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1 - 창작한다는 것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1 - 창작한다는 것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를 주제로 하는 첫 끄적임이다. 원래 시리즈 제목을 '인생의 행위에 대하여'로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주체는 '인간'일수 밖에 없기도 하니 '인간의 행위'로 정했다. 그러고서 처음으로 떠올리는 인간의 행위는 '창작'이다.

사실 모든 게 창작이다. 창작이 아닌게 없다. 내가 쓰고 있는 글도 창작이며,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창작물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도 결국 창작의 연속이다. 창작은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고 그것은 '무'를 '유'로 치환함이다. 인간의 인생에서 '무(없음)'란 무엇인가. 그건 살지 않음 (살아가지 않은 시간들, 오지 않은 시간들)이고, 그 반대로 살아온 시간들은 모두 '유'가 된다. 즉, 살아가는 행위 자체만으로 무를 유로 바꾸는 창작이다.

인생의 시간 속을 흘러간다는 점에서 창작은 필연적이며 그럼 중요한 것은 '어떻게' 창작하느냐의 문제로 넘어간다. 결국 인생을 어떻게 살것인가의 문제이다. 우린 태어남과 동시에 아주 커다란 흰 종이를 건네 받았고, 각자의 그림을 그려나간다. 처음부터 그림은 잘 그릴 수 없기에, 부모의 양육과 사회의 교육을 받으며, 그리고 사회에서 정해진 룰에 맞춰 그림을 그려나가는 법을 배운다. 예술도 그렇다.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는 것에도 모두 그 세계의 룰들이 존재한다.

우린 선택해야 한다. 가장 먼저는 룰을 따를지 말지, 따른다면 어느 정도 룰을 따를지,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를 말이다. 사실 이러한 선택지들 사이에서 우열은 없다. 모든 창작 과정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가지기 때문이다. 형식에 잘 맞춰 쓰여진 글이나, 형식을 파괴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담아내는 글.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음악과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음악. 사회에서 바람직하게 바라보는 한 인간의 삶이나, 사회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쁜지를 가려낼 수는 없다.

창작은 애초에 좋고 나쁨을 가려낼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니다. '좋은 창작'과 '나쁜 창작'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삶과 나쁜 삶, 바람직한 삶과 바람직하지 않은 삶을 나눠서 구분하는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창작은 어디까지나 창작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다.(후에 의미없음에 대한 글을 썼을지라도)우리는 그저 의미를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인생에 주체적으로 임하여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그런 인생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사회에서 만들어 내는대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그 나름대로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면 된다.

흔히 말하는 '의미 부여' 작업이다. 의미부여만큼 창작에서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흰 종이에 물감을 의도해서 뿌리든, 물감이 엎지러져서 종이에 뿌려지든, 우리는 두 가지 상황에서 모두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 내가 그린 그림, 내가 쓴 글, 내가 산 오늘 하루, 내가 살아온 세월에 우린 얼마든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그렇게 의미를 부여한 순간에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창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정리하자면 창작이 성립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세가지는 창작자 - 창작물 - 의미다. 내가 아무 생각없이 보내고 있는 시간에도 약간의 의미를 더해주면 그건 하나의 창작으로서 완성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의 창작품으로 완성되어지는 순간, 그건 이미 좋고 나쁨의 가치 판단의 필요성을 뛰어넘는 세계에 도달한다. 무가 유로 변환되는 세계, 창작의 세계다.

창작한다는 것,
나는 이 에세이 한 편으로 내가 쓴 모든 글과, 앞으로 내가 쓸 모든 글들을 옹호하였다.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에 다시 한번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지님' 을 탈출할 수 없는 '깨질 수 없는' 창작이 되었다. (←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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