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인간,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칭찬 받을만하고 고상한 일처럼 들리지만, 의식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노력이다. 왜냐하면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 역시 똑같은 기능장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더 미묘하고 순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자기를 강화하는 형태이다. 그런 노력 역시도 자신이 관념 속에서 ‘나’라고 여기는 이미지를 더 크게, 그리고 더 강하게 만들려는 욕망과 아무 차이가 없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자신 안에 있는 좋은 것을 발견하고, 그 좋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함으로써만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다. p38
인간의 삶과 의식은 지구의 삶(생명)과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에 낡은 의식이 소멸하면 그것에 공명해 지구의 많은 곳에서 지리적으로나 기후적으로나 대변화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삶은 내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만큼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자살의 고비까지 간 후의 일이었으며, 이번의 깨달음은 짧은 순간의 경험 이상의 것이었다. 나는 강박적인 생각과, 마음이 만들어낸 허구의 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p61
자기 본래 존재의 삶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면 인간은 물질로 삶을 채우려 하기가 쉽다. 하나의 영적 수행으로서 나는 자신이 물건들의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를 한 번 관찰해 보라고 제안하고 싶다. 특히 ‘나의 것’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물건들과의 관계를. 예를 들어 자아 존중감이 소유물에 좌우되지 않는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민감해야 하고 솔직해야 한다. 자신을 중요한 인물이나 우월한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 특정한 물건들이 있는가?
“당신은 결국, 그것도 아마 가까운 시일 안에, 그 반지를 내려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까? 그것을 내려놓은 준비가 될 때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더 필요한가요? 그것을 내려놓으면 자신이 더 작아지나요? 그 손실로 인해서 당신의 존재가 줄어드나요?”
만약 이토록 강렬하게 나의 ‘순수한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나는 분명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죠.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느낄 수 있어요. 평화로우면서도 매우 살아 있는 무엇인가를.
“그것이 존재의 기쁨입니다. 머리에서 벗어날 때만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존재는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에고는 잘못된 것이 아니며, 단지 무의식일 뿐이다. 자신 안에 있는 에고를 관찰할 때 당신은 그 너머로 가기 시작한다. 에고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자신 안에서 에고의 행위를 감지하게 되면 미소 지으라. 때로는 소리 내어 웃어도 좋다. 인류는 어떻게 오랫동안 이런 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먼저, 에고는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에고는 당신이 아니다. 에고를 개인적인 문제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단지 더 에고일 뿐이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자신은 어떤 사람이며 누군인가를 비춰 주는 거울이 된다. 에고의 자아 존중감은 많은 경우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가치에 매여 있다. 당신은 자신에게 자아의식을 줄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로 거의 대부분 자아 존중감이 결정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면, 그 집단적 망상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한 자신의 가치와 자아의식의 완성을 찾아 헛된 희망을 품고 남은 평생 동안 물질만을 쫓아다니는 운명이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물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그런 것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질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물질에 대한 집착은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그때까지는 자신이 물질에 집착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신이 물질과 동일화되어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그 동일화는 더 이상 완전하지 않다.
비극적인 상실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그것에 저항하거나 아니면 항복한다. 억울해 하거나 깊은 원한을 품는 사람도 있으며,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고 사랑이 더 커지는 사람도 있다. 항복은 있는 그대로를 내적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삶을 향해 자신을 여는 것이다. p88
내적으로 항복할 때, 저항하지 않을 때, 의식의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그때 만약 행동이 가능하거나 필요하다면, 당신의 행동은 전체와 조화를 이룰 것이고, 내적으로 열린 상태일 때 당신과 하나가 되는 창조적인 지성과 조건 지어지지 않은 의식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것이다. 주변 상황과 사람들이 당신을 돕고 협조적이 된다. 불가사의한 우연들이 일어난다. 만약 어떤 행동도 가능하지 않다면, 당신은 저항의 포기와 함께 오는 평화와 내적 고요 속에서 휴식한다. 신 안에서 휴식하는 것이다.
영적 깨달음은 내가 지각하고 경험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지나가 버리는 그 모든 것들 속에서는 나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는 것이다.
환상의 나를 버렸을 때 남는 것은 그 안에서 지각과 경험과 생각과 감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의식의 빛이다. 그것이 바로 더 깊은 곳에 있는 나, 진정한 나, ‘순수함 있음’이다. 나 자신이 그것임을 알 때,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고, 단지 상대적인 중요성만을 지니게 된다.
에고의 숨은 동기는 언제나 같다. 눈에 띄고 싶고, 특별해지고 싶고, 지배하고 싶고, 힘을 갖고 싶고, 관심받고 싶고, ‘더 많이’ 원하는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자신은 남들과 별개라는 느낌을 갖고 싶어한다. 즉, 대립하는 상대방, 적이 필요하다. 에고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나 상황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원한다. 언제나 숨겨진 안건을 가지고 있다. p115
‘현존’이 아니라 인정, 칭찬, 찬사 같은, 혹은 어떤 식으로든 주목받고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어떤 형상 속의 관심이다.
두려움의 이유는 그 관심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형태를 띠지나 않을지, 다시 말해 자아의식을 강화시켜 주기는 커녕 위축시키지나 않을지 불안해 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심한 사람은 관심에 대한 두려움이 관심에 대한 욕구보다 더 크다. 소심함은 종종 눈에 띄게 부정적인 자아 의식, 즉 자신에게 무엇인가 많이 부족하다는 믿음과 함께 한다. 자기 자신을 이러저러하게 보는 관념 속 자아의식은 ‘내가 최고야’라는 식의 두드러지게 긍정적이든, 아니면 ‘나는 형편없어’라는 식의 부정적이든, 어느 쪽이든 에고이다.
모든 긍정적인 자아의식 뒤에는 그럼에도 아직 충분히 좋지 않다는 불안이 숨어 있다. 모든 부정적인 자아의식 뒤에는 최고가 되고 싶고 다른 사람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욕구가 숨어 있다.
우월감을 느끼고 그 우월감을 지속하려는 자신만만한 에고의 욕구 뒤에는 열등해지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숨어있다.
에고가 추구하는 관심의 형태는 ‘나’의 문제, ‘나와 나의 이야기’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과 연민과 관심이다. 자신을 피해자로 보는 것은 불평하고 상처입고 몹시 화내는 것과 같은 에고의 많은 패턴 중 하나이다.
에고는 자신의 ‘문제들’이 끝나는 것을 원치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에고의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만약 아무도 ‘나의 슬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나는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해 말하면서 자기를 불쌍하게 느낀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이나 다른 사람들, 운명이나 신에게 불공평하게 취급당하는 자신이라는 정체성을 갖는다. 그 정체성은 나의 자아상을 명확히 규정해주고, 나를 누군가로 만들어 준다. 에고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연애 관계의 초기 단계에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특별한 존재로 느끼게 해주고, 나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것 같은 상대방의 관심을 끌고,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에고가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나를 연기하고 있으니까 당신도 내가 원하는 당신을 연기해 줘” 이것이 암묵적인 무의식적 합의이다. 그러나 역할 연기는 힘든 일이며, 특히 일단 두 사람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 끝없이 연기를 계속할 수 없다.
흔히 말하는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사실은 에고의 욕구와 필요성을 강화하기 위한 경우가 많다. 당신은 상대방에게,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이미지에 중독된다. 그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진정한 사랑과는 관계가 멀다.
불행의 주요 원인은 결코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을 알아차려야 한다. 생각을 상황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상황은 언제나 중립적이며, 언제나 있는 그대로이다. 반대편에는 상황이나 사실이 있고, 이쪽에는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있다.
이를테면 ‘나는 망했어’는 하나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당신을 한정 짓고 효과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통장에 달랑 500원밖에 남아 있지 않아’는 하나의 사실이다. 사실과 대면하면 반드시 힘이 솟아난다. 대부분 당신이 생각하는 것들이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생각과 감정 사이의 연결을 보아야 한다. 생각과 감정이 되는 대신, 그것들의 배후에 있는 알아차림이 되어야 한다.
행복을 찾아다녀서는 안 된다. 찾아다닌다면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찾아다닌다는 것은 행복의 안티테제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교묘히 달아나지만 불행으로부터의 자유는 지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대신 있는 그대로와 마주함으로써 가능하다. 불행은 진정한 행복의 원천인 심신의 조화와 내적 평화의 자연스러운 상태를 숨겨 버린다.
당신이 부정적인 마음 상태가 될 때마다, 당신 안에는 그 상태를 원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왜 부정적인 생각에 매달려 자신과 타인을 불행하게 하고 몸에 병을 만들겠는가? 따라서 자기 안에 부정적인 마음 상태가 일어났을 때, 그 부정적인 상태에 쾌감을 느끼거나 그것이 쓸모 있는 목적을 갖고 있다고 믿는 무엇인가가 당신 안에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당신은 곧바로 에고를 알아차리게 된다.
부정적인 마음 상태의 한가운데서 “이 순간 나는 스스로 고통을 만들고 있다”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조건 지어진 에고의 상태와 반응의 한계 너머로 올라갈 수 있다.
자신의 불행이 지성적인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당신은 그 자리에서 그 불행을 내려놓고 자유로워 질 것이다. 부정적인 마음 상태는 지성적이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에고이다. 에고는 영리할지 모르지만 지성적이지는 않다. 영리함은 그 자신만의 작은 목적을 추구한다. 지성은 모든 것들이 연결된 더 큰 전체를 본다. 영리함은 자기 이익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며, 극단적으로 근시안적이다. 정치인과 경제인 대부분은 영리하다. 지성적인 사람은 매우 드물다.
받아들임을 통해 당신은 넓고 광대한 본래의 자신이 된다. 전체가 되는 것이다. 당신은 더 이상 하나의 조각이 아니다. 에고는 스스로를 하나의 조각으로 인식한다. 당신은 전체가 될 필요가 없으며, 이미 전체인 자신이어야 한다. 고통체가 있든 없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안에 투영된 모습을 통해 자신의 에고를 경험한다. 상대방 안의 무엇인가에 반응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같은 것이 있기 때문임을, 그리고 때로는 자신 안에만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자기 자신의 에고가 보인다. 이 단계에 오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것을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자신을 피해자로 보는 것을 중단하게 된다.
당신은 에고가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 안의 에고를 알아차렸다고 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신이 누구가 아닌가를 알게 되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이 누구가 아닌가를 아는 것을 통해서 진정으로 자신을 아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제거된다. 누구도 당신이 누구인가를 가르쳐 줄 수 없다. 누군가가 가르쳐 주는 것은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에 당신을 변화시킬 힘이 없다. ‘나는 누구인가’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 사실 모든 믿음은 어느 것이든 장애물이다. ‘나는 누구인가’는 심지어 깨달음조차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달음 없이는 ‘진정한 나’는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하지 않고 묻혀 있는 상태가 된다.
자신이 생각하는 ‘나는 누구인가’에 돈이든 인정받는 일이든 사랑이든 ‘부족함’이라는 사고방식이 포함되면 언제나 결핍을 경험한다. 이미 있는 자기 삶의 좋은 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결핍만 눈에 띈다. 이미 있는 자기 삶의 좋은 것들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풍요의 기본이다. 세상이 인색하게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이 인색하게 세상에 주지 않는 것이다. 왜 인식한가 하면, 자신은 작고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고 마음 깊은 곳에 믿고 있기 때문이다. p246
당신을 에워싼 삶의 충만함을 보라. 피부에 닿는 햇살의 따스함, 꽃가게 앞에 놓인 꽃들의 아름다움, 깨어 물면 과즙 풍부한 과일, 하늘에서 내리는 비의 풍요 속에 젖는 즐거움 등 모든 걸음마다 삶의 충만함이 있다. 자기 주위 모든 곳에 있는 풍요를 알아보는 것이 자신 안에서 잠자고 있는 풍요를 깨어나게 한다. 그런 후에 그 풍요를 밖으로 흘러나가게 하라. 낯선 사람에게 미소 지을 때, 그곳에 이미 에너지의 미세한 흘러나감이 있다. 당신은 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현재의 순간과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당신이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그것을 향해 우호적으로 다가가,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친구답게 환영하는 것이다. 그러면 머지않아 그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삶 쪽에서도 당신을 향해 우호적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은 협조적이 되고 상황도 협력적이 된다. 한 가지 결정이 당신의 현실 전체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 결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한다. 그것이 삶의 자연스러운 방식이 될 때까지.
현재의 순간을 친구로 삼으려는 결정은 에고의 종말을 의미한다. 에고는 결코 현재의 순간과 사이좋게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삶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에고의 본성 자체가 현재의 순간을 무시하고, 저항하고, 가치를 깎아내리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고는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에고가 강할수록 삶은 한층 더 시간에 지배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하는 거의 모든 생각이 과거 또는 미래와 관련된 것이 되어 버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가 과거에 의해 결정되며, 자기실현을 미래에 의존한다. 두려움 불안, 기대, 후회, 죄책감, 분노 등은 의식의 시간에 얽매여 기능 장애 상태가 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현재의 순간에 대해 에고는 세 가지의 방식으로 반응한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반응하는 것, 장애물로 반응하는 것, 적으로 반응하는 것 이 세 가지다.
에고에게 현재의 순간은 기껏해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쓸모가 있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미래의 어느 순간으로 당신을 데려가는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그 미래는 언제나 현재의 순간으로만 다가오며, 따라서 미래라는 것은 머릿속 하나의 생각 이상이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 이 방식이 작용하면 당신은 언제나 어딘가로 가려고 하기 때문에 바쁘며, 결코 ‘지금 이곳에’ 완전히 존재할 수없다.
이 방식이 심해지면 현재의 순간이 마치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여겨지고 다루어진다. 이때 초조함, 좌절, 스트레스가 일어나지만, 우리의 문화에서는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이상이자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오직 ‘지금’인 삶은 ‘문제’가 되고, 당신은 문제 많은 세상에 살아가게 되며,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행복하거나 만족할 수 없으며, 진정으로 삶을 시작할 수 없다.
현재의 순간을 장애물로 보는 한, 문제에 끝은 있을 수 없다. 삶은, 즉 ‘지금’은 말한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나는 무엇이든 되어 줄 거야. 당신이 나를 대하는 방식으로 나는 당신을 대할 거야. 당신이 나를 문제라고 보면, 나는 당신에게 문제가 되어 줄 거야. 장애물이라고 생각하면 장애물이 되어 줄 거야.’
모든 것이 시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은 ‘지금’ 속에서 일어난다. 시간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의 순간, 혹은 현재의 순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뿐이다. 직접적인 증거만을 놓고 말한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만이 존재하는 전부이다.
당신이 꿈 속에서 깨어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우리가 그 꿈 안에서 깨어나면 에고가 만들어 낸 지구상의 드라마는 끝이 나고, 더 평온하고 경이로운 꿈이 일어난다. 이것이 새로운 지구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순간을, 일어나면 안 되는데도 일어난 어떤 일, 혹은 일어나야 함에도 일어나지 않은 어떤 일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바라본다. 그 때문에 삶 자체에 내재해 있는 깊은 완전성을 놓쳐 버린다. 언제나 이미 이곳에 있는 완전성,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나지 않는 것 너머, 즉 형상 너머에 존재하는 완전성을. 현재의 순간을 받아들여, 어떤 형상보다도 깊고 시간에 의해 손상되는 일 없는 완전성을 발견해야만 한다. 유일하게 진정한 행복인 ‘순수한 있음’의 기쁨은 형상, 소유, 성취, 사람 또는 사건을 통해 오지 않는다.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얻어지지 않는다. 그 기쁨은 밖에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당신 내면의 형상 없는 차원으로부터, 의식 그 자체로부터 발산되는 것이며, 따라서 본래의 당신 자신과 하나이다.
‘작아짐’으로써 당신은 역으로 더 넓어지며, ‘순수한 있음’이 앞으로 나올 여유 공간이 생긴다. 그 때 진정한 힘이, 형상을 초월한 진정한 당신이, 분명히 약해진 형상을 통해 빛을 발한다.
자신이 특별히 아무 존재도 아님에 만족하고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당신은 우주의 힘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에고에게 약함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유일하게 진정한 힘이다.
당신은 세상의 것들에 의미와 중요성을 주지 않고도 그것들을 즐기고 음미할 수 있다. 그것들은 원래 의미와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단순한 것들의 가치를 알고, 혼자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 애정을 가지고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능력 속에는 공통된 요소가 있다. 이 공통된 요소는 배후에서 이것들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충만감, 평화, 그리고 생동감이다.
언어는 그것을 가리키는 표지판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신 안에서 직접 느낄 때 더욱 깊어진다. 그러므로 소리, 풍경, 감촉 같은 어떤 단순한 것의 가치를 알아볼 때, 아름다움을 볼 때,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과 친절을 느낄 때, 그 경험의 원천이며 배경인 넓은 내적 공간을 감지해 보라.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이 당신의 삶에 의미를 준다면, 당신의 삶이 계속 의미 있는 것이 되고 스스로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기 위해서는 당신보다 상황이 나빠지는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될 것이다. 만약 어떤 일에 뛰어나거나 승리하거나 성공하려는 욕망이 당신에게 의미를 준다면, 결코 승리하지 못하거나 어느 날 연속적인 성공이 막을 내린다면 어떻게 됩니까? 언젠가는 분명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상상이나 기억에 의존해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곳은 당신의 삶에 무미건조한 의미만을 가져다주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장소 입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이 의미가 있는 것은 다른 수백 수천만 명이 실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삶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실패’가 필요하게 됩니다. 타인을 돕는 것, 아이를 키우는 것, 어떤 분야에서든 뛰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가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큰 것은 작은 것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서 나옵니다. 저마다의 삶은 실제로 작은 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큰 것’은 머리의 추상적 개념이고, 에고가 가장 좋아하는 환상입니다. 그러나 큰 것의 기초는 큰 것을 추구하는 대신 현재 순간의 작은 것들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공에 대한 개념은 당신이 하는 일의 결과와 관계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공은 힘든 노력과 행운, 굳은 의지와 재능, 또는 적절한 때에 적절한 장소에 있는 것이 합쳐진 결과물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성공을 결정하는 요소일 수는 있지만 성공의 본질은 아닙니다. 세상이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당신이 미래에 성공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가르쳐 주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지금 성공하는 것, 오직 그것뿐입니다. 성공은 현재 순간의 성공밖에 없습니다.
현재 순간의 성공이란, 당신이 하는 일 속에, 그것이 아무리 단순한 행위일지라도, 하나의 깊이가 있는 것입니다. 깊이가 있다는 것은 조심성과 주의력, 즉 알아차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깊이를 가지려면 ‘이 순에 존재함’이 필요합니다.
보통 성공은 미래의 일이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적과 수단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만약 수단이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과는 거기에 도달하는 행동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행동에 의해 이미 오염되었다면 미래의 더 많은 불행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이것은 업을 쌓는 행위로, 불행을 무의식적으로 지속시킵니다.
당신의 삶 전체의 여행이 궁극적으로는 지금 이 순간에 내딛는 발걸음으로 이루어짐을 깨달아야 합니다. 언제나 이 한 걸음만이 존재하며, 따라서 당신은 그것에 완전한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이 한 걸음이 가장 중요하며, 목적지는 이차적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당신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무엇을 만나는가는 이 한 걸음의 성질에 달려있습니다. 미래가 당신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당신의 지금의 의식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