인생의 너무나 많은 부분이 행동의 지배를 받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전문가의 경우처럼 사람들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증을 얻기 위해 책을 구매하고 있었다. 크레브스는 수년간 아마존의 구매 성향과 사람들이 소셜네트워크에 모이는 경향을 조사했는데, 그의 조사는 확증 편향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가 예측하는 바를 잘 보여 준다. 당신은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옳다고 믿고 싶기 때문에 그런 믿음을 확증해 주는 정보를 찾고, 그와 반대되는 증거나 의견은 경시한다는 것이다. 반세기에 걸쳐 진행된 연구로 확증 편향은 정신적 장애 가운데 가장 믿을 만한 것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기자는 그 이야기와 반대되는 증거를 무시하는 경향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설을 증명하려는 과학작는 가설과 반대되는 결과가 나올 여지가 거의 없는 실험 환경을 조성하지 않아야 한다. 확증 편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음모론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인류는 정말로 달에 인간을 보냈을까?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2009년 오하이오 신문에서 실시한 한 연구에서는 사람들이 자신과 의견과 일치하는 논문을 읽을 때 36%나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신은 잡지 구독을 늘리고, 책을 읽고, 텔레비전을 몇 시간씩 보면서도 자신의 세계관과 반대되는 것은 절대로 찾아보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세계관에 대해 더욱 확신하게 되고, 그 누구도 당신을 설득할 수 없게 된다. 기억하라. 저 바깥에는 확증 편향에 길든 사람들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광고주에게 시청자를 팔아넘기려는 누군가가 늘 활보하고 있다는 것을.
기업의 홍보대사를 자처하지 말자. 당신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는데 잘못 결정했다고 여기게 되는 결정 후 부조화를 물리쳐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정당한 선택을 했다고 느낌으로써 스스로에게 드는 의문과 불안감을 줄여야 한다. 거기에 유대감, 세부적인 자아상, 그리고 각종 편향. 이 모두가 첨가되어 비로소 거대한 신경 집합체가 만들어진다. 그러니 다음에 당신이 가진 휴대전화나 자동차나 TV가 다른 제품보다 나은 점을 100가지는 말할 태세가 갖춰지더라도 그만 두라. 당신은 지금 타인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칭찬하려는 것뿐이니까.
체화된 인지 오류, 2008년, Lawrence williams와 John Bargh의 실험, 따뜻한 커피 혹은 아이스 커피르 들고 낯선 사람을 만나게 하는 실험. 당신은 밝은 색깔의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 친절하고 호의적인 사람으로, 즉 성격이 '밝은'사람으로 본다. 또 말하는 속도가 느린 사람을 덜 똑똑한 사람으로, 즉 이해가 '느린'사람으로 본다. 당신이 속한 문화권에서 어떤 비유를 사용하든, 일치하는 언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주변 세상에서 받는 느낌을 변화시키게 된다. 촉감 또한 이러한 현상의 강력한 형태로, 사물이 피부에 닿는 느낌은 사물이 마음에 닿는 느낌으로 바뀔 수 있다. 이와 같은 형상을 체화된 인지 Embodied cognition 라고 한다.
어떤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 그러니까 그 사람에 대해 알 만한 기회를 갖지 못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어떤 인물로 탈바꿈시키는 경향이 있다. 턱없이 부족한 경험과 잔뜩 과장된 공상으로부터 추려 낸 원형과 전형에 기대는 것이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늘 사회적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한다. 그리고 상사와 함께 있을 대의 당신은 각기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당신은 친구와 가족, 심지어 상사도 당신처럼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심리학자들은 대부분의 행동이 외부의 힘과 내부의 힘 사이에서 벌어지는 줄다리기의 결과임을 안다. 사람은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고유한 존재이므로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직장에 있을 때의 당신과 집에 있을 때 드러나는 성격이 다르다. 글로 적어놓고 보면 뻔한 소리 같지만 다른 사람을 평가할 대는 주변 상황의 힘을 곧잘 잊어버린다. 그래서 “잭은 모르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걸 불편해 해서 공공장소에서 만날 때는 한적한 곳을 찾는 경향이 있어.” 라고 말하는 대신 “잭은 수줍음이 많아”라고 말한다. 사회라는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는 그게 지름길이다. 당신의 뇌는 지름길을 아주 좋아한다. 주변 상황의 힘을 무시하기란 쉽다. 상황이라는 렌즈를 통해 사람을 보는 것은 사회심리학의 기초 중 하나로,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귀인이론 attribution theory 이라 부른다.
심리학자 해럴드 켈리에 따르면, 당신은 다른 누군가의 행동에 대한 원인을 찾을 때 일관성을 고려한다. 친구 하나가 당신이 아는 사람과 싸움을 벌였다면 먼저 이들의 행동이 과거의 행동과 일관됐는지 따져 본다. 그들이 사소한 의견 차이로 곧잘 싸움을 벌이곤 했다면 성격을 탓하지만, 대체로 차분한 사람들이었다면 싸움의 원인을 상황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이런 편법은 대체로 잘 들어맞는다. 세계가 지금과 같이 발전하기 전에는 매일 만나는 사람들의 일관성을 파악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현대사회에서는 종업원이나 지하철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일관성을 확인할 수 없다. 총기를 난사하는 사람이 과거에도 그런 행동을 했는지, 혹은 도로에서 끼어드는 사람이 항상 그렇게 욕먹을 짓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일관성을 확인할 수 없을 때 당신은 사람들의 행동을 성격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긍정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말하자 남자들은 여배우가 단순히 시키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안면서도 여배우가 자신들에게 정말로 호감을 가진 것처럼 느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그들이 실제로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냐에서 비롯될 뿐 배경과는 상관이 없다고 믿음으로써 근본적 귀인 오류를 범한다. 한 남자가 스트립 쇼를 하는 여자가 정말로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는 것이나 상사가 모든 부하 직원이 자신이 코스타리카에서 낚시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근본적 귀인 오류다.
잔혹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다.
사랑하는 이의 냉담한 태도가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나 극심한 심적 동요를 일으키는 문제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바에 무관심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당신은 근본적 귀인 오류를 범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표를 던질 때 그 사람이 표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회적 가면을 꾸며 냈는지는 무시한 채 그저 호감이 가고 친근해 보인다는 이유만을 내세운다면 역시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표를 던질 때 그 사람이 표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회적 가면을 꾸며 냈는지는 무시한 채 그저 호감이 가고 친근해 보인다는 이유만을 내세운다면 역시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호의를 성적 관심으로 평가한다거나 가난을 게으름의 결과로 평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한 원인을 찾으려고 하면 그 원인은 쉽게 찾아진다. 하지만 상황이 얼마나 강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먼저 고려하는 일은 거의 없다. 당신은 그 사람을 비난하면서, 그 사람의 환경이나 그의 동료들이 미친 영향은 비난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행동이 철저히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허수아비 오류
논쟁에서 지고 있을 때 당신은 종종 이런저런 비겁한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려고 한다. 치사하게 굴려는 건 아니었다 해도 화가 나서 말싸움을 하게 되면 사람 마음이란 것이, 대개 그런식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법이다. 이럴 때 가장 쉽게 사용하게 되는 논리적 오류로 허수아비 오류가 있다. 이 오류를 저지를 확률은 꽤 높은데도 우리가 이 오류를 사용하거나 자신도 모르게 이 오류를 범할 때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일이 자주 있다.
개인적인 문제든 추상적인 문제든, 어떤 논쟁을 시작할 때면 당신은 반박하고 논박하고 부인하기 쉬운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낸다. 혹은 상대가 주장하거나 변호하지도 않은 입장을 혼자 만들어서는 공격한다. 이것이 허수아비 오류다. 당신의 다른 사람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찰나, 그의 주장대로라면 세계가 미쳐 돌아갈 거라는 공상의 시나리오를 쓸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멋지게 허수아비를 세운 것이다. 주장의 부정적인 결과를 찾기는 쉽고, 이를 극복할 방안을 찾기는 어렵다. 한번 돌아보라. 애초에 상대방은 그런 주장은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는 자신의 제안 때문에 수많은 식당들이 줄줄이 폐업하는 일을 바라지 않는다는 입장을 모두에게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정 내에서 쉽게 닭을 키우는 조그만 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방안을 내놓는 대신, 당신이 만들어 낸, 깃털 날리는 최후의 날에 대해 반박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음에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을 때, 자신이나 상대방이 허수아비를 만들지는 않는지 주의하라. 누가 됐든 그 사람은 논리적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며, 설사 논쟁에서 그가 이기더라도 정말로 이긴 것은 아니다.
논쟁이 과열되면 상대방의 이름을 막 부르게 되기도 한다. 그럴 땐 상대방이 대변하는 입장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을 공격하게 된다. 저열하고 무지하다고 평가된 사람의 의견이라면 더 무시하기 쉽다. 그를 향해 편협한 인간이라고, 바보이거나 거지 같은 놈이라고 부르면 속이 시원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옳고 그 사람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당신은 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실수를 저지른다. 말하는 이가 누구인가, 또는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면 바로 인신공격의 오류 ad hominem fallacy를 저지르는 것이다.
흡연자가 식당 내 흡연이 합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이해가 관계된 일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손을 내저으며 의견을 무시해선 안 될 일이다. 그의 말이 타당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가 흡연자라는 사실이 당신의 판단을 뒤흔들도록 놔둬선 안 되는 것이다.
당신은 사람들을 인물됨에 따라 파악하고 그들의 행동에서 일관성을 찾는 경향이 있다. 이는 누구를 믿어도 좋은지 구분하는 데 대체로 유용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누구를 믿어도 좋은지 따지는 일과 그 사람이 말이 진실인지 따져 보는 일은 서로 다른 문제다.
사람을 판단하는 당신의 눈이 아무리 뛰어나도 기억해야 한다. 사실 판단 능력 또한 뛰어나지 않다면 당신의 생각은 망상에 그치고 만다는 것을.
대부분 비정상적인 행동이 그렇듯이 심기증도 모두가 평범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일 뿐이다. 누구나 우울할 때가 있다. 누구나 이따금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울증, 망상증, 강박증 같은 장애는 이처럼 정상적인 성향들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변형된 형태로 과장하고 확대한다. 당신에게도 이러한 심기증 환자처럼 사전에 무의식적으로 변명할 거리를 궁리하는 경향이 있다.
맡은 프로젝트가 너무 방대하고 까다로워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할 때가 있다. 책을 쓰거나 영화를 감독하는 일처럼 전문성을 요하는 일일 수도 있고, 기말고사에서 낙제점을 면해야 한다거나 회사 상사에게 중요한 보고서를 발표해야 하는 등 보다 일상적인 일일 수도 있다. 당연히, 실패할 가능성이 보일 때마다 마음속에는 의심들이 떠다니게 된다. 그러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강해지면 자기불구화self-hanicapping를 통해 감정상태의 진행 방향을 바꾸려 한다. 자기 불구화는 현실과의 타협이라 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해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인식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식까지도 무의식적으로 조작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싶지 않은 척 짐짓 연기를 한다거나 뭔가 불쾌한 것이 사실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이라며 스스로를 설득하는 등의 행위를 선행적 합리화 anticipatory rationalization 라 부른다. 자기 불구화 행동은 실패의 원인을 자신의 능력이 아닌 다른 요인으로 돌리는, 말하자면 미래 현실에 대한 투자다. 이 행동 역시 당신의 자존감을 확고하게 세우기 위한 것이다. 실패의 원인을 늘 내부의 힘이 아닌 외부의 힘 탓으로 돌린다면 과연 누가 당신이 실패했다고 말하겠는가?
인간에게는 미루는 습관이 있다는 점을 믿지 않거나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달리 열심히 일하고 철저하게 시간을 관리할 수 있다는 이상적인 생각을 갖는다면 약점을 극복할 전략을 절대 세우지 못할 것이다. 미루는 습관은 일종의 충동이다. 또한 미루는 습관은 과도한 가치폄하로, 지금의 확실한 것을 저 멀리 언젠가 있을 분명치 않은 것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미루는 습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고에 대한 사고에 능숙해야 한다. 소파에 앉아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있는가 하면 언젠가 다른 생각과 열망의 영향을 받게 될 당신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의 뇌 속에 ‘현재’라는 색깔과 ‘미래’라는 색깔을 모두 가진 팔레트가 있다면 ‘현실’이라는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의 작동은 대부분 무의식의 잠긴 문 너머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이 생각들은 무의식과 의식이 상호작용한 결과물의 일부다. 때때로 심리학자들은 의식을 두뇌와 진화에 맞춰 몇 가지 부분으로 나눈다. 이는 의식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지만 벌레와 물고기 수준의 단순한 뇌에서 지금의 뇌로 진화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여러 부분으로 나눠 바라보는 것은 꽤 유용한 방법이다. 두뇌를 고고학 발굴처럼 최근의 지층 밑에 고대의 유물들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면,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두뇌의 오래된 부분은 주로 두뇌의 아래쪽에 자리한다. 이 부분은 생존과 관련된 부분을 다루거나 숨쉬기나 두 발로 서기처럼 굳이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부분을 조절하는 데 쓰인다. 중뇌는 원시인 시절에 형성되어 감정이나 사회적인 의식을 관장한다. 가장 최근에 진화한 뇌의 상층부는 이성과 계산을 다룬다. 전두엽과 신피질은 의식의 본부라고 해도 좋다. 두뇌의 다른 구조에서 온 제안들을 받아들이고 행동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이성적, 수학적, 합리적 체계적 의식은 느리고 둔하다. 이 부분은 기록하고 도구를 사용한다.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고 본능적인 의식은 빛처럼 빠르다. 사용하던 자동차 기름을 바꿀 대나 새로운 식기세척기를 구입할 때 당신은 작동 원리나 설명서, 용량 등을 결정하지 감정에 기대지 않는다. 반면, 점심을 어디서 먹을지, 어떤 영화를 빌려 볼지를 결정할 때는 순간적인 판단과 수치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에 따른다. 최종 결정은 여전히 의식이 내리지만 의식에 느낌을 전달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의식이다. 삶의 대부분의 일들은 감정적 두뇌가 맡아 고려한다. 이는 사회적인 상황이나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당신의 사고와 행동이 대개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계기에 영향을 받으며, 접근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장소에서 전해지는 의견에 따라 움직인다는 말이다. 우선 의식이 자동적인 부분, 감정적인 부분 그리고 생각을 하는 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고 봐도 좋다. 이를 둘로 줄여 ‘의식적인 당신’과 ‘무의식적인 당신’이 있다고 해보자.
앙투안 베카라와 한나 다마지오 Antoine Bechara and Hanna Damsio가 <사이언스>지에 게재한 연구는 무의식적인 당신을 훌륭하게 드러낸 사례로 종종 거론된다. 당신의 추론 능력은 “서술적 지식보다는 신경계를 이용하는 의식 없는 편향의 움직임을 따른다.”것이 그들의 가설이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문제 해결 과정에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위험과 보상에 대한 판단은 무의식적인 당신이 시작한다. 무의식적인 당신은 대상이 좋은지 나쁜지, 위험한지 안전한지, 의식적인 당신이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기 이전에 알아차린다. 좋은 것은 이득을 주고 나쁜 것을 해를 끼친다. 당신이 무언가 좋다고 판단한다면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는 말이 된다. 비행기를 타고 라스베이거스로 휴가를 떠나겠는가? 펜과 텔러의 마술을 보고 사막에서 도박을 해 볼 수 있다면 비행기 사고로 죽을 가능성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만하기 때문에 당신은 티켓을 끊고 난기류와 부딪쳐 보기로 할 것이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의식 속 칠판에다 적어 가며 계산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물 위로 튀어나온 빙산처럼 칠흑같이 어두운 무의식에서 솟아나온, 감정의 순간적인 떨림과 직감을 통해 도출되는 것이다. 당신네 종족은,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심사숙고보다는 직감으로 결정을 내린 역사가 훨씬 길다. 그러니 이러한 정신적 술수의 영향력이 그렇게나 큰 것이다.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기분이 좋아진다는 점 말고는 별 소득이 없다. 사실 그것은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마음을 흐리게 만들어 앞으로의 행동을 점화시킨다.
프로이트는 건강한 정신은 심리치료사라는 거름 종이를 통해 마음속 불순물을 걸러냄으로써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억압된 두려움과 욕망, 결론 나지 않은 논쟁, 치료받지 못한 상처로 감염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신은 이러한 정신적 파편을 중심으로 병적 공포와 망상을 낳았다. 따라서 정신이라는 곳을 샅샅이 뒤져 창을 열고 신선한 공기와 밝은 빛이 들어가게 만들어야 했다.
화를 운동이나 다른 유사한 활동으로 전환하는 방법은 화가 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거나 흥분 수위를 높일 뿐이므로 화를 식히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훨씬 더 공격적인 행동이 나올 수 있다. 화를 식힌다는 것이 화를 전혀 다스리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시먼은 반응을 잠시 미루어 두거나 편하게 쉬거나 공격성을 가지고는 전혀 할 수 없는 활동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제안한다.
카타르시스는 기분을 좋게 만들지만 그것은 감정적 쳇바퀴에 지나지 않는다.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드는 감정은 그 뒤에도 그 자리에 계속 남는다. 카타르시스로 기분이 좋아진다면 미래에 또다시 카타르시스를 찾게 된다.
당신이 속한 문화의 규범과 당신이 살고 있는 대륙의 법에 진심으로 동조하길 거부하려는 것은 벅찰 뿐만 아니라 실로 헛된 노력일 것이다. 당신은 시대정신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동조가 인생이라는 게임의 한 부분임을 알고 있다. 다른 나라를 여행하며 그 나라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판단한다.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면 그 사람이 하는 대로 행동한다. 대학 강의실에서는 조용히 앉아 필기를 한다. 운동을 하러 가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주변을 둘러보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당신은 다리의 털을 밀고 얼굴의 수염을 깎는다. 냄새를 없애는 스프레이를 뿌린다. 이 모두가 동조하는 행동이다.
심리학자 Noam Shpancer가 자신이 블로그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우리는 언제 동조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가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홈베이스이자 우리의 기본 모드이기 때문이다.” 슈팬서는 당신이 동조하는 이유가 뇌 속에 사회적 수용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동맹이 필요하다는 걸 아는 것이다. 당신은 다양한 출처에서 정보를 받을 수 있을 때 세상을 더 정확하게 그린다. 당신에게 친구가 필요한 이유는 버림받은 사람에게는 값진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되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스마트폰에 설치해야 할 멋진 앱이나 꼭 읽어야 할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 당신은 흔들린다. 동조는 생존매커니즘이다.
당신의 행동이 자기 자신이나 다른 이들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될 때는 주저 말고 기존 질서에 의문을 던져라.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상황에서라도 말이다.
당신은 투표를 하는가?
만약 투표를 하지 않는 다면 그 이유가 어차피 바뀌는 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치인들은 다 똑같이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수백만 표 중에서 나의 한 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그렇다. 이것이 바로 학습된 무기력이다. 매 맞는 여성, 인질, 학대받는 아이, 장기 복역수가 탈출을 거부한다면 이는 노력해도 소용없다고 이미 체념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냐, 하는 마음인 것이다. 나쁜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사람이라 해도 실패할지 모르는 일에 전념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느낀다.
상황이 절대 바뀌지 않으리라 믿는 경우에는 내일이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경우보다 더 강하게 슬픔을 느낀다. 당신에게 닥친 문제가 삶의 특정 요소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당신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면 이번에는 한층 더 우울한 기분에 빠지게 된다.
하루하루를 지날 때마다 운명을 바꾸는 힘들 – 직장, 정부, 중독, 우울함, 돈 – 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당신은 소극적인 저항들로 여기에 맞선다. 전화벨 소리를 바꾸기도 하고 벽지를 새로 바르기도 하고 우표를 수집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당신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으니까. 선택이라는 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무기력의 무게에 짓눌려 쓰러지지 않게 당신을 잡아 준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지난 행동에 연연하지 않고, 실패하더라도 당당할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잦은 실패야말로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죽음이 아니고서야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없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